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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오션 1권(3화)
1장. 탈출!(3)


사랑채를 나선 노인은 부엌 쪽으로 가서 점심을 준비하고 있는 아내를 불렀다.
“임자!”
머리에 은비녀로 쪽을 진 노파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부엌에서 나왔다.
“무슨 일이세요?”
“오늘 점심을 넉넉히 준비를 했으면 해서.”
“점심을 넉넉하게요?”
“조금 넉넉하게 준비하는 것이 좋겠어. 찾아오신 손님도 있고, 막내 손주 녀석도 많이 먹을 테니 조금 넉넉히 준비하는 것이 좋겠어. 아이들 모두에게 조금 빨리 오도록 전화도 좀 넣고.”
“아, 알았어요.”
어찌 생각하면 별일도 아닌 간단한 말임에도 노인의 아내는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대답을 했다.
“손님 때문에 이만 사랑채로 들어가야 하니 준비가 되면 기별을 넣어줘.”
“알았어요.”
당부를 끝낸 노인은 뒤돌아 사랑채로 향했다.
가만히 서서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주름진 아내의 눈가가 가파르게 떨리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의 발걸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사랑채로 다시 돌아온 노인은 자리에 앉은 후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점심이 좀 늦을 걸세.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두 사람은 방 안에서 별다른 대화도 나누지 않고 가만히 앉아 점심이 준비되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여가 지나자 바깥이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노인의 자식들이 집에 도착했기에 벌어진 소란이었다.
“선생님, 이제 다들 왔나 보군요.”
“점심이 준비되면 부를 것이니 그냥 앉아 있게.”
사나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노인이 만류하며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어차피 그물 안에 든 고기였기에 사나이는 노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노인의 말대로 잠시 후 장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진지 드세요.”
“오냐!”
대답을 한 노인이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마루에 점심이 준비되어 있을 테니 이만 나가세.”
“예, 선생님.”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있는 마루에 먹음직스러운 밥상이 차려져 있었고, 집안의 온 식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앉게.”
마루에 오른 노인이 자리를 권했다.
“고맙습니다.”
오랜 세월 손때가 묻어 번질거리는 마루에 사나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다들, 먹자.”
자리에 앉은 노인이 수저를 들며 말하자 집안 식구들이 일제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집안 분위기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낯선 손님의 방문 때문인지 몰라도 노인과 식구들은 말없이 식사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가 끝나고 난 뒤, 노인의 손짓에 상이 옆으로 치워졌다.
“오늘 이렇게 모이라고 한 것은 의논할 것이 있어서다.”
가문의 법도상 식구들이 이처럼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다들 궁금한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현수야!”
잠시 가족들을 바라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예, 아버님.”
“네가 가지고 있느냐?”
“예.”
뜬금없는 아버지의 말이지만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한 듯 현수라 불린 이가 곧바로 대답했다.
“가지고 오너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기자인 현수는 바깥으로 나가 얼마 전 자신에게 제보와 더불어 봉투에 담겨 배달되어 왔던 장부를 가지고 돌아왔다.
사나이가 찾고 있는 것이었다.
아들로부터 장부를 받아 든 노인은 안색이 잔뜩 굳어졌다.
“으음, 현수야.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는구나. 원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면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아버님 뜻대로 하십시오.”
안에 담긴 내용이 범상한 것이 아니었지만 현수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여기 있네.”
노인은 검은색 장부를 사나이에게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가족들에게는 화가 미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해 준다니 고맙네. 그렇지만 자네의 마음만 받아야 할 것 같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인이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묻고 있는 사나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네야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자네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닐 것이야.”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문제의 소지가 될 장부가 무사히 회수되었다.
보고만 잘한다면 해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나이는 의아함이 가득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본가의 식솔들도 이렇게 다 모였고, 이제 원하던 것도 얻었으니 그만 나오시게.”
노인은 사나이를 바라보며 마치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말했다.
“무슨…….”
알 수 없는 노인의 말에 반문하려던 사나이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 왜, 왜 이러지? 선, 선생님…….’
어두워지며 사나이의 시야가 암흑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크크크, 역시! 남가의 가주라 다르군. 내가 있음을 알아차리다니 말이야.”
정신을 잃어버린 사나이의 입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음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륜에서 왔는가?”
사나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노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크크! 역시, 알고 있었군.”
“타인의 의식을 완벽하게 지배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지. 티가 나더군.”
“역시, 아직은 완벽해지지 않은 거로군.”
사나이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완벽하게 성취를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남가의 가주가 하는 평가라면 신뢰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내가 이 녀석의 의식 속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도주하지 않은 이유는 뭔가?”
“아이들이 이곳에 당도하지는 않았지만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도주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쓸데없는 일일 뿐이었을 테지.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단번에 끝내주면 고맙겠네.”
“크하하하하! 죽을 자리를 알았다는 건가? 역시 남가의 가주로군.”
웃음과 함께 싸늘한 살기가 집안에 번졌다.
“자네 같은 사람이 온 이상 본가의 명운이 이제 끝이 났으니 더 이상의 수치는 주지 말게.”
노인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는 듯 힘없이 말했다.
‘속셈이 뭐지?’
상당한 피해를 각오했기에 타인의 의식 속에 숨어서 왔다.
아주 힘든 전투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정말, 반항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남가의 가주가 의외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기에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하지 않았나? 반항은 고통만 가중시키는 일이지. 본가를 이 정도까지 궁지로 몰아넣을 힘을 가졌다면 그만한 긍지도 있을 터. 깨끗이 끝내주게.”
“후후후. 태륜에 들기 위해 맡은 일이기는 하지만 남가라 어려울 줄 알았는데 반항하지 않겠다니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군. 좋아! 번거롭게 만들지 않겠다니 자비를 베풀어 고통 없이 단번에 끝내주지.”
나쁘지 않는 일이다.
반항한다면 자신도 꽤나 큰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태륜으로 들어가도 경쟁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였다.
피해를 입으면 문제가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사나이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르르르…….
마루를 딛고 일어서자 아무것도 없는 사나이의 오른 손바닥에서 미끄러지듯 뭔가가 빠져나왔다.
예리하기 그지없는 검은빛의 검이 장심을 뚫고 나오고 있었다.
살을 뚫고 검이 튀어나와 고통스러울 만도 하건만 사나이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혹시나 기회를 엿보고 있다면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흑기검(黑氣劍)이 세상에 현신한 이상, 기회는 절대로 없을 테니까.”
숨겨진 한 수는 생각도 말라며 사나이는 흑검(黑劍)을 휘둘렀다.
번쩍!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섬광이 마루 안에 가득했다.
노인과 그의 자손들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차디찬 섬광이었다.


2장. 죽음!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1)


식사를 마치고 난 후부터 오늘 온 손님이 무척이나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어지는 할아버지와 대화도 무척이나 이상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는데 뭔가 벌어질 것 같구나.’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것이 아님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기분 나쁜 기운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저럴 수가!’
불길하다는 예상은 적중했다.
할아버지가 정체를 아는 것 같은 말을 흘리자 손님의 기운이 갑자기 변해 버렸으니 말이다.
흘러나오는 기운이 너무 차다.
뼛골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다.
기운이 완전히 변해 버렸고 얼굴도 다른 사람이다.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기운과는 달리 온화했던 모습이 이제는 흉신악살처럼 보였다.
풍기는 기운과 한없이 맞아떨어지는 얼굴이다.
더 이상 할아버지가 반가이 맞아주던 손님이 아니다.
장혁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에 다른 기운이다. 도대체 저자는 뭐지?’
그리 선해 보이던 눈매를 가진 자가 악마의 모습을 가진 이일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 터라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두려운 생각에 장혁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미지의 힘을 끌어올렸다.
‘히, 힘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기운이 솟지를 않았다.
주변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저자에게서 풍겨 나오고 있는 기운 때문이다.’
사나이에게서 점성이 강한 액체 같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점점 더 확산되어 가며 의지를 감식해 기운을 끌어올리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친친 감겨 오며 싸울 의지마저 빼앗아 가고 있었다.
사나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상대에게는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는 절망의 탄식과 같았다.
‘정말 무서운 기운이다.’
자신도 모르게 죽음을 떠올릴 만큼 진한 사기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기세만으로 사람을 이렇게 압박을 할 정도라면 내가 가진 힘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장혁은 눈앞의 사나이에게 자신의 힘 정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닫고는 주변을 살폈다.
구원의 눈빛으로 삼촌들을 봤지만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삼촌들도 당했구나.’
모두가 두려운 눈빛으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할아버지와 사나이와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자신처럼 삼촌들도 사나이에게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기운에 속박을 당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저건 뭐지? 검이 손바닥에서 빠져나오다니!’
알 수 없는 대화도 잠시, 장혁은 놀라운 광경에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