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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 1권 (4화)
2.아라 (3)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자.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게 있어. 이제부터 난 우리나라에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간단하게 말하자면 굶주리고 고통받는 이들이 없어졌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야.”
간단한 한 문장의 말이었지만 후폭풍은 만만치 않았다. 한국 사회의 경제 문제부터 빈부의 격차, 부의 재분배, 청년 실업 문제 등등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을 열거해 가며 설명을 하는 아라를 보며 이상과 현실이 얼마나 다른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수업을 열심히 듣는 학생처럼 아라의 말을 빠짐없이 기억하려 노력했다.
TV에서 봤던 그 아이와 같은 초극빈층 약 300만. 극빈층 약 1,000만. 하류층 약 2,000만. 아라에게 들은 우리나라의 현실은 가히 암울했다.
중산층도 일부를 제외하곤 대다수가 단지 먹고 사는 게 다였다. 부의 집중 현상은 날이 갈수록 더해져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음에도 정부로써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아라의 말이었다.
장기전. 나와 아라의 결론은 서서히 바꿔 가자는 것이다. 내가 가진 현금 3조원은 초극빈층에게 100만원씩만 돌리면 끝인 돈. 차라리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낫다는 결론이었다.
뭘 해야 돈을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일자리를 늘릴 수 있을까? 라는 글을 한쪽 벽면의 모니터에 써 놓고 뚫어져라 쳐다본다. 쳐다본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머리를 맹렬히 굴려 본다.
“에휴∼”
절로 한숨이 나온다. 공부라고는 개뿔 해 본 적이 없는 내가 생각을 한다고 떠오를 리 없다.
난 그렇다고 쳐도 아라까지 이렇게 조용하다니……. 또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슬며시 걱정스럽다.
“난 도저히 모르겠다. 좋은 생각 없어?”
“글쎄요, 모든 산업이 점점 자동화, 로봇화되어 가고 있는 현 시점에선 마땅한 게 보이지 않는군요. 그나마 사람을 가장 많이 고용할 수 있는 것이 건설 분야긴 한데 현재 우리 상황과는 맞지 않아요.”
“건설이라…… 굳이 우리가 할 필욘 없잖아? 기존의 건설 회사에 수주를 주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거 아닌가? 돈이야 주식 투자로 벌면 되구.”
“하지만 문제점이 있어요. 현재 제가 운용하고 있는 자금의 대부분은 전 세계적으로 만들어 놓은 가상 인물들에게 나누어져 있어요. 그 돈을 남몰래 기부 형식으로 뿌리지 않는 한 정확한 투자 내역을 한국 정부에 보여줘야 하는데 무리가 있죠. 제1연구소와 제2연구소의 경우도 외국인 투자 49%와 제 이름으로 51%로 투자해서 설립했는데 진하는 모르겠지만 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야 가능했어요. 그런데 만일 3조원, 아니, 앞으로 쏟아부을 돈을 생각한다면 진하의 뒷덜미가 잡힐 게 분명해요.”
“으…… 뭐가 그리 복잡해?”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결국 돈을 벌어야 하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최소한 내 이름이나 아라의 이름으로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라는 A.I일 뿐이고 난 프로그래밍밖에 모르는 바보니 웬만한 회사는 힘들다.
뭐가 있을까? 백신을 만들어 볼까? 나 혼자 먹고 살기엔 걱정 없겠다. 게임을 만들어 볼까?
……!
“게임을 만들자. 게임 회사를 차리는 거야!”
“뜬금없이 무슨 소리예요?”
“하하하!! 아라야, 우리 가상현실 게임을 만들어 보자!”
모든 고민을 확 날려 버리는 듯 난 한참을 웃었다.

***

“으! 머리 아파. 10분간 휴식!”
난 끼고 있던 글래시즈(핸드컴에 연결된 안경형 모니터)을 테이블에 던지고 소파에 눕듯이 기댔다.
일주일 전 날아간 고민은 부메랑이 되어 더 많은 고민거리를 싣고 나에게 돌아왔다. 왜 게임을 만들자고 했을까? ‘게임은 프로그래밍이다.’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물론, 여기서 그만둘 생각 따윈 없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아른거리는 그 아이 때문만은 아니다.
“이번에 만든 데이터 압축 기술과 전송 속도를 높이는 로직을 사용한다고 해도 불가능해요.”
윽, 또 실패다. 기존의 데이터 압축 기술을 2배 이상 높였고, 전송 속도도 50% 이상 높이는 로직을 만들었음에도 아라의 입(?)에선 불가능이란 말이 나왔다. 감았던 눈을 떴다.
“뭐가 문제가 되는 거지.”
“가정용 컴퓨터들의 성능, 인터넷 전송 속도, 저와 같은 슈퍼컴퓨터의 성능, 모든 것이 문제예요. 저조차도 모든 성능을 사용한다고 해도 1,000명 이상의 부하를 견딜 수 없어요.”
“왜, 문제가 되는 건데?”
게임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온라인게임에 하나의 산을 표현할 땐 산의 모양을 3D로 구현한 파일이 유저의 컴퓨터에서 표현돼요. 즉, 대부분의 처리를 유저들의 컴퓨터에 떠넘기는 거죠. 유저의 컴퓨터에서 게임 서버를 보내는 정보는 유저의 현재 위치, 상태 등 극히 일부분의 코드화된 정보뿐이에요. 게임 서버는 단지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유저가 몬스터를 잡고 있는지 잡았으면 어떤 아이템을 줄지를 결정하고 서버 코드를 유저의 컴퓨터로 보내요. 이때, 아이템의 모양 등은 역시나 유저들의 컴퓨터들에 저장되어 있어요. 하지만 진하가 만들려는 온라인 가상현실 게임의 경우 데이터 용량 자체가 현재 나와 있는 개인용 컴퓨터의 용량은 가뿐히 넘어 버리죠. 그렇다고 서버 컴퓨터가 처리를 하게 만든다면 더 많은 문제점이 생기게 되죠.”
…….
“지금 진하가 원하는 가상현실을 구현하기 위해선 유저들의 컴퓨터를 슈퍼컴퓨터로 바꾸거나 제 성능이 지금의 10,000배가 넘는다면 유저 1,000만 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거죠. 즉,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게임 회사를 포기해야 하나? 파이라 그룹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파이라 그룹을 뒤져 봤어?”
“물론이죠. 제일 먼저 모든 게임 회사들부터 살펴본 걸요. 정 안 되면 포기해요. 할 수 있는 일은 수도 없이 많잖아요. 진하가 만든 데이터 압축 기술과 전송 속도를 높이는 로직만 하더라도 응용 프로그램과 결합한다면 꽤 고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이에요.”
“하긴…….”
파이라 그룹도 계획하고 있던 단계였다면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포기할 수가 없다. 가상현실을 이루어 냈을 때 그 파급력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며 내가 이루고자 했던 목표에 훨씬 빨리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해결점은 없는 것일까? 유저들에게 보여 주는 화면을 줄일 수 있다면 가능할까? 난 다시 일본 플레이플레폼X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장치에 연결된 헬멧 모양의 게임 기구와 손에 장갑을 꼈다.
가상현실 게임의 패키지 형태는 전 세계적으로 유행을 하고 있다. 일본의 플레이플레폼, 미국의 PBox, 파이어플레이어가 가정용 가상현실 게임을 만드는 곳인데 비싼 가격임에도 시장에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다.
느린 로딩 화면이 끝이 나자 사막 한가운데 총을 들고 있는 나. 위를 쳐다보자 어느 순간 더 이상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좌우로 몸을 돌려 보니 역시나 일정 각도를 지나자 몸이 더 돌아가지 않는다. 총을 자동으로 놓고 쏴 보았다.
드르르르륵!
몸의 반동이 느껴지며 총이 공중으로 들린다. 총소리 또한 요란하다. 귓속으로 미션이 전해진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적의 기지를 폭파하란다. 일주일 동안 몇 번 해 봤기에 익숙하게 진행해서 미션을 완료한 후 헬멧과 장갑을 벗었다.
물론, 이후로도 몇 가지 미션과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다곤 해도 전체 플레이 시간은 2시간이 되지 않는 게임이다. 처음엔 나도 신나게 했었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가물거리거나 참조할 때를 제외하곤 잘하지 않는 편이다.
난 게임기에서 네모난 팩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진다. 이 게임팩 한 장이 일반 컴퓨터의 하드디스크 용량 정도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가상현실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로딩 시간도 길고, 상하좌우로 200도, 240도씩 영상을 보여 주는 정도랄까?
눈을 감고 상상한다. 거대 도시 전체를 어떤 식으로 표현할지 공기의 시원함과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을 어떻게 느끼게 할지도. 머릿속은 온통 문제 해결을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어? 상상 속에서 드는 갑작스러운 의문. 왜 나의 뇌는 미국 도시의 정경을 아무런 의심 없이 볼 수 있는 거지? 왜 어제 먹은 불고기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육즙을 느낄 수 있는 거지?
“자, 잠깐! 아라야, 현재의 이 헬멧의 작동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뇌파를 통한 입력과 출력을 담당해요. 한마디로 입력장치와 출력장치의 역할을 하죠. 미국에서 발표한 브레인 맵의 시신경과 관련된 부분을 주로 사용하는데, 시신경에 전달되는 정보는 규격화되어 있어요. 즉, 간단하게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평 150도 수직 140도의 화면이죠. 그걸 기준으로 최대한 보여 줄 수 있는 화면은 240도, 200도 정도예요. 또한, 그 화면을 보여 주고 움직이는 정보를 토대로 정보를 처리해요. 계속 새로운 형태의 헤드셋이 나오곤 있지만 현재로선 이 방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요.”
“그렇다면 혹시 산이 크다, 작다, 높다, 나무가 있다, 없다는 정보를 처리하는 부분도 있겠네?”
“당연히 존재하죠. 하지만 그 부분에는 정보를 줄 순 있어도 정보를 받을 순 없어요. 하나의 산을 보더라도 개개인마다 그 산을 볼 때 느낌은 다 다르니까요.”
머릿속에서 조금씩 정리되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내가 지금 하는 말을 듣고 가능한지 판단해 줄래?”
“좋아요.”
“화면을 뿌리는 방법 대신에 수치를 정확하게 뇌에 전달하는 거야. 만일 산을 기준으로 해 보자. 산의 높이와 모양 등을 좌표화, 수치화해서 뇌가 알아서 판단하게 만드는 거지. 물론, 산에 있는 나무 하나하나도 수치화해야겠지만 유저 컴퓨터에서 중간의 메모리 역할을 하는 곳을 만들어 미리 심어 두는 거야. 문제는 그 수치화 과정을 겪을 때 너에게 부담이 되느냐 안 되느냔데…… 어때? 이런 방법은?”
“좋은 생각이네요. 테스트해 봐야겠어요.”
난 다시 글래시즈를 썼다. 방금 생각한 것을 프로그래밍화해야 한다.
해 보는 데까지 해 보고 도저히 힘들다 생각들 땐 패키지 게임이라도 만들 생각이다. 데이터 압축 기술과 전송 속도 로직만으로도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3.한 걸음씩 (1)


2041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거리엔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들떠 있었고, 많은 이들이 연인과 서로를 바라보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진하도 나가서 즐기다 와요. 곧 크리스마스잖아요. 그동안 너무 개발에만 몰두했잖아요?”
“그래 볼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니, 지금쯤 한참 향락에 빠져 있을 녀석들이 있지만 이제는 그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이 모양이군.
코리였을 때 크리스마스는 오히려 곤혹이었다. 가족도 없었고,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특히나 상가의 문이 닫혀 밥해 먹는 것도 짜증났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기간에는 호텔에 들어가 야경 구경하는 게 다였다.
뭐, 지금 모습도 별 다를 게 없지만.
“고아원과 양로원에 선물 보낸 건 어떻게 됐어?”
“며칠 전 말했잖아요. 다 됐다고.”
“그랬었나?”
날씨가 싸늘해지는 11월 중순부터 불우 이웃 돕기에 동참했다. 전국의 고아원과 양로원, 소년 소녀 가장, 독거 노인들에게 익명으로 돈과 생필품, 선물을 전달했다.
아라의 은행 잔고가 많이 빠지긴 했어도 중국 상하이 거래소에서 약간의 투기를 묵인했으니 지금쯤 잔고가 더 많아졌을 것이다.
아라의 눈치에 결국 밖으로 나왔지만 차만 막힐 뿐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춥기만 추웠다.
마침, 옆에 서 있는 버스에 올랐다. 몸도 녹일 겸 야경이나 구경할 생각이다.
버스 안의 따뜻함이 반가웠다. 빈자리를 훑어보는데 웬 여학생이 앉아 있는 옆자리만 비어 있었다. 살짝 고개를 숙이곤 자리에 앉았다.
가상현실 게임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뭔가 돌파구가 생겨났다 싶으면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오늘 오전까지도 새로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야 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을 수치화시킨 데이터를 어떤 식으로 각인시키느냐? 음…….
피식 웃음이 나온다. 기껏 쉬려고 나왔는데 이 모양이다.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꽉 막힌 차선 때문에 바깥의 풍경이 훨씬 눈에 잘 들어온다. 웃으며 지나가는 학생들, 무언가를 나눠 주며 호객 행위를 하는 술집 종업원들, 쇼핑을 하고 왔는지 뭔가를 잔뜩 들고 불법주차한 차로 가는 사람들…….
문득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에서 point를 사용해서…… 그러면 아까 변수로 지정한 것이…….”
이제 보니 손에 패드형 컴퓨터를 들고 뭔가를 작성하고 있다. 호기심에 살짝 곁눈질로 살펴보니 뭔가를 프로그래밍하는 중이었는지 영어와 각종 수식으로 이루어진 코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