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내가 가는 길 1권 (5화)
3.한 걸음씩 (2)


머릿속으로 순간 본 코드들이 주르륵 지나간다. 그와 함께 보지도 않은 그 앞의 코드들과 이어질 코드들도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또, 또 직업병이다. 이럴 때만 천재적으로 돌아가는 머리가 원망스럽다.
대략적으로 그려 본 코드는 압축된 데이터를 빠르게 어디론가 전달하는 프로그램의 일종으로 보인다. 가상현실 게임에서 내가 만들어 낸 데이터 압축 기술과 전송 속도 로직의 다른 형태다.
인터넷, 로봇, 쌍방향 디지털TV, 컴퓨터, 심지어 공장 자동화 시설에서조차 이러한 기술의 개발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점과 몇 가지 해결 방법이 떠올랐기에 관심을 가지고 여학생을 보았다.
근데, 이 학생 씻고는 다니는 건가? 머리가 아주 지저분하다. 떡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먼지 뭉치와 비듬도 군데군데 보인다.
“뭐죠?”
머리카락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던 난 깜짝 놀랐다. 머리카락으로 반쯤 가려진 눈이 희번덕거린다.
“저, 그러니까…… 그냥…….”
“그냥 뭐요?”
여전히 매섭게 바라보는 여학생의 모습이 문득 귀엽게 느껴진다. 여동생이 삐쳐서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볼을 쭈욱 하고 당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참아야 했다.
성희롱으로 경찰서에 가긴 싫다.
“음…… 그냥 호기심에 봤어요. 제가 프로그래밍에 좀 자신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여전히 말없이 째려본다. 정말이지 볼을 당겨 보고 싶다. 난 그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그녀가 들고 있는 패드형 컴퓨터를 살짝 잡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여기 부분에 코드를 이런 식으로 고치면 어떨까요? 물론, 그렇게 하면 위쪽 코드와 아래쪽 코드를 조금씩 바꿔야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이렇게 하는 게 훨씬 나아 보이는데 어때요?”
잠시 흠칫하던 그녀. 뒷자리에 사내 두 명도 호기심이 이는지 내 쪽으로 몸을 기우는 듯했지만 계속 말을 했다.
“위쪽은 이런 식으로, 아래쪽은…… 이런 식으로. 어때요?”
내 쪽으로 당겨 아예 위쪽과 아래쪽 코드도 바꿨다. 그리곤 그녀에게 어떠냐는 식으로 물었다. 매섭던 시선은 어느새 패드에 고정. 움직일 줄 모른다.
괜스레 무안해진다. 이미 나라는 사람이 있는지조차 잊어 먹었는지 화면을 아래위로 내리며 코드만 본다.
“그, 그럼. 전…….”
난 무작정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곤 뒤도 안 보고 걷기 시작했다.
“휴∼ 괜한 호기심 때문에 이게 뭐람. 으∼ 추워!”
도망치듯이 걸을 땐 몰랐는데 날씨가 추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설지 않은 곳. 진하의 기억에 있는 장소와 가까웠다. 자연스레 발은 그곳으로 향했다.
연말이라 그런지 들어가는 사람들이 몇 팀 되어 보였지만 시내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고급 룸살롱은 조용했다. 정문 쪽을 지나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3년만인가? 이런 곳을 다니다니 진하는 역시 막나가던 녀석이었다.
“아라야, 여기서부턴 혼자가야겠다.”
―오홍! 알았어요.
검색이 심한 곳이라 절대 전자 장비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물론, 폐쇄 시스템만 아니라면 아라는 해킹을 해서 나의 행동을 지켜볼 것이다.
지하 주차장의 한쪽에 있는 창고 같은 문 쪽으로 갔다. 감시 카메라 쪽으로 얼굴을 보이자 문이 열린다.
“여전하군. 비밀번호는 안 바꿨나?”
엘리베이터 옆의 버튼을 몇 번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타자마자 문이 닫히며 아래로 내려간다.
“오랜만이네.”
“이모, 미모는 여전하네요.”
환한 미소로 반기는 30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인은 이곳의 실질적인 주인이다. ‘모 재벌과 내연 관계다.’라는 소문은 무성했지만 정확한 건 알 수 없는 여인.
“어떻게 지냈어?”
“잘 아시면서 왜 물어봐요?”
내가 마약 치료를 위해 입원했다는 건 이곳에선 비밀도 아니었다. 나와 어울리던 녀석 중 한 명이 벌써 나불거렸을 테니.
“근데, 집에 무슨 일 있었어? 벌써 몇 번 사람이 와서 널 찾더라.”
이철호. 그자가 찾았겠지. 아무래도 뒤가 켕길 테니…….
“오늘 여기 온 건 비밀로 해 주세요.”
“당연하지! 나 보러 왔을 리는 없을 테고, 파트너 붙여 줄까?”
“헐, 이곳에 오래 계시더니 감각이 떨어지셨나 봐요. 저 이모 보러 온 것 맞아요.”
“어머! 얘가 아부도 할 줄 알고. 예전과 분위기가 달라 보이더니 성격도 많이 바뀌었네.”
“이제 정신 차려야죠.”
“그래, 그래야 파트너 붙여 주는 내 마음도 편하지. 이거 보고 말해 줘. 규칙은 설명 안 해 줘도 되지?”
여러 사진들 속 아가씨들 중 마음에 드는 이를 찍곤 안내해 주는 방으로 향했다.
이곳 규칙은 나름 간단하다. 선택한 파트너가 마음에 들어 데리고 나가려면 앞길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아가씨들 중 연예인을 원하면 연예인을, 돈을 원하면 돈을 주어야 한다. 계약 기간과 아가씨에게 지원해야 할 내용은 마담과 합의를 거쳐야 하지만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겐 별로 어렵지 않은 내용들이다. 물론, 파트너를 데리고 술만 마셔도 된다. 대신 손은 댈 수 없다.
세팅된 테이블. 이런 자리가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코리였을 때도 틈만 나면 이런 곳을 들락거렸으니까.
똑똑!
술을 한 모금 마시는데 이모가 들어왔다. 닫히는 문 너머로 내가 선택한 아가씨가 섹시한 차림으로 서 있는 것이 얼핏 보이곤 사라진다.
“간단히 아가씨가 원하는 바를 말해 주러 왔어.”
“이모, 한 잔 드시면서 해요.”
“그래, 뭐에 대해 건배할까?”
“이모와의 짧은 만남을 위해. 하하!”
“자식, 능글맞긴……. 일단, 데리고 나가려면 간단한 건 알아야겠지?”
“그냥 술만 먹고 갈 거예요. 대화 상대가 필요해서 왔을 뿐이에요.”
“훗! 뭐 그렇다곤 해도 일단 설명이라도 들어 봐. 아가씨가 원하는 바를 얘기해 줄게. 일단은 연예인이 되고 싶어해.”
역시나 여기에 오는 90% 이상의 아가씨들이 원하는 바이니 이상할 게 없었다.
“성형 수술은 원하지 않지만 원한다면 한 번쯤은 가능해. 물론, 가슴 성형은 안 돼. 계약 기간은 2년쯤 원하고 규칙에 있는 것처럼 계약 후에는 프리(Free)한 상태를 원해. 물론, 마음이 바뀌게 만드는 건 알아서 해야 하구. 큰 줄거리는 이 정도야. 참, 집은 안 사 줘도 되는데 생활비는 좀 넉넉히 줬으면 좋겠어. 이건 내가 원하는 거니까 들어줄 수 있지? 그리고 아가씨가 마음에 안 들면 말해. 다른 아가씨 보여 줄 테니까. 마음에 들면 이번엔 정말 잘해 줘야 해. 지난번처럼 한다면 이번엔 내가 너를 용서 못해. 알았지?”
이모의 설명을 들으며 이게 무슨 짓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그냥 술만 마시고 갈 테니까. 응? 근데, 마지막 말이 이상하다. 뭐지? 뭔가를 잊고 있었나?
맞다! 그때, 그녀!
“이, 이모, 지난번 그 여자애는 어떻게 됐어?”
묻기가 미안했다. 연예인이 꿈이라던 그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마약을 하던 당시의 일이라 기억마저도 띄엄띄엄하다. 하지만 알고 싶었다.
이곳 규칙은 한 번 누군가의 파트너가 되면 절대 이곳에선 받아 주지 않는다. 아니, 이곳뿐만 아니라 속칭 서울 화류계에서는 완전히 퇴출이다.
“휴∼ 잘 있어. 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번에 파트너 될 애나 신경 써 주렴.”
…….
생각을 못했으면 모를까 신경이 거슬리긴 했다. 물론, 진하가 벌인 일이었지만 내가 한 것처럼 죄책감이 느껴진다. 나중에 다시 묻기로 하고 지금은 들어오는 아가씨에게 신경을 써야 했다.
“안녕하세요. 이름은 한유리예요. 나이는 스물이고요.”
조명을 밝게 해 둔 상태라 모든 것이 잘 보였다. 얼굴, 몸매, 목소리 모든 게 일단 합격선이다.
“앉아.”
내 말에 환하게 웃으며 옆으로 다가온다. 화장은 기본만. 향수 냄새도 전혀 없지만 다가온 순간 아찔함이 느껴진다.
많이 굶긴 굶었나 보다. 하지만 감각을 하체에서 머리로 옮겼다.
“오늘은 대화 상대가 필요해서 온 거니까 부담 갖지 마.”
“어머, 부담은 무슨 부담이에요. 편히 있다 가세요.”
웃는 모습이 꽤나 예쁘다. 이놈의 몸 아래가 말을 듣지 않는다. 술을 마시며 가벼운 대화를 나눈다.
한유리는 올해 스물로 대학 1학년. 가정 형편상 그녀가 택한 곳은 술집 아르바이트. 미모와 몸매, 그리고 한국에서 손꼽히는 여대에 다니는 그녀는 운 좋게도 이모의 눈에 띄어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하던데 가수? 아님, 연기자?”
“진하 씬 이상한 걸 다 묻네요. 호호! 일단은 연기자예요. 하지만 TV에 나올 수 있다면 어떤 것도 상관없어요. 제가 보기완 다르게 노래와 연기 둘 다 잘하는 편이거든요. 얼마 전에 여기 있던 언니가 TV에 나오는 거예요. 얼마나 부러웠는데요. 그래도 그 언니 여기서 나이가 좀 많은 편이라 힘들어 했는데 잘돼서 너무 다행이에요.”
수다쟁이다. 한 가지를 물으면 줄줄이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마음에 든다. 마치 아라와 같다고 할까? 아무래도 대인 관계가 협소하다 보니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게도 힘들었다. 물론, 아라에게는 예외였지만.
유리의 스스럼없는 말투 때문이었을까? 내 마음도 조금 풀리는 것이 느껴진다.
“너 보기완 다르게 말이 많은 편이구나.”
“어머! 죄송해요. 큰 언니에게 항상 듣는 소리였는데…… 오……빠가 편해 보여서.”
금세 시무룩해지기는. 하긴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내가 잘 안다. 간혹 유리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드물다. 거의 대부분이 과묵하고 순종적인 걸 좋아 한다. 단지 짐승적인 욕구를 풀려는 관계에게 필요 이상 정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괜찮아. 난 오히려 말 많은 편이 마음에 드니까. 노래도 잘한다니 한잔하고 한 곡 해 봐. 내가 엄격히 심사해 줄 테니까.”
웃으면서 얘기하니 금세 얼굴이 밝아진다. 노래는 요즘 잘나간다는 가수의 노래였다. 아주는 아니지만 깨끗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짝짝짝짝!
“잘하네. 조금만 다듬어도 가수 할 만하겠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쌍꺼풀이 없지만 동그랗게 뜬 눈이 귀여워 보인다.
윽! 곤란해. 법적으론 아직 미성년자라고. 감정을 조절하려 술을 마신다. 하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사태는 악화되어 간다. 결국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다른 걸 물었다.
“이모님 말씀 들으니까 돈이 필요한 것 같던데 이유를 물어봐도 돼? 곤란하면 안 해도 좋아.”
“음……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왠지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말하기 어렵네요. 아버지가 사업을 하시는데 요즘 많이 힘든 상태세요. 밑에 동생들도 3명 있구요.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생활비를 보내야 해서요……. 솔직히 말할게요. 전 돈을 많이 벌어야 해요. 스타가 되서 아버지 빚도 갚아야 하구요. 절 선택해 줘요. 짧은 시간이지만 진하 씨가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진하가 능력이 되면…….”
“됐어, 그만해.”
말투에 습기가 가득해지자 말을 멈추게 했다.
유리가 이곳에 온 지 6개월이 넘었지만 선택이 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이성적이기 보단 감성적이다. 계약 관계를 맺기에도 껄끄러운 상대였으리라. 그녀의 말을 듣자 갑자기 술이 깼다.
“결국…….”
“미안, 내가 괜한 걸 물었다. 아까 얘기했듯이 난 여기에 그냥 대화를 하기 위해 왔어. 하지만 너의 문제에 대해선 내가 노력해 볼게.”
“마,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리고 제가 이런 거 큰 언니껜 말하지 말아 주세요.”
휴∼ 괜한 걸 물어 유리의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미안했다. 내 파트너가 아닌 이상 그녀의 일에 간섭하는 건 사실 이곳의 규칙에 어긋난다. 그녀의 파트너가 나중에라도 생긴다면 괜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유리야, 우리 친구하자.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잖아? 친구 좋다는 게 뭐니? 친구가 친구 집을 좀 돕는다고 누가 뭐라겠어? 이모님도 이해해 주실 거야. 괜찮지?”
내 말을 이해했는지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그리곤 눈물을 떨군다.
“고마워요. 치, 친구니까. 친구 앞에서 이렇게 우는 거 괜찮죠? 큰 언니도 이해해 주겠죠?”
날 껴안고 서럽게 운다. 그녀의 마음을 공감할 순 없지만 이해할 순 있을 것 같다. 단 몇 프로라도…….
“바보, 친구끼린 반말하는 거야.”
한참을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

전기스토브 위의 주전자가 연신 증기를 내뿜는다. 마치 고전 영화의 기차가 달리는 장면 같다. 가게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공기가 싸늘하다.
손님도 나 혼자여서일까? 벽 쪽에 히트로 보이는 거대한 기계는 장식품처럼 서 있기 만할 뿐이다.
“옵빠! 뭐 드실래요?”
시집간 큰 누님처럼 생기신 분이 날더러 오빠라니. 우아하게는 아니더라도 나름 생각에 빠져 있는데 이 무슨 어이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커피? 쌍화차?”
팔짱까지 끼고 말하는 모습에 난 내가 있는 곳을 인지할 수 있었다. 만날 사람이 있어 약속 장소로 잡은 곳이 이 ‘다방’이었다. 기억 속 어디에도 와 본 적이 없던 곳이니…… 호텔 커피숍으로 생각하는 내가 어리석은 것이다.
주문을 하려고 메뉴판을 찾으려는데 메뉴판이 없었다. 벽에 붙어 있는 메뉴가 다였다. 난 가격을 보고 히트가 왜 작동하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