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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 1권 (6화)
3.한 걸음씩 (3)


“커, 커피 주세요.”
“옵빠, 나도 한 잔 마셔두 돼?”
“네, 드세요.”
“언니! 커피, 쌍화차 한 잔씩! 옵빠, 이곳 사람 아니구나. 어디서 왔어?”
누님, 이러지 마세욧!
“서, 서울이요.”
갑자기 옆자리에 앉으며 얼굴을 들이밀며 물어 온다. 목구멍에서 나오려는 말을 겨우 삼키고 말했다. 난 예의 있는 놈이니까.
“어머, 무슨 일로?”
“그냥, 일 때문에…… 헉!”
이 아줌씨가 어따가 손을. 테이블 밑 허벅지에 어느새 손이 올라가 있고 금세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재빨리 다리를 반대편으로 꼬았지만 오히려 더 이상한 자세가 되었다.
“흠! 좀 있다 올 걸 그랬나?”
탁하고 굵은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쳐다봤다. 젠장, 오늘 만나기로 약속한 사내가 능글거리며 서 있었다.
“어머, 한 사장님 손님이었어요? 잘될 수 있었는데 아쉽네요.”
쿨하게 일어서는 아줌마(?).
한 사장이 커피 한 잔을 더 주문하니 휭 하니 가 버린다.
“댁이 날 만나자고 전화한 사람이오?”
“그래요, 한만호 씨.”
“…….”
한만호의 웃고 있던 얼굴이 순간 굳어진다. 나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테지. 하지만 댁의 말투나 좀 고쳐요. 난 지금 손님으로 온 거란 말이요, 손님!
“뭐, 어느 댁 자제분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일거리를 준다기에 나왔으니 말이나 들어 봅시다.”
자리에 앉은 한만호의 눈은 말투완 다르게 조금 불안해 보인다. 당연하다, 그는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일 테니.
“저는…….”
“그런데 한 가지! 무슨 소문을 듣고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시공 가격을 후려치거나 할 생각이면 그만 돌아가슈.”
“제가…….”
“참, 9개월짜리 어음 따윈 사양이오.”
“에이 정말! 말 좀 합시다, 말 좀! 무슨 일로 왔는지 들어나 보고 그런 말하면 이해라도 하지.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어음 때문에 쫓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짜증이 폭발했다. 정말이지 한유리의 아버지만 아니었어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것이다. 한유리와의 일을 아라에게 얘기한 후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미안하오. 내 지금까지 워낙 당하고 살다 보니…… 이해하슈. 이제부터 말 끊지 않고 경청하겠소.”
미안한 표정을 짓는 한만호를 보니 화를 풀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명색이 친구 아버진데 계속 막나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제가 한 사장님께 말하고 싶은 것은…….”
“커피 나왔어요.”
“휴∼”
이놈이고 저년이고 당최 말을 못하게 만드는군.
“결론만 말하죠. 일을 의뢰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여기 도면을 확인해 보세요.”
테이블에 도면을 펼쳐 보였다. 하지만 그는 흘낏 보고 시선을 돌린다.
“후루룩! 거 말을 고맙긴 한데 사람 잘못 찾아왔소.”
“왜요? 시공 경험이 없는 겁니까?”
“경험이야 많지. 그런데…… 개인적인 사정이 있소. 다른 업체를 찾아보슈.”
“할 능력이 없는 건 아니고요?”
자존심을 건드려 보았다.
“무슨 소릴! 나 한만호요, 한만호. 어려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한때 대형 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사람이오!”
“근데, 왜 못하시겠다는 겁니까?”
“험, 개인적인…….”
참, 딸내미는 아버지와 동생들을 위해 부끄럼 따윈 벗어던지고 지내는데……. 참지 못하고 말을 했다.
“빚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시고요?”
“아, 알고 있었소? 그걸 알면서도 나에게 맡기려는 저의는 뭐요?”
“저의 따위는 없습니다. 일단, 총공사 비용의 10%를 먼저 드리죠. 그걸로 빚도 갚으시고 건설 장비에 걸린 차압도 푸세요.”
커피를 마시던 한만호의 눈이 번뜩인다.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견적서는 받아야겠지만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가격에서 큰 차이가 없으면 받아들이죠. 또한, 공사비의 20%로는 일 시작하자마자 일시불로 드리죠. 나머지는 공사 진척도에 따라 바로 현금으로. 이 정도면 만족하시나요?”
“……!”
“함정 따윈 없습니다. 단지 두 개의 조건밖에 없습니다. 첫째, 설계도대로 튼튼하고 아름답게 지어 줄 것. 둘째, 일하는 분들은 꼭 필요한 인력을 제외하곤 생활이 어려운 분들을 우선 채용해 줄 것. 어떻습니까?”
놀란 표정이 우습다. 커피를 든 채 마치 마네킹처럼 굳어 있다.
“하하하하하하!”
그러다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는다. 다음 하는 말이 걸작이다.
“혹시, 어떻게 불러야 할지…….”
“그냥, 이 실장이라 불러 주세요.”
“하하하! 이 실장. 내 살다 보니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군. 혹 지금 나랑 장난을 치는 거라도 용서해 드리겠소. 하하하하!”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이런 일을 처리해 줄 사람이 절실해진다.
“그럼, 본격적으로 얘기해 볼까요? 이 실장님.”
또다시 표정이 바뀌어 정색하며 말을 꺼낸다. 카멜레온이신가? 어쭙잖은 동정심에 시작했지만 유리의 아버지인 한만호에 대해 아라는 모든 조사를 했었다.
아라가 내린 결론은 괜찮은 사람이란 것. 남을 위할 줄 알고 직원들에게 신망이 높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냥 도움만 주려다 아예 일을 떠맡기자고 결론을 내렸다.
특히 밑에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빈민가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에서 놀랐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존재한다는 것이 기쁘기도 했고.
말은 빠르게 진행됐다. 준비했던 가계약서까지 일사 처리되었다.
“……한 가지 질문에 설명해 줄 수 있소?”
“제가 이 일을 박 소장님께 맡기는 이유요?”
“뭐,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런 거죠? 이유가 뭐요?”
“그냥 돈 많은 철부지의 미친 짓쯤으로 생각해 두시죠. 지금은 그 편이 좋을 듯싶군요.”
“철부지의 미친짓이라…… 뭐, 어떤 쪽으로 생각하든 나로선 손해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 실장, 내 동생 할 생각 없소?”
어느새 은근슬쩍 말을 틀 기세다. 당신 같은 형 따윈 필요 없어요. 그리고 말은 안 했지만 당신 딸과 난 친구라고요.
“싫은데요.”
“으하하하! 좋아! 이제부터 내 동생이다. 그런데 동생 이름도 모르는데 어쩌지? 이름이 뭐지?”
“아, 글쎄 싫다니까요. 나이도 아버지뻘이시면서…….”
“그래, 그럼 조카 할래? 난 아무래도 동생이 좋은데. 동생 하자!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안 그런가, 이 실장? 마음만 맞으면 됐지? 동생 생긴 기념으로 술이나 한잔하러 가지.”
아, 글쎄. 인간이 말을 듣는 거야 마는 거야. 어이, 손 좀 놓죠?

어이, 한만호 씨 손 좀 놓으라고∼∼∼∼∼요!!!

***

해를 넘겨 새로운 봄이 왔지만 작년의 봄과 달리 포근하게 느껴지는 건 분명 기분 탓이리라. 하지만 지난달에 드디어 성인이 되었다(만 18세 성인으로 설정)는 것과 가상현실 게임의 문제점들을 모두 해결했다는 점도 분명 영향이 있다.
아라의 자체 테스트에선 모든 것이 완벽했다. 여의도 크기의 맵에 5,000명의 NPC로 시작해 10만 명을 넘길 때까지 아라의 부하는 10%를 넘지 않았다. 수치만으로 따졌을 땐 서버 컴퓨터 10대면 천만 명이 동시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결론. 물론, 유저의 테스트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그전에 해결할 것들도 있었다.
PC에서 가상현실 게임을 즐기기 위해선 핸드컴에 연결하는 헤드셋이 꼭 필요한데 현재 나와 있는 헤드셋에는 브레인사의 브레인칩이라는 가상현실을 느끼게 해 주는 칩이 장착되어 있다.
하지만 그 칩으론 70% 정도의 감각밖에 사용할 수 없어서 완성되지 않은 제1연구소의 한편에서 지난달부터 새로운 칩을 개발 중이다.
뭐, 굳이 개발하지 않아도 브레인 칩에 맞게 프로그램을 손본다면 95%까지 높일 수 있었지만 광범위하게 쓰이는 브레인 칩과 그 연관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특허료가 어마어마하다. 그 돈을 뺏길 순 없었으니까.
“우와, 사람들 정말 많이 지원했네.”
소파에 앉아 무액정 3D 모니터에 지원자들 현황을 보고 있다.
“돈도 주고 새로운 게임 테스트도 하고 일거양득이니까요.”
“벌써 10,000명이 넘어가는데 몇 명쯤 테스트할 생각이야?”
“1,000명쯤요.”
“그럼, 멈춰야 하는 거 아냐?”
“지원자들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죠. 그중에서 뽑으면 되니까요. 2주간 리조트를 빌려서 합숙으로 테스트를 진행할 생각이에요.”
“합숙으로? 오려고 할까? 방학도 끝나서 오기 힘들 텐데?”
“호호, 모집할 때 이미 공지해 뒀어요. 그런데도 저 정도 인원이 지원했잖아요.”
“정말?”
정말이지 청년 실업이 문제긴 문제였다. 아니, 악순환이라고 할까? 청년이 돈을 벌어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서 돈을 쓴다.
그게 또 일반 가게들을 먹여 살리게 되고 기업도 먹여 살리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끊어진 고리는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지게 된다. 지금의 사회문제도 대부분 이러한 고리가 끊어져서이다.
아라의 말에 의하면 특히 지금이 중요하다. 통일전쟁을 겪으며 이른바 전쟁 베이비붐 시대가 있었다. 그 세대들이 몇 년 만 지나면 사회에 쏟아질 것이다. 아니, 지금도 조금씩 쏟아지고 있다. 반드시 이 고리를 이어야 그 악순환에서 벗어날 텐데…….
“아! 설마……?”
“맞아요. 테스터들 중에서 회사에 필요한 인원을 뽑을 생각이에요. 게임 회사니까 게임을 잘 아는 이들이 필요하잖아요.”
“천재야, 천재!”
아라에게 활짝 웃어 주었다. 그래 이렇게 천천히 시작하면 되는 거였어!



4.테스트 (1)


가상현실 게임과 TSB칩(The Second Brain)의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인원을 감안해 1,100명의 지원자를 뽑았는데 최종적으로 1,056명의 테스터들이 리조트의 대강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번 테스트의 경우 모든 것이 비밀을 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지신 핸드컴, 기타 촬영과 녹음이 가능한 모든 전자 제품은 각자의 방으로 가신 후 진행 요원에게 맡겨 주시길 바랍니다. 혹시나, 불법적인 촬영과 정보 유출이 발견될 시, 민, 형사상의 법적 조치가 이루어질 것임으로 부디 개인적인 손해를 보지 않도록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들어오실 때 테스트 과정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한 보험에 사인하지 않으신 분은 이 자리가 끝난 후 저희 진행 요원에게 반드시 말씀하셔서 불이익이 없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밖에 나가시면 여러분의 이름과 배정된 방 번호가 있을 겁니다. 확인하시고 각자의 방으로 이동하시면 되겠습니다.”
천여 명의 테스터 진행 요원 중 책임자의 말이 끝나자 일제히 강당 밖으로 향한다. 나도 그들에 휩쓸려 밖으로 나왔다. 각자의 방을 확인하기 위해 웅성거리는 사람들. 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라를 원망하고 있다.
“진하도 테스트에 참석하세요.”
“왜?”
“사장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만든 게임에 대해서 모르면 어떻게 해요? 미래의 직원들 얼굴도 볼 겸해서 다녀오세요.”
집에서 할 수 있는 테스트를 왜 굳이 이곳까지 와서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따져 봐야 소용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도 북적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인지 머리가 아프다. 코리였을 때 이러한 곳은 기피의 장소였는데. 그래도 산속에 있는 리조트라 시원한 공기가 나쁘진 않다.
깊게 숨을 들이키곤 지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사장으로써 유일하게 혜택을 받은 것이 있다면 가장 전망 좋은 방과 미리 방 번호를 알았다는 것 정도? 아, 한 가지 더는 귀에 아라와 얘기할 수 있는 장치가 있다는 것뿐이다.
방으로 들어가자 이미 7명의 남자들이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다.
“어, 마지막 사람 왔네요. 어서 와요. 앞으로 2주간은 함께 지낼 텐데 통성명이나 해요.”
30대 초반? 조금은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가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넨다.
같은 상황에 처해 있어서일까? 모두들 친해지려는 분위기다.
난 가방을 한쪽에 놓아두고 자리를 내어 주는 곳에 살짝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간단히 자기소개하고 재밌게 지내 봐요. 전 올해 서른한 살이구 이름은 김형주, 경기도 수원에 살아요. 잘 지내 봐요.”
“우와, 형님이시네. 전 올해 스물여섯이구 신종완입니다. 고향은 함경북돈데 지금은 동두천에 살고 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전 올해 스물다섯이구 최상진입니다. 서울 서대문구에 살고 있습니다.”
“어? 저도 서대문에 사는데……. 전 스물넷이고 오영수라고 합니다. 전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 살고 있습니다. 형님들, 재밌게 지내요.”
“지는 올해 스물아홉이고 경상도 산청에 삽니더. 잘 부탁드려예∼ 참, 이름은 나영철이라예.”
“류인준입니다. 스물여섯이고 평안도에서 왔슴다.”
소개 때마다 가벼운 박수와 함께 서로 웃는다.
“전 이진하라고 합니다. 올해 스물입니다. 서울 강남구에 살고 있어요. 잘 부탁드려요.”
“이야, 막내네. 얼굴도 잘생겼네.”
소개가 끝이 나자 편안한 자세들로 바꾸며 이런저런 얘기가 오고 간다. 말을 트는 사람도 있었고, 서로 하는 게임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