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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오션 1권(9화)
4장. 사라진 증거들(1)
크흐흑!
갑자기 돌변해 버린 그놈으로 인해 가족들이 무참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신과 같은 차가운 표정과 함께 놈의 손에서 뿜어진 시리도록 하얀 섬광이 모든 것을 앗아갔다.
가족들을 죽음의 나락으로 내모는 것을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세상이 좁다 오시하던 것이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머릿속에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다가오는 죽음을 순순히 맞이하는 것밖에는 없었으니 말이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놈이 손을 움직이고 난 뒤 섬광의 뒤편에서 핏빛 나비가 날아올라 선홍의 망울을 떨어트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방울진 선홍의 선혈은 한 사람의 모든 것!
바로 내 가족들의 목숨으로 빚어진 마지막 전율이었다.
선명한 기억과 극도의 고통을 심어 준 그놈은 그렇게 나에게 핏빛 나비의 잔혹한 춤사위를 보여주었고, 난 두려움으로 왜소해질 수밖에 없었다.
핏빛 망울은 지금도 비린내가 맡아질 듯 선명하지만 어째서인지 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의식을 잃기 전에 놈의 아름다운 손짓과 함께 고통을 넘은 짜릿함이 내 심장에 찾아왔다는 것까지만 기억이 난다.
분명히 두 눈으로 보았던 놈의 얼굴도, 놈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도 마치 빛 바랜 사진처럼 희미하기만 하다.
죽으면서 기억의 일부가 사라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죽은 것일까, 산 것일까?
소리도 없고, 빛도 없는 이 공간은 사람이 죽으면 오는 곳인 것 같아 보이니 아마도 죽은 것이겠지…….
죽으면 지옥이나 천당 같은 사후 세계가 있다고들 하던데 말짱 헛소리다.
후우∼
솔직히 말하면 정말이지 무섭다.
오직 존재한다는 것만 느낄 수 있는 어둠뿐인 이 공간이 혼자만 있다는 것이 난 싫고 무섭다. 차라리 지옥이 있어 그곳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큭큭!
죽은 내가 걱정할 일이 생기다니 우스운 일이다.
죽임 이후의 세계를 모르니 이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
놈의 얼굴과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가 떠오른다.
바로 그날의 기억이다.
처음 그놈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 할아버지는 죽은 혈육이 살아 돌아온 듯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놈도 할아버지를 마치 친할아버지처럼 대했는데 어째서 우리 가족을 그토록 무참히 살해한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놈이 그런 짓을 저지른 걸까?
어째서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숙부님들을 그처럼 무참히 죽여야만 했던 것일까?
놈의 입으로 말했던 이유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태륜이란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 가족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니 말이다.
내가 이렇게 죽어야 했던 진짜 이유를 정말이지 알고 싶다.
후후후!
그렇지만 미친 짓이다.
이제는 죽은 마당이라 복수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인데 궁금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 리도 없는데 말이다.
그렇게 애써 생각을 접으려 했지만 꼬리에 꼬리를 문 잡념이 내게서 떠나지를 않는다.
시간이 지나가며 나도 모르게 생성된 끝없는 생각이 이유를 찾는다.
정말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놈이 그런 행동을 한 이유를 모르겠다.
***
급하게 차를 달려 과학수사연구소에 도착을 한 경식은 사건을 배정받은 부검의를 만날 수 있었다.
그가 담당했던 사건 때문에 상당히 오래 전부터 안면이 있던 사람이었다.
경식은 화재 현장 주변의 상황과 시신들을 통해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검시 결과를 알려 줄 것을 당부했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짐작했는지 부검을 맡은 법의관 또한 최대한 서둘러 부검 결과를 알려 주겠다는 답변을 주었다.
자신이 할 일은 다 끝났기에 경식은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곧장 경찰청으로 돌아갔다.
경찰청으로 돌아와 보니 시간이 많이 늦어 있었다.
민철과 함께 설렁탕을 배달시켜 한 끼를 때운 경식은 이를 쑤시며 텔레비전을 켰다.
“쩝! 방송에 어떻게 나왔나 한 번 볼까.”
희대의 살인 사건이 될 수도 있는 화재 사건이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뉴스를 통해 어떻게 알려졌을지도 궁금했다.
“뉴스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고만고만한 뉴스들이 이어지고 마침내 원하던 뉴스가 나왔다.
“다음은 오늘의 사건 현장입니다. 경부고속도로 주변 달래네고개 인근 농가에서 불이나 일가족이 사망하는 화재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누전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이 화재로…….”
전기 누전으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해 일가족이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참화를 당했다는 내용만 나올 뿐이었다.
타살된 것이 아니라 화재로 인한 일가족의 참사로만 간략하게 보도되는 것을 보며 경식은 마음이 무거웠다.
혹시나 다른 말이 나올까 주의 깊게 시청했지만 역시나 예상한 대로였다. 누군가 사건을 덮어 버린 것이다.
‘으음, 저렇게 죽은 사람이 많은데 짧게 나오는 것을 보면 단순한 화재 사고로 꾸미려는 건가?’
뉴스에서 나오는 뉘앙스는 단순한 사고에 지나지 않았다.
무려 열두 명이나 죽은 대형 사건이었지만 죽은 사람의 수에 대해서는 방송에서 일절 언급도 없었다.
방화 사건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 사망 인원이라면 화재의 정황을 알려고 기자들이 물고 늘어지고도 남을 상황인데 너무 간단했다.
사회에 미칠 파장을 우려해 살인 사건이라는 사실을 발표하지 않을 수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경식은 누군가 고의로 사건을 축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빨리 손을 썼다면? 어디까지 일인지 확실히 알아봐야겠구나.”
마침 아는 사람이 있기에 경식은 사건 관할 구역을 담당하고 있는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드르르르륵!
―김한석입니다.
다이얼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중후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막역한 사이인 김한석 형사반장이었다.
“형님! 저, 경식입니다.”
―네가 어쩐 일이냐?
갑작스러운 전화에 김한석이 퉁명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그곳 관할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 말입니다.”
―화재 사건이라면…….
“일가족 열두 명이 참변을 당한 그 사건 말입니다.”
―…….
‘뭔가 있다.’
경식은 자신의 질문에도 전화기에 도는 침묵을 느끼며 사건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김한석도 뭔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형님?”
―경식아!
“예, 형님!”
매우 경직되어 있는 심상치 않은 한석의 음성에 경식의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내 생각이지만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네 신상에 이로울 것 같다.
“어디까지입니까?”
압력이 들어왔다고 물러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경식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직은 나도 잘 모른다. 전화로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니 따로 한 번 보자.
따로 시간을 내라는 소리는 감시가 있다는 소리였기에 경식은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소주 한잔하시죠. 형님.”
―그래,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내일 저녁 7시에 그곳으로 와라.
“알겠습니다.”
―그만 끊으마.
“예, 형님.”
전화를 끊은 뒤 경식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형님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아 있는 것을 보면 심상치 않은 일인데…… 기분 더럽군.”
만년 경위지만 수사에 있어서는 알아 주는 베테랑인 한석이 알려 주기를 꺼려 하는 것으로 봐서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내일 시간을 내려면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군.”
지난 며칠간 집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사건이 많이 밀려 있었지만 심상치 않은 상황을 봐서는 무조건 시간을 내야 했다.
서둘러 마무리 지어야 할 보고서가 몇 건 있기에 한석과의 만남을 위해 경식은 밤을 새우기로 했다.
“야참이라도 시켜야겠군. 어디!”
민철이 자신의 책상에서 열심히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막내야!”
“예, 반장님.”
“시간 맞춰서 야참 좀 시켜라.”
“오늘 철야입니까?”
인상을 찡그리며 민철이 물어왔다.
“그래,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 전부 끝내야 할 것 같다.”
“저어, 오늘은 좀 봐주십시오.”
“인마, 지금 나가 봐야 데이트도 못할 거면서. 제수씨한테는 내일 보자고 해라.”
“그럼 내일은 야근을 안 해도 되는 겁니까?”
“후후후, 그래. 인마. 내일 저녁에는 좀 쉬자.”
“하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동안 계속되는 야근에 데이트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민철은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들고 중국집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오늘 야참은 민철이 좋아하는 탕수육이었다.
***
차를 타고 잠실에서 성남시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 한참을 달리던 경식이 주변을 살폈다.
“저기서 우회전인가?”
한석이 근무하는 경찰서가 멀지 않은 곳에서 신호를 받은 경식은 좌측으로 핸들을 틀었다.
‘언제나 불법주차가 말썽이로군.’
접촉 사고가 났는지 시비가 걸린 사람들 때문에 차선이 막혀 있었다.
죽이니 살리니 하는 모습을 보며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차선으로 갔다가 다시 제 차선으로 돌아온 경식은 좁은 2차선 도로를 따라 달렸다.
‘저기에 차를 세워야겠구나.’
워낙 도로가 좁아 주차할 공간이 마땅치 않은 터라, 주차비를 주어야 하지만 한석을 보러 올 때면 언제나 차를 대는 곳이 보였다.
스르르!
그렇게 국민학교 근처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파킹시킨 경식은 환기를 시키려는 듯 차에서 내리기 전 손가락 정도 들어갈 틈만 남기고 창문을 열었다.
주차장을 나선 경식은 약속 장소가 멀지 않기에 걸어서 언덕을 내려갔다.
두 사람이 약속한 장소는 주차장에서 채 100여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돼지 곱창구이를 전문으로 하는 집이었다.
곱창만 전문으로 하는 몇 집이 나란히 늘어선 곳 중에 하나로 맛은 물론이고 값도 저렴해서 한석과 경식이 가끔 만날 때마다 즐겨 찾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