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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오션 1권(13화)
5장. 다른 존재의 기억!(2)
세월 무게에 눌린 중압감과 함께 자신이라는 존재가 이제는 사라질 차례라는 것을 절감하던 혁의 얼굴에 일순 이채가 서렸다.
쏴아아!
투투툭!
주르르르륵!
어깨를 들썩이는 혁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창살을 통해 떨어져 내리며 차가움과 함께 가슴 속까지 시원한 느낌을 주는 것은 자신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비였다.
“서, 설마! 금제가 풀린 것인가?”
머리에 떨어진 빗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자 혁의 얼굴에 환희가 비쳤다.
잠들어 있던 감각이 깨어나 귓가를 간질이는 빗소리와 얼굴을 적시는 빗방울의 감촉이 주는 감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크크큭, 정말 나에게 다시 기회가 온 것인가?”
차가운 빗물이 생기를 돋우고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던 혁의 눈빛이 점차 생기를 찾고 있었다.
“좋군. 하하하하하!”
광소가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결계를 뚫고 드디어 이곳에도 비님이 오시는구나! 비님이 말이야. 크하하하하하하!”
번쩍!
콰르르릉!
광소가 끝나기 무섭게 창살을 뚫고 번개가 떨어져 내렸다.
번개의 날카로운 촉수가 향한 곳은 혁의 정수리였다.
푸른빛 전하가 혁의 몸을 관통해 발바닥을 통해 감옥으로 빠져나왔다.
대지로 스며들어야 할 전하가 다시 바닥을 기어올라 혁의 몸을 감쌌다.
무작위로 떨어지는 번개들이 목표물을 찾은 듯 계속해서 수백 번 혁의 몸으로 내리꽂혔다.
“크아아아아아!”
원한이 가득한 비명 같은 포효도 계속됐다.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번개가 떨어지기 시작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번개를 맞으면 대지로 스며들려는 전류의 특성에 따라 최소한 전압에 견디지 못해 손발이 터져 나가야 정상이다.
처음에도 그렇지만 인간의 몸으로 이렇게 수도 없이 번개를 맞고 견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혁은 멀쩡했다.
수십 번의 벼락을 직접 맞고도 혁은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전하들이 혁의 피부 위에서 반짝이다가 빠르게 사라져 갈 뿐이었다.
죽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혁은 살아 있었다.
“크으으윽!”
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번개가 관통하고 전하의 폭풍이 몸을 휘감았다.
살았다고는 하지만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대자연의 힘에 고스란히 노출됐으니 고통이 없을 리 만무했다.
“크으, 시원하구나.”
신음이 가신 뒤 혁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번개가 들이친 구멍을 올려다보는 혁의 목소리에는 오히려 알 수 없는 희열과 힘이 담겨 있었다.
“하늘의 심판자여! 내가 당할 것 같으냐? 나를 부셔 봐라. 어서 나를 박살 내 보라는 말이다. 크하하하하하!”
처절하게 울부짖는 외침과 함께 감옥을 쩌렁하게 울리는 혁의 광소가 다시 터졌다.
번쩍!
콰쾅!
번쩍!
콰르르르르릉!
“크하하하하하하하하!”
혁의 조롱에 분풀이하듯 섬광을 동반한 번개가 연이어 감옥 안으로 떨어졌다.
번개들은 하나도 예외를 두지 않고 광소를 터트리는 혁의 몸을 유린했다.
‘드디어 만선전뢰(萬폗電雷)가 놈들의 결계를 뚫고 제대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최후의 안배가 발동하고 있었다.
전신에 가득 들어차는 뇌전의 기운!
쏟아져 들어온 전하의 폭풍이 온몸으로 휘저으며 자신의 신체를 바꾸고 있는 중이다.
변화하는 신체와 전신에 팽배해지는 뇌전의 기운을 느끼며 결계를 빠져나갈 시간이 머지않았음을 혁은 느끼고 있었다.
소멸을 전제로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힘까지 모두 쏟아부어 펼친 금단의 술법이 성공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중인 것이다.
‘혈뇌를 부르기 위해서는 제대로 흡수해야 한다.’
생각과 동시에 혁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서 있던 그의 몸이 어느새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번쩍!
콰르르르르르!
번개와 전하의 폭풍이 연이어 혁의 몸을 때려 댔다.
연이어 번개를 맞을 때마다 혁의 눈가에 어리는 싸늘함은 더욱 깊어만 갔다.
한참 동안 가부좌를 틀고 번개를 맞고 있던 혁의 입에서 광소 대신 포효가 튀어나왔다.
“크아아아아!”
희열과 고통이 어우러진 괴이한 소리였다.
“크하하하하하!”
번쩍!
콰르르르르르르!
내리치는 번개 사이로 통쾌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 고심의 결과로 뜻하던 바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웃음에는 기쁨이 일던 처음과는 달리 가슴을 헤집는 슬픔이 동시에 배어 있었다.
끼기기긱!
혁의 광소가 깊어지자 뭔가가 미끄러지며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이 감옥 안을 울렸다.
녹슨 철문이 열리는 것 같은 거북한 소리가 번개가 치는 와중에도 선명히 들렸다.
‘시작인가?’
혁의 눈빛이 광채를 발했다.
끼기긱!
다시금 거북한 소리가 감옥 안을 울렸다.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소음의 발원지는 놀랍게도 바로 혁의 몸과 감옥이었다.
끼기기기기기긱!
혁의 몸과 사방 벽에서 시작된 기괴한 소음이 감옥 안을 울리며 점차 증폭되어 갔다.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 가는 소음은 커다란 변화를 예고하는 경종 같았다.
티티티팅!
소음이 절정에 달하고 난 뒤, 팽팽한 줄이 끊어지며 마지막 비명을 토해 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크크크,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족쇄도 떨어져 나간 건가?’
지금까지 눈에 보이지는 않게 자신을 결박하고 금제한 보이지 않는 무형의 사슬들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라는 것을 알기에 혁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후후후, 얼마 만이던가?”
가부좌를 튼 자세로 허공에 떠 있던 혁의 입에서 홀가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으음!”
다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는 눈가에 희미한 미소와 함께 떨림이 있었다.
“어디, 오랜만에 자유를 한 번 만끽해 볼까? 우선…….”
금제가 풀렸다는 것을 확인한 혁은 손을 뻗었다.
촤르르르르…….
무형의 사슬들이 딸려 올라와 그의 손목에 감겼다.
휘이익!
바닥에 널려 있는 무형의 사슬을 모두 회수한 혁은 아무런 반동도 없이 앉은 자세 그대로 사람 키의 두세 배는 되어 보이는 천장으로 치솟아 올랐다.
턱!
감옥과 밖을 연결하는 구멍에 걸쳐져 있는 창살을 붙잡았다.
쇠로 된 창살에서 전해 오는 차가운 감촉이 족쇄에서 풀려났음을 알려 주었다.
쏴아아!
투투투툭!
얼음보다 차가운 빛줄기가 창살을 뚫고 얼굴에 떨어졌다.
“크크크! 시원하구나.”
아직까지 금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얼굴로 전해져 오는 차가운 비의 감촉이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비가 주는 감미로움을 즐기는 것도 잠시, 혁의 눈이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로 향했다.
검은 먹구름 사이로 붉은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거대한 혈룡이 구름 사이에서 용틀임을 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만선전뢰의 기운이 모이고 있구나.”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하고 설치한 술법이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었다.
마지막 금제를 풀기 위한 거력이 조금 있으면 몰아칠 것이기에 혁은 눈빛을 빛냈다.
“그래, 어서 오너라! 혈뢰여! 이리 와서 나를 부셔 보란 말이다. 크하하하하하!”
혁은 자신의 팔을 끌어당겨 창살에 얼굴을 대며 고함을 질렀다.
커다란 울림이 대기에 가득 찼고,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먹구름이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번쩍!
콰르르릉!
차가운 빗방울의 느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창살에 매달린 혁의 얼굴로 다시금 번개가 떨어졌다.
“크아아아악!”
치달리는 전류들이 몸을 감싸고 난 뒤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그것은 결코 비명이 아니라 뭔가 울분에 찬 고함 소리였다.
파츠츠츠츠!
빛줄기 같은 전류들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혁의 몸으로 곧바로 스며들었다.
번쩍!
“크아아아악!”
번쩍!
“크아아악!”
콰쾅!
콰르릉!
감옥이 있는 상공의 구름이 휘돌기 시작했다. 검은 구름이 어느새 붉은색으로 번득거렸다.
혁의 눈에도 붉은 혈광이 맺혔다.
우르르르릉!
힘을 모으는 듯 구름 속에서 연신 천둥이 쳤다.
‘드, 드디어 온다.’
번개를 계속해서 맞으며 지금까지 음전하를 축적해 왔다. 혈뢰전을 부르기 위한 혁의 의도대로 몸 안에 가득 찬 음전하가 하늘의 심판자를 부르고 있었다.
번쩍!
지금까지 와는 그 크기부터 현저히 다른 엄청난 번개가 혁을 강타했다.
이번에 떨어진 번개는 뇌성을 동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붉고 푸른 기운에 이어 검은빛까지 섞인 특이한 번개였다.
스르르르…….
기이하게 생긴 번개가 몸을 관통한 후 혁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무던히도 견뎌 왔던 그의 몸이 조금씩 부서져 나가며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리부터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허벅지를 지나 복부와 가슴까지 조금씩 먼지가 되어 갔다.
‘크크크,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직까지 살아 있는 혁은 자신의 신체가 사라져 감에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놓치면 마치 큰일이라도 일어날 듯 창살을 움켜쥔 손을 풀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는 그의 눈에서 혈광만이 줄기줄기 뻗어 나올 뿐이었다.
허리를 지나 가슴이 사라지고, 마침내 혁의 머리가 부서지듯 사라지자 남은 것은 창살을 잡고 있는 혁의 손뿐이었다.
스르르르…….
꼼지락거리며 끝까지 창살을 붙잡고 있던 혁의 손도 점차 사라더니 이내 자취를 감췄다.
우우우우우웅―
주인을 잃은 슬픔 때문인지 홀로 남은 감옥이 진동하며 구슬프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우르르릉!
울음만이 아니었다.
감옥이 지진을 만난 것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연신 흔들리는 감옥의 진동이 한동안 지속됐다.
감옥 안에서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투투투툭!
급격하게 흔들리는 진동의 영향 때문인지 벽과 천장에서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며 내는 소리였다.
두껍게 덮고 있는 세월의 흔적들이 바닥으로 떨어질수록 기괴한 문양들이 더욱 선명하게 원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스스스…….
스스스스…….
사방에 새겨져 있는 기이한 문양에서 기괴한 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빛이 새어 나왔다.
선홍색의 빛들은 절대로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빛의 성질인 파동성으로 볼 때 직진해야지 저렇듯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일 수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