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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오션 1권(16화)
6장. 다른 존재가 남긴 것(2)


화산의 폭발을 막기 위해 쳐 둔 결계가 아직까지도 작동하고 있어 안심이었다.
―잘못 열게 되면 정말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봉인된 결계를 열고 시간의 축 안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혁은 서둘지 않았다.
자칫 실수해 결계가 흔들리면 백두산을 기점으로 사방 5천여 리가 지신(地神)의 분노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까닭이다.
시간축마저도 깨질 수 있는 까닭에 혁은 조심스럽게 결계의 경계 부근으로 다가갔다.
스으윽!
자신의 의념을 남겨 만들어 둔 결계이기에 혁은 정신체로 화한 자신을 막에 접촉시켰다.
―내 의지에 반응하라!
혁은 교신을 시도했다.
스르르!
다행히 교신이 성공적이었는지 접촉한 부분이 조금 열렸다.
―다행이다.
자신의 의지에 답하는 것을 느끼며 혁의 정신체가 빠르게 안으로 스며들었다.
오랫동안 분출을 막아 놓았기에 화맥이 들끓고 있었다.
―으음, 화맥의 힘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구나. 봉인해 놓아서 앞으로 백여 년은 견디겠지만, 그 이상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만든 봉인이 아무리 뛰어난 것일지라도 상대는 대자연이다.
대자연이 토해 내는 미증유의 분노를 감당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에 얼마 견디지 못할 것 같아 보였다.
―일단 힘을 되찾고 난 후에 화맥에 담겨 있는 열화지기를 흡수하자. 그러면 어느 정도는 안심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의 축을 찾는 것이 먼저다.
분출하거나, 열화지기를 흡수해 힘을 빼놓아야지만 잠잠해질 화맥이었다.
힘을 잃은 지금으로서는 마땅한 방법이 없기에 혁은 우순 시간의 축부터 찾기로 했다.
퍽!
혁은 꿈틀대며 움직이는 검붉은 화맥 안으로 뛰어들었다.
암석이 고온에 의해 녹아 버린 용암 속으로 파고든 후에는 계속해서 아래로 침잠해 들어갔다.
위이잉!
화산이 터지면 분출되어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용암 아래쪽에는 검은 구체가 회전하며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비틀린 시간의 축에서 빠져나온 에너지 덩어리였다.
천천히 회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상당히 안정적으로 보였다.
―안정적인 모양이니 이대로 들어가자. 그러면 모든 것이 시작될 것이다.
혁의 정신체가 검은 구체 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후후후, 그랬던 건가?’
정신체가 검은 구체로 들어가는 기억을 보면서 장혁은 자신과 혁이 하나가 됐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인지 자신이 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하나가 되자 장혁은 어째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자신은 혁이 뿌린 영혼의 파편이자 안배였던 것이다.
‘크으윽!’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심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갑작스러운 고통이 찾아왔다.
의식 전체를 관통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안배가 시작된 것이로군.’
죽은 자신이 고통을 느낄 리 만무했다.
안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는 상황이라 장혁은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고통은 한 번뿐이었다.
두려움과 함께 기다렸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미치겠구나.’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현실 세계는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계속해서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아니, 그가 남긴 시간이 지나가야만 한다.’
안배가 시작되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혁이 만들어 낸 시간의 안배 속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기억도 찾아야 한다. 시간의 축으로 들어간 이후의 기억과 그가 가진 이전의 기억들 모두.’
시간이 흐르는 공간에서 버틸 수 있으려면 의식의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장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 다른 자신인 혁이 남긴 다른 기억을 보기로 한 것이다.
생각이 일자 변화가 나타났다.
혁이 만든 시간의 흐름을 깨지는 못했지만 기억을 찾을 수 있었다.
‘들어가 보자.’
생각과 동시에 잠재의식 아래에 존재하는 다른 기억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기억 속으로 들어서자 혁의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태어나고 자라는 모습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수많은 병사들 중에 하나가 되어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수많은 전쟁과 전투들을 치르고 난 뒤 인간인지 의심스러운 자들과의 처절한 쟁투들도 보였다.
마침내 포로가 되어 갇히기까지 전사로 보이는 혁의 일생이 그렇게 다가와 하나가 되었다.
장혁은 본능적으로 다른 기억을 찾아 나섰다.
또 다른 혁의 일생이 그림처럼 지나갔다. 배경과 능력만 바뀌었을 뿐 두 번째 혁의 삶도 비슷했다.
지금으로서는 생각하지도 못하는 첨단 기기와 기술로 무장하고 괴물들과 처절하게 싸우는 전사의 일생이었던 것이다.
혁의 일생은 무척이나 특이했다.
첫 번째 일생이 고대를 살아간 전사의 삶이라면, 두 번째 보였던 것은 수백 년 후 미래에나 있을 법한 전사의 삶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투로만 점철된 인생이었다.
기억을 읽은 후 그들의 삶이 자신의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혁이 어째서 이런 기억을 남긴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비밀이 있다는 건가?’
혁이 남긴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된 것이 아니었다.
남겨진 기억 말고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다른 것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접근할 수 없었다. 장막 같은 것이 둘러쳐져 있어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진짜 비밀은 그곳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시대를 달리하는 전사의 삶들을 이토록 선명하게 남기면서 그것들은 볼 수 없게 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런 안배를 남긴 데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혁이 남긴 것들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열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남긴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구나. 안배가 끝나갈 때가 머지않았군.’
스스로 침잠해 있는 정신이 잠재의식 속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혁이 남긴 시간의 흐름이 끝날 때가 됐다는 징조였다.
‘크으으으.’
감각이 돌아와 있었다.
전신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련한 통증들!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이 살아 있다는 삶의 환희를 대변해 주었다.
‘크으, 더럽게 춥군.’
고통의 잔혹한 유희를 느끼는 것도 잠시, 극한지옥(極寒地獄)에라도 떨어진 것일까?
온몸이 시리도록 차가움을 느껴야 했다.
어둠의 공간에서 모든 것을 잃은 후 처음으로 찾아온 감각이 이런 것이라니 아무래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의식을 하자마자 장혁의 눈이 떠졌다.
‘으음! 어둡군. 아직은 아닌 건가?’
의식이 눈을 떴지만 역시 어둠뿐이었다.
‘다르다!’
처음 보았던 어둠과는 전혀 다른 어둠이었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찾아드는 영상들!
모든 것이 사라진 완전한 어둠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건가?’
새로운 감각이 느껴졌다.
온전한 육체에서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의식뿐이던 자신에게 새로운 육체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후후, 그 말이 사실이었군.’
영혼만 있으면 육체를 되살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더니 사실인 것 같았다.
장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어둠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고 여명처럼 빛이 보였다.
‘그곳이로군.’
장혁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마련해 놓은 피난처다.
죽을 때는 분명 집이었는데 이곳에서 깨어난 것을 보면 혁이 자신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 분명했다.
믿으라고 해서 믿기는 했지만 일말의 의심이 남아 있었는데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으으으, 조금 춥구나.’
싸늘하게 느껴지는 추위가 다시 한 번 살아 있음을 알려 주었지만 반갑지 않았다.
‘후후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라서 그런가 보다. 그런데…….’
자신의 알몸을 본 장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홍의 나비가 섬광과 함께 가슴을 갈라 버렸는데 흉터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춥기는 하지만 일단 나가 봐야겠다.’
밖으로 나오니 햇빛에 반짝이는 설경을 볼 수 있었다.
‘따뜻하다.’
하늘 끝에서 뜨거운 기운이 넘실거리며 다가왔다.
산과 들이 온통 하얀 눈으로 가득함에도 태양으로부터 이토록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좋았다. 태양의 따뜻함이 자신을 채워주는 같아서였다.
“혀, 혁아!”
멀리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였다.
“혁아!”
‘형이구나.’
반가운 목소리였다. 서울에 살고 있는 사촌 형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시선을 돌리자 자신을 부르며 다급하게 눈밭을 뛰어오는 장호 형의 모습이 보였다.
“하하하!”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죽은 자가 다시 부활하다니, 예수의 재림이 아닐 수 없었다.

***

“혀, 혁아!”
다급하면서도 반가운 윤장호의 음성이 눈 덮인 산속에 메아리쳤다.
지난 4개월 동안 해가 뜨기 전부터 차를 몰고 달려와 청계산 일대를 맴돌던 윤장호였다.
마침내 기다리던 사람을 보게 되자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
“다, 다행이다.”
간밤에 내린 폭설로 인해 오늘은 오지 않으려 했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미끄러운 길을 달려 가문의 피난처로 왔다.
오지 않았다면 장혁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찔했다.
윤장호는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발가벗은 사촌 동생에게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동생의 모습이 선명했다.
“혀, 혁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눈밭을 걸으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하늘을 보면서 실실 웃어 대고 있었다.
가문의 비극으로 인해 충격을 받아 정신을 놓아 버린 것이 아닌지 몰라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는 장호였다.
“혁아!”
장호는 장혁을 붙잡고 어깨를 흔들며 이름을 불렀다.
“아, 장호 형! 혀, 형이 왔구나.”
털썩!
“혁아!!”
자신을 알아보고는 이름을 부르더니 무너지듯 그대로 쓰러지는 동생의 모습에 장호는 가슴이 철렁했다.
“혁아! 정신 차려라. 정신!! 안 되겠다. 이러다가 얼어 죽겠다.”
“으으으, 형!”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장혁이 정신을 차렸다.
“그래, 괜찮은 거냐?”
“어, 어서…… 이곳을 떠나야 해.”
“아, 알았다.”
흐느적거리면서도 어서 떠나기를 재촉하는 말에 장호는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다.
“일단 옷부터 입자.”
자리를 떠난다고 해도 영하의 날씨에 주위가 온통 눈이었다.
알몸으로 눈 위에 쓰러진 터라 잘못하면 동상에 걸릴 수도 있기에 급히 자신의 겉옷을 벗어 장혁을 감쌌다.
‘혁이가 이렇게 컸었나?’
무릎까지 내려오는 두툼한 오리털 점퍼였지만 작아 보였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상당히 큰 체구를 가진 장혁의 전신을 다 감싸지 못했던 것이다.
집안에 흉사가 닥치기 몇 달 전에 본 것이 마지막이었는데 많이 자라 있었다.
“혀, 형. 어서.”
“그래, 내려가자.”
장혁의 재촉에 상념을 털어 버린 장호는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후 사촌 동생을 어깨에 들쳐 업었다.
장호는 주변을 연신 살피며 빠르게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으면 위험하다.’
업혀 있는 장혁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치고 있었다.
가문의 피난처를 나온 후 주변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