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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오션 1권(18화)
7장. 남겨진 것(2)
“설마 했는데, 그 아이가 살아 있었다니 정말 다행이다. 흐흐흑! 아버님!”
경숙은 죽은 시아버지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아버님,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군요.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지만 아버님과 시아주버님들을 그렇게 만든 놈들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경숙은 흘러나오는 눈물을 훔치며 각오를 다졌다.
시아버지가 자신에게 당부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아주 오래전 경숙은 남헌승의 셋째 아들인 남현석과 사귀다 헤어졌다. 집안의 반대 때문이었다.
특히나 시아버지인 헌승의 반대가 남달랐다.
헤어지고 난 후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경숙은 남씨 가문에 알리지 않고 혼자 아이를 낳았다.
그런 와중에 현석은 경숙을 떠나보낸 괴로움에 월남전에 참전해 버렸다.
얼마 안 있어 현석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은 경숙은 헌승을 찾았다.
자신이 낳은 장호를 남씨 집안의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처음 만난 시아버지인 헌승은 장호를 손자로 인정하기는 하지만 호적에는 올려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아들을 손자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 같아 경숙은 무척이나 섭섭하고 서운했지만 경숙은 마음을 되돌려야 했다.
가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며 헌승이 그녀에게 건넨 당부 때문이었다.
장호의 아버지인 현석으로부터 시아버지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다고 한 말을 들었었다.
사실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시아버지이기에 마지못해 따라야 했던 것이다.
남씨 가문의 사람들에게는 자신과 장호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지만 헌승은 자신들을 무척이나 아껴주었다.
언제나 마음 좋은 시아버지와 할아버지로서 자신과 장호를 며느리와 손자로 대했다.
특히나 아들에게는 가문의 비기들을 전수해 주기까지 했으니 경숙의 불만은 차츰 사라지고 시아버지의 말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남가의 식솔들이 모두 죽은 사건이 일어난 후 경숙은 시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 보내진 편지를 볼 수 있었다.
가문의 사연을 읽으면서 경숙은 시아버지가 자신과 아들인 장호를 위해 본가로 받아들이지 않고 존재를 숨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님께서 장호에게 미리 부탁을 하셨던 모양이구나.”
헌승의 주선으로 아들인 장호가 장혁과 지속적인 만남을 계속해 왔다는 것을 얼마 전까지 모르고 있었다.
시아버지가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가문에 대한 일은 전적으로 장호에게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흐흑, 야속하신 분.”
자신에게 아무런 당부를 남기지 않은 것이 조금은 야속했다.
살아남은 본가의 식구를 챙기는 것은 유진을 이어받은 장호만이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난 남가의 며느리다.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지. 장호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나도 미래를 위해 준비를 해두어야겠다.”
경숙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문의 복수는 남의 일이 아니었기에 이제부터라도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진물산을 이어받아 그녀는 자신이 가진 힘을 시댁을 위해 쓰기로 결심을 했다.
재계에서 서열 30위에 간신히 턱걸이하고 있는 대진물산이지만 가능성이 큰 회사다.
지금부터라도 전력을 기울여 키워 나간다면 아들과 조카에게 큰힘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버님, 보고 싶습니다.’
무척이나 시아버지가 보고 싶은 하루였다.
***
5년 전, 헌승은 다른 가족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오직 장혁에게만 장호의 존재를 밝혔다.
남씨 가문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경숙에게도 알리지 않고 헌승이 직접 장혁만 데리고 장호를 만났었던 것이다.
헌승은 장혁과 장호에게 가문의 앞날을 맡겼다.
그리고 언제나 우애로서 서로를 아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만남을 자신이 말할 때까지는 가족들에게 비밀로 하라고 했다.
알리지 말라는 말에 의아하기는 했지만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 두 사람은 비밀을 지켰다.
가족에게는 비밀로 하며 두 사람은 주기적으로 만나며 형제의 정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참화가 발생하기 몇 달 전 헌승이 은밀히 장호를 찾았다.
장호는 헌승으로부터 가문의 비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째서 그동안 둘의 만남을 비밀로 했는지에 대해서도 들었다.
헌승은 그때 가문이 가진 힘을 장호에게 전하여 당부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게 되면 시간이 좀 지난 뒤 가문의 피난처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후 장호는 헌승의 당부대로 가문의 피난처를 살폈다. 그것만 한 것이 아니었다.
경찰에서는 단순한 화재 사고로 사건을 처리했지만 할아버지의 당부에서 누군가 가족들을 죽이고 불을 질렀다고 생각했기에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하면서 사건이 얼마나 철저하게 은폐되고 있는지 절감한 장호는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과 어머니에게도 죽음이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공포를 애써 참으며 살아남은 가족들을 기다렸고, 드디어 장혁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과 함께 남가의 유일한 핏줄을 찾은 것이다.
“크으, 이럴 때가 아니지. 몸은 괜찮은지 한 번 보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장호는 책상 서랍을 열어 청진기를 꺼낸 후 깊은 잠에 빠져든 장혁의 몸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청진기로 맥동음을 들으며 장혁의 안위를 살피며 어느 정도 안도할 수 있었다.
별다른 이상 증세는 보이지 않았고, 호흡도 안정적이고 심장박동을 비롯한 바이탈 사인도 안정적이라 의식을 잃고 있는 것만 빼면 몸 상태는 괜찮았던 것이다.
“다행히 별 다른 이상은 없구나. 깨어나면 배가 고플지 모르니까 우선 죽부터 끓이자.”
그다지 여위어 보이지 않지만 혹시나 가문의 피신처에서 피해 있는 동안 굶었을 것이 분명했다.
청진기를 제자리에 놓은 장호는 죽을 끓이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이십대에 독립해 학업을 마치고 공중보건의 생활을 끝낼 때까지 혼자 살아온 탓에 제법 집안일에 익숙한 장호였다.
믹서로 쌀을 갈고 냉장고에 있는 양지머리를 꺼내 장혁에게 먹일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입맛을 돋우는 냄새가 집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됐는데…… 후후후, 언제 깨어날지를 모르니 내가 너무 서둘렀나 보구나.”
끓고 있는 죽을 한 수저 떠 맛보던 장호는 기력이 떨어져 정신을 잃은 상태라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실소를 흘렸다.
“데우면 되니까 상관은 없겠지.”
식어도 따뜻하게 데워 먹이면 된다는 생각에 장호는 죽을 떠 그릇에 담고는 뚜껑을 덮은 후 방으로 들어갔다.
장혁은 곤히 자고 있었다.
아프지는 않은 듯 편안한 안색이기에 그나마 안도한 장호는 옆에서 장혁을 지켰다.
간호를 하며 깨어나기를 기다렸지만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전문의 자격증은 가지고 있지만 전공이 신경정신과라 자신이 살피지 못한 것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병원으로는 갈 수 없다.
자칫 병원에서 받은 진료 기록 때문에 장혁이 살아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큰일이었다.
그동안의 고심이 물거품이 되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생명이 위험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다시 사흘이 지났다.
무려 5일 동안 동생이 깨어나지 않아 장호는 심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문의 적들이 주는 위협보다 지금 당장 장혁이 죽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기에 장호는 결심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그냥 정신만 못 차리는 것이니 병원만 가면 괜찮아질 거다.”
장호는 동생을 위해 사 놓았던 옷들을 꺼내 입히기 시작했다.
아주 작았는데 전보다 체구도 건장해졌고 탈진해 오랫동안 누워 있는 사람답지 않게 생기가 넘치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건강한 사람처럼 보이는 모습에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옷을 입히는 장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혀, 형.”
상체를 들어 옷을 입히려고 하는 순간,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을 보니 힘겹게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혁아! 살았구나.”
“형, 나 배고파.”
닷새 동안이나 정신을 잃었던 동생의 첫마디에 장호는 정신이 없어졌다.
“아, 알았다. 누워 있어라. 형이 금방 죽 가지고 올 테니까.”
“응, 기다릴게.”
“그래, 조금만 기다려.”
장혁을 자리에 다시 눕힌 장호는 급하게 부엌으로 달려갔다.
“새로 만들어야겠다.”
그동안 매일 끓여 놓았던 죽과 미음은 이미 자신이 다 먹은 뒤였기에 다시 만들어야 했다.
혹시나 몰라 양지머리를 삶아 국물을 내고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얼음처럼 언 국물을 꺼내 냄비에 담아 불을 켰다.
국물이 어느 정도 녹자 곱게 간 쌀가루를 물에 풀어서 조금씩 넣었다.
위에 부담을 줄까 봐 워낙 곱게 갈기도 했지만 물에 푼 쌀가루가 작은 양이었기에 죽은 금방 끓었다.
집에서 담근 간장으로 약간의 간을 한 장호는 죽을 퍼서 방으로 들어갔다.
“혁아, 형이 일으켜 줄 테니까 벽에 기대자.”
“응, 형.”
죽 그릇을 바닥에 놓고 누워 있는 장혁을 일으켜 세워 벽에 등을 지게 했다.
“호오∼ 자 먹어라.”
장호는 입으로 바람을 불어 죽을 식히며 수저로 조금씩 떠서 먹였다.
“고마워, 형.”
“자식. 어서 먹고 기운부터 차리자.”
“그래.”
웃어 주며 수저를 내미는 형을 보며 장혁은 말없이 죽을 받아 먹었다.
제법 긴 시간이 걸렸지만 장혁은 형이 끓여준 죽을 다 먹을 수 있었다.
“형, 죽 좀, 더 줄 수 있어?”
“괜찮겠니?”
죽 그릇이 비자 더 달라는 말에 장호가 물었다.
오랫동안 속이 비워져 있던 터라 많이 먹는다면 탈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잘 알잖아.”
“알았다.”
동생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아는 장호는 다시 부엌으로 나가 죽을 퍼 왔다.
그릇이 비기 시작했고, 완전히 비우자 장혁은 다시 죽을 요구했다.
그렇게 한 냄비나 끓인 죽이 장혁에 의해 모두 비워졌다.
‘좀 천천히 먹지.’
탈이 날 수도 있기에 걱정되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죽을 비우며 점점 생기가 돌고 있어서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형, 나 잠 좀 자야 할 것 같아. 오래 자더라도 그냥 내버려 둬.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그, 그래. 알았다.”
동생의 긴 잠이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장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혁은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며칠 동안 노심초사했던 장호도 긴장이 풀린 탓인지 졸음이 오기 시작했고, 이내 장혁의 옆에 누워 새우잠을 청했다.
“흐흡! 푸우우우!”
그동안의 피로가 우레 같은 코골이로 변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장호가 깊게 잠이 들자 장혁이 조용히 눈을 떴다.
‘장호 형이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았나 보구나.’
수척해 매우 까칠해 보이는 얼굴을 보며 그동안 형의 마음고생이 어떠했을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없다는 상처로 인해서인지 사촌 형인 장호가 얼마나 마음이 여린 사람인지 잘 알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닷새 내내 날 지켰으니 피곤하기도 하겠다.’
눈 속에서 만난 후 닷새 동안 자신만 돌봤던 것을 아는지라 장혁은 고마움을 느끼며 가볍게 코를 골고 있는 장호의 몸에 살며시 이불을 덮어 주었다.
‘미안해, 형! 괜찮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사실 장혁은 지난 닷새 동안 장호가 걱정하는 것처럼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더욱 또렷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