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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 1권 (10화)
5.입·출력 캡슐 (3)
“알았어.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뭐야?”
아라의 미소는 승자의 그것처럼 보인다. 왠지 울컥했지만 갈 때까지 가 보자라는 마음이었기에 아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도그 파이트. 전투기의 공중전을 이르는 멋진 말로 표현될 수도 있지만 뜻 그대로 개싸움이라고도 해석된다. 지금 내가 하는 행위 자체가 개싸움이다. 누워 있는 더미의 얼굴 부분을 규칙성 없는 주먹의 휘두름으로 치고 있다. 지쳤다. 사실 때리는 것이 맞는 것보다 힘들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저기 눈앞에 날씬하게 쭉 뻗은 다리로 꼿꼿이 서선 남자 간의 결투를 지켜보는 오만한 아라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벌써 포기했을 것이다.
왠지 승자가 모든 것을 갖게 될 거라는 착각 속에서 벌써 몇 번째 더미와 싸우고 있다.
더미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3번째 결투부터였다. 2번은 그냥 맞고 있었지만 3번째부턴 양상이 달라졌다. 나와 비슷한 움직임으로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레스링 기술이나 킥복싱의 기술까지. 되지도 않는 기술들을 사용하며 이겨 왔지만 한판한판이 지나갈수록 더미도 똑같은 기술을 사용했다.
“하악, 하악, 이제 정말 포기다. 그만할래.”
밑에 깔린 더미가 사라지자 도장 바닥에 누우며 웅얼거렸다. 도장 바닥의 서늘함이 내가 하고 있는 멍청한 짓을 일깨워 준다.
“없앨까요?”
“허억, 허∼∼∼어, 응!”
방금 전까지 죽을 듯했는데 지금은 방금 일어난 것처럼 말짱해졌다. 아라가 뇌를 조절한 것이다.
“오늘은 한 가지만 더하고 그만하죠.”
“으악! 또?”
“이번에는 특별히 싸울 필욘 없어요. 그냥 몇 개의 동작만 반복해 주면 되요.”
…….
예쁘지만 않으면 그냥 꽉! 하지만 도저히 이길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 진하의 뇌로 ‘태권도’의 동작들을 입력할 거예요. 처음 하는 일이니 이상하면 손을 들거나 마음속으로 멈추라 외쳐요. 준비되었으면 갈게요.”
태극 1장, 2장, 3장…… 고려, 금강, 태백……. 앞차기, 뒤차기, 옆차기……. 머릿속에 각인이 된다는 느낌일까? 천천히 흘러들어 오던 정보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물밀듯이 들어온다.
“아! 나 태권도를 할 줄 알아!”
마치 ‘매트리스’의 한 장면처럼 나도 외쳤다.
“그래요? 그렇다면 한 번 동작을 해 보세요. 태극 8장을 해 보죠.”
난 희열에 가까운 느낌으로 태극 8장을 시작했다. 단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는 태극 8장을 내가 느끼기엔 완벽하게 시연했다.
마지막 마무리 동작을 끝으로 날숨을 내뱉고 아라에게 물었다.
“어때?”
“실패예요. 역시 안 되는군요.”
“내가 느끼기에는 완벽했는데 뭐가 실패라는 거지?”
“이 두 화면을 보시면 이해하실 거예요.”
왼쪽 화면에서는 가상의 도장에서 완벽하게 8장을 시연하는 나의 모습이, 오른쪽 화면에는 현실에서 로봇 모양의 탑승용 캡슐이 춤을 추듯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이 차이에요. 진하에게 입력한 태권도의 데이터는 헤드셋을 이용하여 가상현실에서 테스터들이 하는 동작들이에요. 즉, 근육의 움직임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가 아니라는 거죠. 가상현실에서는 사용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사용을 못한다는 거예요.”
“상관없지 않아? 내가 뭐 태권도를 알고 있으면 나쁠 건 없지만 못한다고 해도 생활엔 불편함이 없는 걸.”
“아뇨, 이 데이터가 모이면 완성되는 휴머노이드에게 적용시킬 거예요. 그래서 더욱 많은 데이터를 모을 생각이구요.”
“휴, 다행이다.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뜻이네? 무술가들을 모아서 정보를 모으면 되잖아? 그 정도야 내가 해 줄 수 있지. 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아라의 모습은 고혹적…….
아니지! 이게 아니지. 저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앞으로도 나를 테스터로 부려 먹겠다는 뜻인데.
“그래도 진하가 필요해요. 무술가들에게 모은 정보를 테스트할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그냥 아르바이트생을…….”
“안 될 말이죠. 입·출력 캡슐의 비밀이 새어 나갈 테니.”
“그래도…….”
“진하에게도 좋은 일이라고요. 멋진 마초맨의 향기가 물씬 풍기게 될 테니.”
“난 아무래도 지적인 게…….”
“아! 지적이고 동시에 초콜릿 복근을 가진 남자의 품에 안겨 봤으면.”
난 테스터가 되기로 결정했다. 당연, 아라의 마지막 말에 영향을 받은 것은 절!대! 아니다. 단지, 이 연약한 몸을 좀 튼튼하게 만들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캡슐에서 나가자마자 후회해야 했다. 온몸이 근육통 때문에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당연하죠. 아까 진하가 싸우며 행했던 모든 동작들이 현실에도 그대로 반응되는 장치가 바로 이 입·출력 캡슐이니까요.”
아, 당했다. 이런 설명조차 하지 않다니…… 아라를 혼내야 하는데 힘이 없다. 겨우 기어 소파에 올라간 후 난 잠이 들었다.
***
아라의 말이 맞았다. 입·출력 캡슐이 혁명이라는 것 말이다. 중국어 한마디도 못하던 내가 하룻밤 만에 중국어를 알게 되었다.
안다는 것과 듣고, 말한다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중국어가 들리면 그 중국어를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고 말하려 하면 적당한 단어들을 생각하고 흉내 내는 정도에 불과했다. 마치 중국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떠듬떠듬.
하지만 두 시간 정도 연습해 본 결과 시간이 갈수록 확연히 좋아지는 게 느껴질 정도니 연습만 하면 중국어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압!”
멋진 마무리.
“후∼ 어때?”
“완벽해요.”
태권도의 경우, 동네 태권도 관장님을 모시고 와 해결했다. 지금은 아라의 말처럼 모든 동작을 현실에서도 완벽하게(관장님은 자신의 자세를 완벽하다고 했다.) 해낼 수 있게 되었다.
불과 이 주일만이다.
아침에 일어나 태극 1장을 할 때만 하더라도 근육통에 소리를 질렀는데 고려, 금강, 태백, 평원, 십진, 지태, 천권, 한수, 일여를 끝으로 몸이 가뿐하게 느껴진다.
따뜻한 물이 조금 전까지 괴롭힘을 당한 육체를 진정시켜 준다. 요즘 내가 겪은 일을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운동에 미친 것 같다. 입·출력 캡슐에서 잠을 청하면 아라는 밤새도록 무의식중에 내가 태권도를 하게 한다.
그리고 일어나서 간단한 준비 운동과 태권도의 17개의 품새를 마치고 아침 식사, 간단히 업무를 보고 입·출력 캡슐에 들어가 더미와 개싸움을 즐긴다.
보통 이러면 몸과 정신 상태도 별로 좋지 않을 텐데 어찌 된 게 날이 갈수록 멀쩡해지는 것 같다. 오히려 기분이 상쾌하달까?
욕조에 오래 앉아 있으니 졸음이 왔다. 조금만 더 있을까? 아니다. 오픈할 시간이 한 달이 채 안 남았기에 할 일이 많다. 직원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데…… 결국 귀찮음을 떨쳐 버리고 일어났다.
6.준비 완료 (1)
서비스할 게임이 8개로 늘어났다. 짧은 기간 내에 게임을 찍어 내는 아라의 능력에 궁금함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
“게임메이커(Game Maker)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게임을 생성시켜 주는 프로그램인데 작동 원리는 저와 비슷하죠. 필요한 변수들을 집어넣고 제약도 걸죠. 그러면 게임메이커가 알아서 그 게임 세상을 만들어 가요. 진하가 테스트했던 ‘The begin of chaos’를 예로 들자면, 제가 신이 된 것처럼 인간, 짐승, 몬스터, 나무, 꽃, 벌레 등 수많은 생명체를 만들어요. 그런 다음 몬스터에겐 힘을 주는 대신 지능을 낮게, 인간에겐 힘이 약한 대신 지능을 높게, 짐승에겐 날카로운 이빨과 민첩함을. 이런 식으로 각 생명체에게 능력을 부여한 후 시간을 빠르게 돌리는 거죠.”
내 물음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하지만 아라의 계산 능력으로도 부족해 게임메이커라는 전용 슈퍼컴퓨터를 조립한 걸 보면 얼마나 복잡할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젠장, 내 머리는 도대체 다른 때는 안 돌아가고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 때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아주 머릿속으로 게임메이커를 만들 작정인가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코드들을 털어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 그러고 보니 회의 중. 바라보는 팀장들의 시선이 불안해 보인다.
“아, 아닙니다. 잠시 머리가 아파 그런 거니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하세요.”
“……제 발표는 끝이 났습니다.”
…….
하……하.
“수고했어요. 다음 차례가?”
“네, TSB칩 팀의 안기철입니다. 일단, 자료 화면을 보시죠.”
몇 가지 도형과 사진에, 글들이 무액정 모니터에서 나타난다. 아주 세련된 자료는 아니지만 고생한 흔적이 보인다.
사실, 지금 내 앞에 있는 팀장들은 아직까지는 임시라는 타이틀을 앞에 붙인 팀장들이다. 그것도 한 달이 채 안 된 사람들. 상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업무에 대해 배운 것도 없이 팀원들과 무작정 나와 아라가 정해 준 일을 했다.
아라가 만든 회사 인트라넷을 통해 업무 자체가 간편하고 쉬워졌다곤 하지만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매주 월요일이면 한 주에 했던 일들과 이번 주에 할 일을 보고하는 자릴 가진다. 스트레스가 클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들이 얼마나 회사에 도움을 주고 있는지 그리고, 처음과 비교하면 얼마나 회사원다워졌는지를.
물론 경력 사원을 뽑아 이들을 이끌게 할 생각이었지만 아라가 반대했다. 아라 자신에게 필요한 건 창의적인 인간의 생각이라나 뭐라나.
그래서일까? 회사 인트라넷에는 특이한 보고서 양식이 한 가지 존재했다. 어느 팀에 속해 있든 어떤 아이디어 간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는 보고서.
경비 아저씨가 게임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적어도 좋았고 안내 데스크 직원이 회사 내 불편한 시설물에 대해 적어도 좋았다. 특히, 회사가 게임 회사인지라 그런지 몰라도 평소 자신이 생각하는 게임에 대해서 많이 올라왔는데 그중 하나가 전략 MMORPG 게임인 ‘갤럭시 워의 모티브가 되었다.
직원들은 아라에게 아이디어를 쪽쪽 빨리고 있는 것이다.
“……국내 모든 중견 컴퓨터 업체들조차 저희 TSB칩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내 판매는 인터넷 쇼핑몰을 통한 판매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는 용산을 방문해 용산의 도매업자들과 대화해 볼 생각입니다.”
아마 호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난 사장이라는 명함을 내밀고도 찬밥 신세였는데 팀장 명함으로 과연 제대로 만나서 설명이나 했으면 다행이었으리라.
“고생했어요. 하나 물어보죠. 현재 일반적으로 쓰이는 브레인 칩과 우리 회사의 TSB칩을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현재 나와 있는 게임들 즉, 브레인 칩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게임을 할 때는 우리의 TSB칩이 오감 부분에서 좀 더 뛰어난 성능을 보입니다. 민감한 사람을 제외하곤 크게 느낄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회사 게임을 할 때면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과일을 먹을 때라면 브레인 칩은 딱딱하고 거친 배를 먹는 느낌이라면 TSB칩에선 과즙이 많고 아삭한 느낌의 배를 먹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투 게임 시에는 더더욱 효과가 크게 느껴지는데 TSB칩을 사용하면 몹의 공격이 제 몸에 닿기도 전에 다가오는 느낌을 받아 피할 수 있는 반면 브레인 칩의 경우는 몹의 공격을 당하고 나서야 ‘닿았구나.’라는 느낌이 듭니다.”
“만일 안 팀장이 게이머라면 TSB칩을 구매하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전 이미 집에서 쓸 TSB칩을 예약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회사에 직원들은 대부분 예약해 놓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TSB칩에 대한 판매 대행사 선정은 보류하도록 하죠.”
“예?”
“TSB칩의 수요가 늘어난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저들이 찾아오지 않겠어요? 일단, 회사 내에서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쪽으로 계획을 짜 보세요. 쇼핑몰과 광고에 대한 걱정은 마시구요. 광고는 게임 내에 직접 할 생각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한 곳이라도 TSB칩을 장착해 헤드셋을 출시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에 불과했다. 기술이 있으면 뺏으려고 하고, 자국이 생산한 제품이 대기업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무시를 한다.
“이제 오픈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힘들 테지만 지금처럼만 해 주시면 아무 문제없이 오픈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상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짝짝짝짝!
힘찬 박수 소리와 함께 또 한 주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