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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 1권 (11화)
6.준비 완료 (2)
운동 중독이다. 겨우 2주하고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가만히 있으면 몸이 찌뿌듯하다. 밤새 아라에 의해 운동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 다시 운동으로 몸을 푼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렇게 한강 시민 공원을 뛰고 있다.
살짝 구름 낀 날씨. 해는 이제 자신의 일을 마쳤다는 듯 고층 빌딩 사이로 숨어 버린다.
전력 질주 후 가볍게 몸을 풀듯이 숨을 고른 후 다시 전력 질주. 숨을 고르며 천천히 뛰자 맞은편에 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자전거를 타는 할아버지, 아빠와 술래잡기하는 아이, 갖가지 패션 아이템들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달리는 아줌마, 늘씬한 다리에 짧은 옷을 입은 아가씨의 흐르는 땀방울이 목을 지나 쇄골에 잠시 머물다 골짜기 사이로 사라진다.
어느새 고개가 뒤돌아 가며 지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주변 사람들이 날 보는 듯하다. 아니, 보고 있구나.
쑥스러움에 다시 전력 질주.
땀이 흐르며 온몸이 날아갈 듯 가볍다. 눈앞에 다시 미인 발견, 다시 휴식. 작은 머리에 늘씬하다 못해 마른 몸, 요즘 아가씨들답지 않게 발육 부진이라고 해야 할까?
내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눈에 띄게 예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또다시 눈을 떼지 못하고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으로 향한다.
누구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
곽지연?! 불현듯 떠오른 이름. 진하의 파트너였던 아이. 난 뛰는 걸 멈추고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쯔쯔쯔!”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나와 내가 바라보는 곳을 쳐다보더니 혀를 차며 지나간다. 아, 그게 아니라니까요.
할아버지에게 그게 아니라는 눈빛을 보낸 후, 곽지연이 뛰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 모르게 뒤따른다. 지금 감정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 연민, 죄책감, 미안함, 아련함? 여러 가지 감정이 뒤죽박죽이지만 아는 체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얼마나 달렸을까? 운동이 끝났는지 시민 공원을 벗어난다. 혹 놓칠까 싶어 재빨리 쫓아갔다. 시내의 보도를 걷던 그녀는 한 건물로 사라지듯 들어간다.
JB엔터테인먼트. 간판을 보자 한편으론 안심이 되었다. 과거 그녀의 소원은 가수가 되는 것이었는데 그녀가 그러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어야 함에도 정신병원으로 들어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들어가 만나 볼까라는 생각과 만나 봐야 원망만 듣게 될 거라는 생각이 줄다리기를 한다.
“후∼”
길게 한숨을 쉬고 한 발을 내디뎠다. 자동문이 열리고 안내 데스크가 보이자 곧 후회가 밀려온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다시 나가려던 마음은 안내 데스크 직원의 말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이 없자 직원의 눈빛이 살짝 사나워진다. 이러다가 소란스러워져 그녀에게 걸리는 게 아닌가 싶다.
결심을 하고 안내 데스크로 다가갔다.
“수고하십니다. 저는 L&J소프트에서 왔습니다.”
내가 명함을 내밀며 말하자 직원은 명함을 받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믿기가 어렵겠지. 사장인데 이렇게 운동복 차림으로 그것도 땀 냄새가 많이 날 테니까.
“그러신데요?”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목적을 물어 온다.
“그러니까…… 이번에 우리 회사의 광고 모델을 찾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는 길에 이쪽으로 들어가는 아가씨가 보이더군요. 얼핏 보긴 했지만 제가 찾고 있던 이미지와 너무 잘 맞는 것 같아서 들어왔습니다.”
일단, 말을 꺼내자 술술 나온다.
“그러시군요. 하지만 지금은 사장님이 자리에 계시지 않는데…….”
“아, 저도 이런 복장으로 사장님을 만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소속 연예인들의 프로필을 좀 얻을 수 있을까 하구요.”
“프로필을요?”
잠시 부드러워지던 눈빛이 프로필이라는 말에 다시 의심이 가득해진다.
허, 이 아가씨 속고만 살았나. 날 봐, 오덕후스러운 모습이 하나라도 있나.
어, 있어 보이나? 눈빛이 왜 더 사나워져, 응?
구세주는 따로 있었다. 옆에 예쁘장한 아가씨가 귀엣말로 뭐라고 말하자 놀란 듯이 날 아래위로 훑는다. 물론, 의심이 다 가신 눈빛은 아니다.
“저 그럼, 내일 사장님 계실 때 다시 방문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험, 알겠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난 냉정히 돌아섰다. 지연이 여기 있다는 것만 안 사실만으로도 만족이다.
“아, 아닙니다.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나 한가한 사람 아니다‘라는 연기가 통했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군요.”
그녀가 건네는 브로슈어(brochure)를 훑어봤지만 지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소속 연예인의 다인가요?”
“네, 혹시 봤다는 사람이 없나요?”
“안 보이는군요. 여기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이상하군요.”
“그럼, 연습생일 수도 있겠군요. 연습생들의 프로필은 준비된 게 없는데 프린터라도 해 드릴까요?”
한 번 마음이 바뀌니 싹싹하기 이를 데 없는 아가씨였다.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5분만 기다려 주세요.”
어디론가 간 그녀는 꽤 많은 양의 서류를 들고 왔다.
“이게 저희 회사 소속 연예인과 연습생들의 프로필입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카피를 해 왔으니 찾으시는 분이 있으실 거예요.”
“이렇게 친절하시다니……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저희가 감사드리죠.”
90도로 인사하는 안내 데스크 직원에게 인사를 하곤 밖으로 나왔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곤 서류 봉투에 담긴 프로필을 꺼냈다.
윤은희. 나이 25세. 지망 분야:연기 및 가수. 이력 사항:MBS 어린이 합창단 3년, 이혼과 전쟁 3편 출연……
프로필 제일 위에는 방긋 웃는 얼굴의 안내 데스크 직원이 있었다.
***
곽지연은 요즘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인생에 온다는 세 번의 기회 중 두 번째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JB엔터테인먼트에 들어온 지도 어느새 3년. 처음 들어왔을 땐 자신이 겪은 아픔을 잊으려 미친 듯이 연습을 했었다. 하지만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고, 단역으로 몇 번 TV 출연한 게 다였다.
2년째 되던 해, 이곳 JB가 어떤 곳인지 알게 되었다. 자신과 같은 곳에 있던 출신들이 잠시 머무는 곳이었다. 빵빵한 후원자의 지원으로 이곳에 머물며 광고도 찍고, 앨범을 낸 후 어느 정도 인기가 올라가면 소속사를 옮긴다.
물론, 후원자의 지원에도 인기가 오르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기회가 생기면 그들에게 먼저 제공될 뿐 후원자 없이 들어온 지연에게는 쉽사리 주어지지 않았다. 꽤 많은 이들이 이곳을 거쳐 지나갔다.
그녀는 버텼다. 이곳마저 떠나 버리면 도저히 살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름이면 바퀴벌레가 날아올라 흰 빨래에 검은색 얼룩을 만드는 옥탑 방에서 버티고 버텼다.
두 달 전쯤인가? 그런 지연에게 기회가 올 뻔한 일이 있었다. 올 가을쯤 데뷔 예정인 아이돌 그룹에 T.O가 부족해진 것이다. 5인조 중 2명이 개인 사정으로 그만둔 것이다.
아니, 개인 사정이라기 보단 소속사를 옮겼다는 게 맞을 것이다. 최소 4명 정도는 되어야 된다는 사장님의 말이 그녀의 귀로 들려왔을 땐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그 자리는 자신의 자리가 아니었다.
지금도 옆에서 연신 떠들고 있는 한유리. 그녀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어디서 왔는지 동작과 말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아이돌 그룹 멤버로 한유리가 들어갔다. 그녀가 차라리 성질머리가 나쁜 년이었다면. 자신에게 방긋 웃으며 친하게 지내자고, 친구로 지내자고만 안 했어도 그녀를 죽일 듯이 패기라도 했을 텐데…….
집에 한 알 두 알씩 모아 두었던 수면제를 손에 쥐고 그날 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버티려면 잊어야 했다. 잊기 위해 한강을 미친 듯이 뛰어야 했다.
미친 듯이 춤을 연습하던 지연을 사장이 불렀다. 그의 옆에는 처음 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L&J소프트에서 나왔다는 두 사람은 그녀를 요모조모 살펴보더니 자신의 회사 광고모델에 쓰고 싶어 했다. 곽지연과 한유리, 데스크에서 근무하던 윤은희와 연습생 출신의 신민지 이렇게 넷이 모델로 선발되었다.
사장은 곽지연과 윤은희를 보며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지만 L&J소프트에서 나온 사람들은 확고했다.
광고비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신인임을 생각한다면 꽤 많은 돈이었다.
1년 계약에 4,000만원. 사장은 고생하라며 밴까지 내주었다. 그중 20%가 지연의 몫이었지만 한 푼을 받지 못했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다 왔다. 처음이라고 긴장들 하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내가 해결할 테니 걱정 마라.”
무뚝뚝한 매니저의 말이었지만 지연은 그가 걱정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JB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우군이었고, 그녀가 하루 굶주리고 있을 때 이것저것 챙겨 주던 이도 그였다. 지연이 어릴 때 죽은 동생과 닮았다며 언제나 챙겨 주던 그에게 웃어 보이며 차에서 내렸다.
“JB엔터테인먼트에서 오신 분들이시죠?”
“네.”
“저는 광고 팀의 정우혁이라고 합니다. 본격적인 촬영은 1시간에서 1시간 30분 뒤에 있을 예정입니다. 그런데 일단 촬영에 앞서 하셔야 하는 게 있는데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지연이 보기에 크지 않은 회사였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촬영 장소를 회사로 잡은 것도 이상했다. 혹시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기회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정우혁을 따라 들어간 곳은 9층에 있는 회의실. 민지의 걱정스런 눈빛을 보고 지연은 민지의 손을 잡아 주며 힘내라는 듯 살짝 웃어 보였다.
“데려왔습니다. 들어가시면 그분의 말을 따라 주시면 됩니다.”
정우혁이 문을 열자 지연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들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지연의 예상과는 달리 단정한 차림의 아가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자, 긴장들 푸시고 자리에 앉으세요. 전 L&J소프트 광고 팀의 팀장을 맡고 있는 현미숙이에요.”
“반가워요.”
“정말로 여자가 봐도 예쁘게들 생기셨네요. 왜 연예인, 연예인 하는지 알 것 같아요.”
편안하게 해 주는 현미숙의 말에 긴장하던 넷은 서서히 얼굴이 풀렸다.
“일단, 차 한 잔씩 드시면서 말씀드리죠. 혹시 드시고 싶은 차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녹차? 커피? 둥글레차?”
각자 취양에 맞는 차를 선택하자 곧 차가 나왔다. 차를 다 마실 때까지 이런저런 걸 물어봐 주는 현미숙이 지연은 고마웠다. 처음 찍는 광고라 긴장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무척이나 편해진 상태였다.
“자, 이제 차를 다 드셨으니 본격적으로 오늘 촬영에 대해서 말씀드릴게요. 저희 회사가 게임 회사라는 건 다 들으셨겠죠? 그래서 일반적인 촬영과는 조금 다를 거예요. 제일 먼저 여러분이 하셔야 할 촬영은 바로 전신 촬영이에요. 모든 악세사리와 화장을 지워 주시고 저 안에 들어가서 기계의 명령을 따라 주시면 돼요. 저 안에 들어가서는 반드시 타이즈만 입으셔야 해요.”
“……!”
“아, 그렇다고 오해는 마세요. 촬영이 끝난 후엔 다시 옷을 다 입으시고 나오시면 되니까요.”
“그냥 수영장 탈의실이라고 생각하며 되겠네요?”
“예, 윤은희 씨 말처럼 생각하시면 더 편하겠죠.”
그렇게 어려운 요구는 아니었기에 본격적으로 촬영 준비에 들어갔다.
각각에게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붙었다. 지연은 오전 일찍 한 화장이 소용없는 짓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조금은 아쉽긴 했지만 눈을 감고 화장 지우는 걸 기다렸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지연은 냉장고보다 1.5배 정도 커 보이는 기계 안으로 들어갔다. 좁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움직이는 데 무리 없는 넓이였고, 안은 밝은 백색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세요.
기계음이라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 약간은 허스키한 자신의 목소리와 비교하자면 너무나 부러운 목소리였다.
왼쪽 벽이 스르르 올라가며 검은색 전신 타이즈가 보였다. 속옷까지 모두 벗어야 했지만 대중 목욕탕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타이즈는 보정 속옷처럼 꽤나 끼는 옷이었다. 많이 굶어 마른 편인 몸이었지만 타이즈는 그나마 민망한 부위에 있는 조그마한 살들도 감추는 데는 효과가 좋았다.
‘몇 벌 있으면 좋겠다.’
괜스레 타이즈에 욕심이 났다. 타이즈를 입고 나자 앞쪽 금속 재질의 벽에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몸이 비친다. 지연은 은근히 자신의 몸매가 마음에 들었다.
―준비되었으면 정면에 보이는 동작을 따라해 주세요.
눈앞에 귀여워 보이는 캐릭터가 나와 양팔과 양다리를 쫘악 편다.
지연은 그 동작을 따라했다.
이십여 가지의 동작을 따라하자 금방 끝이 났다.
―다음은 표정을 지어 주세요. 살짝 미소 진 얼굴.
살짝 미소 진 모습, 활짝 웃는 모습, 깔깔거리는 모습, 슬프면서 웃는 모습, 슬퍼하는 모습…….
연기 연습에서 하던 거의 모든 표정들과 감정들을 표현한 후에야 끝이 났다.
기계 촬영이 끝난 이후의 촬영은 어렵지 않았다. 여러 가지 옷을 입고 사진작가의 요구에 따라 포즈를 취하는 게 끝이었다.
지연은 길게 이어지지 않은 촬영에 오히려 불만이었다. 촬영하는 순간만은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지냈는지를 까맣게 잊고 몰두할 수 있었다. 스타가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왜 많은 스타들이 정상에 올랐다가 인기가 떨어지면 못 버티는지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L&J소프트 회사에 감사한 마음과 약간의 원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지연이다. 또한 회사가 잘되길 바랐다. 그래야 자신도 조금은 인기가 생길 것이고 또 다른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개인적인 욕심에서였다.
이제 신데렐라의 마법은 풀렸다. 지연을 태운 차는 어둠으로 빠르게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