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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 1권 (12화)
6.준비 완료 (3)
아름다운 중세의 항구도시의 시장 한 골목길. 지연는 가슴 쪽이 유난히 파인 셔츠와 그 위로 달라붙는 가죽조끼를 입고 있다.
상의와 유달리 잘 어울리는 치마는 걷는 게 힘들어 보일 정도로 짧았지만 어느 남자들도 눈만 돌릴 뿐 곧 자신의 일에 매진한다.
아마 접근하는 이가 없는 이유는 그녀의 양 옆구리에 있는 하얀색 검집과 검정색 검집 때문만은 아니리라. 유독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
일순, 앞쪽에서 비명 소리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에 쫓겨 온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 모두들 그녀를 지나쳐 도망가기 바빴지만 그녀는 눈이 살짝 가늘어질 뿐 움직일지 몰랐다.
―크르르릉! 캬악!!
몬스터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나타난다. 끔찍한 모습. 사람들이 하나둘씩 당하며 비명 소리는 더욱 커졌다.
지연의 얼굴은 굳어진다. 그리고 땅을 박차고 나아갔다. 머리카락이 뒤로 날리고 가슴이 출렁거리는 모습은 예술이다. 좌우로 교차되었던 손에는 어느새 백색의 검과 흑색의 검 두 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수많은 몬스터들도 그녀를 발견하고 달려든다. 백색 검과 흑색 검은 각각의 색처럼 일렁거리는 빛을 토하며 부딪친다.
쾅! 케에에에엑!
뿌연 먼지 사이로 몬스터들의 괴성이 들리며 ‘The begin’이라는 글자가 떠오른다. 중저음의 멋진 남성의 목소리가 울린다.
“7월 1일.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의 시작! 환타지월드!”
화면이 바뀐다. 도심의 야경을 하늘에서 비춘다. 화면은 점점 커지며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산을 보여 준다. 적막하게 그지없는 그곳에 갑작스러운 자동차 굉음들.
2차선의 좁은 산길을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스포츠카들.
한대에 수십억씩 하는 스포츠카들은 안전거리도 유지하지 않은 채 밀집하여 달려온다. 한 대만 잘못되어도 아찔한 상황. 커브가 눈앞인데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끼이이이익!
드리프트 소리가 어둠을 찢는다. 그중 한 대의 차가 옆 벼랑 쪽으로 밀리며 날아오른다.
꽝!
차량이 폭발하며 화염이 솟아오른다. 그 불빛은 유려한 빨간색 스포츠카 안에 타고 있는 유리의 얼굴을 비춘다. 유리의 시선은 바로 앞에 달리는 회색의 스포츠카에서 떠날지 모른다. 또다시 회전 구간, 유리는 입술을 거칠게 깨문다.
회색 차가 먼저 돈다. 그 안쪽 틈을 노린다. 2대가 드리프트하기엔 불가능한 지역. 바퀴가 도로에 만들어 놓은 도랑으로 빠질 듯하다. 그 아슬아슬한 순간 두 대의 차량은 무사히 구간을 통과한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빨간색 차가 조금 앞선다.
앞 결승점에서 많은 이들이 함성을 지른다. 두 대의 차량은 거의 동시에 통과한다. 유려한 붉은색 스포츠카의 바디처럼 붉은색 원피스를 입은 유리가 차에서 내려 불끈 손을 들어 올린다.
“와!!!”
엄청난 함성과 함께 화면은 점점 위로 올라간다. 그리곤 ‘The begin’이라는 글자가 떠오른다.
이후 네 편의 광고가 더 나왔다. 남녀가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해변이나 고성에서 데이트하는 모습. 여전사의 총 쏘는 모습 등등. 모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멋있는 광고들이다.
특이하게도 아라가 만든 이 광고 중에 가상현실에서 보던 아라가 모델인 것도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사적인 감정이 많이 들어간 광고였지만 회의실에 울려 퍼지는 박수 소리를 듣자면 나쁘진 않았나 보다.
“이 여섯 편의 광고가 내일부터 각 방송사에 방송될 예정이며 전 세계 주요 포털 사이트에도 동시에 보여질 예정입니다.”
현미숙 팀장은 약간은 격앙된 음성으로 발표를 마쳤다. 벌써 3시간 가까이 진행된 회의라 이제 끝마쳐야 했다.
“모두들 고생하셨습니다. 다음 주 오픈하게 되면 더욱 바빠지겠지만 지금처럼만 해 주시다면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오늘 저녁은 팀원들과 부담 없이 즐기십시오. 모든 비용은 법인 카드가 책임질 겁니다. 이상 회의를 마칩니다.”
“하하하하!”
짝짝짝짝!
웃음소리와 박수 소리를 뒤로하고 내 사무실로 돌아왔다. 소파에 몸을 던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땠어요?”
아라가 묻는 말에 아까 당황하던 일이 생각이 났다.
“아라, 너! 다음부턴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란 말이야.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오홍! 진하를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성공이네요. 호호호!”
또, 코맹맹이에 시크한 목소릴 낸다.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니?
“그건 그렇고, 지연 씨의 일은 어쩔 거예요?”
아라에게 지연과 관련되었던 일을 다 말했었다. 아라는 만나서 해결하라고 했지만, 아직까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지금은 이대로 지켜보려고……. 두고두고 갚아야지.”
지연의 일 말고도 생각할 것이 많았다. 이제 계획은 시작되었을 뿐이다.
7.오픈! (1)
한때, 다크게이머로 생활비를 벌어 쓰던 조승환은 요즘 기분이 좋지 않다. 3개월 전에 시작한 게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랭킹 20위권을 만들어 놓았는데 하루가 다르게 유저수가 급감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시바! 또, 삽질한 거 아닌지 모르겠다.”
머리에 쓰고 있던 헤드셋을 한쪽으로 던지며 괜한 침대 매트리스에 화풀이다. 며칠 전, 먹은 아이템은 자신이 보기에도 좋아 보이는 레전드급 아이템이었다. 얼씨구나 하는 마음에 일단 적정 가격보다 높게 올렸다. 100만원. 그게 장사의 기본이니.
며칠 뒤, 급처로 80만원에 팔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완전히 계산 밖이다. 아예 안 팔린다. 설상가상으로 레전드급인데 어떤 놈이 떡하니 먹고 50만원에 올렸다. 분명 게임 회사에 근무하는 놈일 것이다.
근래 게임치고 아이템 판매 시장에 게임 회사가 암암리에 개입을 안 하는 곳이 없다는 소문은 돌지만, 긍정적인 측면으로 보면 게임 머니 가격을 조정함으로써 나와 같은 유저들을 보호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기분 때문일까? 오늘은 유난히 모든 것이 삐딱하게 보이는 게 사실이다.
“TV 온(On)!”
한쪽 벽면에 헐벗고 있는 아가씨의 그림이 사라지며 TV가 작동된다.
TV에도 재밌는 게 없다. 채널을 돌리다 순간 멈췄다.
섹시하게 생긴 언니가 옷차림도 아주 훌륭하게 입고 있다. 느낌상 딱 중세 배경의 게임 필(Feel)이다. 여느 게임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광고였지만 섹시한 언니가 뛰어가며 흔들리는 무엇에 잠시 눈을 떼지 못했다.
화면은 흙먼지로 뒤덮였고 글자가 나온다. The begin. 뭐 다들 저런 식으로 유저들을 끌어들이니까. 근데, 밑에 글자가 눈에 확 들어온다.
가상현실 게임:본 화면은 실제 게임 화면입니다.
물론, 낚시일 가능성이 높다. 게임계의 최고 회사라 할 수 있는 파이라에서도 만든다는 소문은 돌았지만 헛소문이었다.
물론, 우리나라의 그래픽 수준이 최고라는 점에서 봤을 때 가능할지도 몰랐다.
“진짜라면 렉 쩔겠다. 크크크!”
TV를 보다 보니 광고가 꽤 여러 종류였다. 광고 보는 재미는 있었다. FPS, 레이싱, 카트, 대전 게임, RPG, 그리고 무슨 게임인지 헷갈리게 하는 것까지 6종류. 설마, 저 모든 게임을 동시에 서비스할 생각은 아니겠지?
궁금증이 생겼다. 헤드셋을 쓰고 검색 사이트로 접속했다. 벌써 검색어 1위부터 10위까지가 온통 광고 얘기와 회사 이름, 광고한 여자애의 프로필 등이었다.
회사 이름을 클릭해서 해당 홈페이지로 이동했다.
메인 페이지는 좌우로 나누어져 수십 개의 언어로 ‘가상현실 접속’ 과 ‘일반 접속’으로 쓰여 있는 듯했다. 체험을 해 보고 싶어졌다. 시간 걸리는 건 질색이지만 왠지 느낌이 왔다.
가상현실 접속 버튼을 누르자 뭔가를 설치하겠느냐는 메시지가 뜬다. ok, 다음, 다음, 다음. 참, 간단했다. 컴퓨터를 리부팅해야 한다는 메시지에 짜증은 났지만 설치가 간단했으니 봐 주기로 했다.
리부팅이 되고 홈페이지가 바로 뜬다. 다시 가상현실 접속 버튼을 눌렀다. 눈앞이 환해진다.
환해지는 화면에 눈을 깜박거렸다. 이 무슨. 앞에 사람의 뒤통수가 보이다니. 메시지가 뜬다.
[랜덤 캐릭터로 접속하셨습니다. 가상현실 체험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지금 앉아 계신 열차는 가상현실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오니 앞에 있는 ‘Off’ 버튼을 눌러 주시면 언제든지 접속 해제를 하실 수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놀이 기구용 기차가 출발한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니 다들 나처럼 당황했나보다.
“혹시 여기 유저. 그러니까 저처럼 진짜 사람들인가요?”
“네!”
“나도 진짜 사람. 크크크!”
여기저기 웅성거린다. 그때 갑자기 앞쪽 하늘에서 뭔가가 번쩍거린다.
“드, 드래곤?”
레드 드래곤과 사람으로 보이는 작은 무엇이 나타나 싸우기 시작한다. 마법이 난무한다. 이건 영화보다 더 심하다.
3D 영화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실제 눈앞에 있다는 느낌은 들지만 뭔가 약간 어색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곳은 정말 실제다. 한 드래곤과 한 사람의 싸움 중 하나의 파이어볼 마법이 기차 주변 땅에 박힌다.
꽝!
더운 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간다. 기차는 그들의 싸움을 지나 전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조승환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자신이 겪은 일을 생각했다. 이건 혁명이다. 레드 드래곤의 눈동자와 전장 속에서 오연히 서 있는 광고 속의 그녀, 기차 옆을 지나가던 스포츠카들…….
정신을 차렸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 게임은 무조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하던 게임 아이템을 모조리 낮은 가격에 팔아 버렸다. 오픈까지 앞으로 5일.
TBS칩인지 TSB칩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것부터 신청했다. 체험 중 느꼈던 그 감동이 70%에 불과하다는 광고도 봤기 때문이다. 이제부턴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
***
자동차 매니아 김무혼은 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생각이 많아졌다. 내일 있을 스포츠카 동호회 모임에 참석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대기업에 다니며 꽤 많은 연봉을 받고 있는 그지만 차에 돈을 들이면 항상 부족한 게 사실이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내일을 위해 차량의 외관을 튜닝하려니 비용이 만만치가 않다.
물론, 돈은 차량을 튜닝하기 위해 들어 둔 적금이 있으니 괜찮다. 하지만 튜닝을 한다고 해서 동호회 사람들이 끌고 오는 차량에 비하면 정말 초라했다.
‘2년 전만 하더라도 괜찮았는데…….’
괜스레 과거의 영화가 생각나는 그였다.
스포츠카 동호회는 여성 회원들도 많았는데 차가 있는 여성들도 있었지만 모두 자신의 차량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몸매가 드러나 보이는 화려하고 야 한 복장의 미녀들이 자신의 차를 타고 싶어 했고, 미녀를 태우고 한적한 국도를 빠른 속도로 달릴 때의 기분은 정말 좋았었다.
특히나, 밥을 먹기 위해 그녀와 내리면 뭇 남성의 부러운 눈빛들.
“휴∼”
결국 애마를 맡겨 놓은 정비소에 전화를 하지 않았다. 아무리 돈을 더 들여 봐야 차를 바꾸기 전에는 힘들 것 같았다. 최근 회원들이 끌고 오는 스포츠카보다 나은 기종을 사려면 장기 할부로 사 놓은 집이며 적금이며 몽땅 부어도 모자랄 게 틀림없다.
부모 잘 만나 잘사는 녀석들의 웃던 소리가 오늘 그를 괴롭힌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안 온다. 오늘은 금요일. 지금이라도 다시 정비소로 갈까 생각해 보지만 곧 같은 결론.
‘멋진 자동차나 구경해야겠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아이쇼핑이었다. 자주 가는 사이트에 접속에 평소에 눈여겨보던 자동차들을 다시 살펴본다.
페랄리 2040년 식. 출력 500kw, 최대 토크 104㎏의 동력 성능을 가진 전기자동차. 유려한 바디 라인은 마치 여성의 허리와 힙 라인을 연상케 한다. 김무혼이 가장 눈독을 들이는 차량 중 하나이다.
댓글을 보다가 눈에 띄는 글 하나를 발견했다.
ㅋㅋ 어제 제가 이 차를 탔습니다. 쿠션과 일치가 되듯이 착 달라붙어 운전할 만하더군요. 해안도로를 최고 속도 500Km로 타는 기분이란……. 정말 날아 갈 듯했습니다.
옆에 멋진 미인과 함께하는 드라이브. 혹시나 의심하는 분들을 위해 제가 사진 갤러리에 사진 몇 장 올렸습니다. 제 아이디로 검색하시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물론,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환타지월드의 드림오브카에서 타 봤다는 겁니다.)
재빨리 댓글 단 사람의 아이디를 클릭 후, 이미지 갤러리를 선택했다. 은빛의 페라리의 문을 열고 두 남녀가 함께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모델들의 사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완벽한 사진들. 자신도 한 번 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