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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오션 1권(20화)
7장. 남겨진 것(4)


“그거보다 급한 거?”
원수들에 대한 이야기보다 더 급한 것이 있다는 말에 장혁이 의문을 보였다.
“그래, 앞으로 네 신분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다. 넌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있어서 말이다. 지금처럼 이런 상태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 그것부터 처리해야 할 거다.”
“으음, 그렇겠구나. 지금으로써는 옛날 신분을 그대로 쓸 수는 없으니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놈들에게 알려지면 그야말로 어서 죽여 달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인데. 그럼, 어떻게 하지?”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도 드물게 주민등록번호라는 제도를 도입해 국민 한 명 한 명의 신분을 관리하는 국가다.
지금 이 상태로는 예전의 신분을 되찾는다는 일은 자살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 자세히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찾다 보면 방법이 생길 테니 같이 궁리해 보자.”
“알았어.”
‘그래, 놈들에게 복수하려면 새로운 신분이 반드시 필요할 테니, 우선 그것부터 해결해야 한다.’
장호의 말이 맞는 것이기에 장혁은 새로운 신분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 기관이 아닌 이상, 이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기록된 사람을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게 만든다는 것은 쉽지가 않은 일이었다.
“아휴! 골치가 아프다. 놈들에게 들키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별수가 없으니…….”
골똘히 생각하던 장호가 입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이거 말해야 하나…….’
장호의 마음에는 들지는 않겠지만 사실 방법은 있었다.
길을 잃어버렸다고 경찰서에 찾아가 집과 가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 된다.
기억이 없다면 고아원에 보내질 것이고, 거기서 새로운 신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촌 형인 장호가 내켜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장혁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할 수 없다, 그 방법밖에는 없으니까.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모르는 사이가 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한 방법으로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되면 서로 남남이 될 것이고, 따로 떨어져 산다면 두 사람 다 안전할 것이기에 장혁은 자신이 생각한 방법을 말하기로 했다.
“형, 내가 실종 아동이 돼서 파출소를 찾아가면 어떨까?”
“뭐?”
“그러니까…….”
놀라며 반문하는 장호를 향해 장혁은 자신이 생각한 방법을 차분히 설명했다.
자신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할 방법 때문이지 설명을 들은 장호는 황당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그렇게 되면 고아원에 갈 텐데 말이야. 절대 그럴 수는 없다.”
“형, 그 수밖에는 없어. 나만 잘한다면 아무도 모르게 신분을 감출 수 있을 테니 더 이상 좋은 방법은 없어. 놈들의 눈을 완벽하게 속이려면 말이야.”
“그렇지만…….”
맞는 말이었다.
새로운 신분을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은 만큼 이만한 방법도 없기는 했다.
그렇지만 하나밖에 남지 않은 피붙이를 고아원에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장호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 나 잘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형이 남들 모르게 도와주면 될 거고. 형 돈 많이 벌잖아.”
혈육이라고는 자신과 어머니밖에 없는 탓에 장호는 은퇴한 외조부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
지금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유통회사는 물론이고, 그밖에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기에 장혁을 지원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건 아무 문제가 없기는 하지만 너무 위험하다, 혁아.”
동생을 지원하는 것이야 문제가 없지만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기에 장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장혁을 바라보았다.
“하하하! 형, 날 믿어. 알잖아 내가 어떤 아이인지.”
“휴우.”
장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너무 잘 안다,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너무도 잘 알기에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동생의 고집이 완고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운할 할아버지만큼 세다는 것도.
“알았다.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당장은 안 된다. 준비해야 하니까 말이야. 마침 이곳 경찰들하고 동사무소 직원들을 잘 아니까, 내가 아는 고아원으로 가도록 손 써 보마.”
“고마워 형, 승낙해 줘서.”
“그렇지만 조심해야 한다. 어쩔 수 없어서 이렇게 하지만 네가 없으면 아마도 난 살 수 없을 테니까.”
진심이었기에 장혁은 사촌 형이 너무도 고마웠다.
“그런 소리하지 마. 작은 어머니가 슬퍼하시겠다.”
“그, 그런가?”
동생의 말대로 따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라면 끔찍하게 여기시는 어머니에게 불효하는 일이었기에 장호는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8장. 땡중 서광(1)


심모원려를 품고 있으면서도 주변을 살피는 것을 보니 오히려 자신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 이 정도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할아버지가 남기신 것을 알려 주어도 상관없겠구나.’
할아버지가 남기신 것이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알려 주려고 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가문의 참화를 예상하고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기신 유진을 찾아 아우에게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혁아, 그 문제는 해결될 것 같으니 알아 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뭔데?”
“그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계셨는지 할아버지가 너와 나에게 남기신 것이 있다.”
“할아버지가 남기신 것이라니, 무슨 소리야?”
자신에게 아무런 언급이 없었기에 장혁이 물었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할아버지가 그러셨다. 우리를 위해 남기신 것이 있고, 그걸 보게 되면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가 있다고 하셨다.”
“으음.”
할아버지가 무엇인가를 남겼다니 정말 뜻밖이었다.
‘나에게도 비밀로 하고 형을 통해 남기셨다면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뛰어난 한학자이자 천문역학에도 조예가 깊은 할아버지였다.
앞날을 예상하고 무엇인가 남겼다는 것은 가문의 참화를 예감하고 있었다는 뜻이기에 장혁은 얼른 보고 싶었다.
“형, 할아버지가 남기신 것이 뭐지? 어서 보여 줘봐.”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던지 장혁이 장호의 손을 잡으며 재촉했다.
‘녀석, 할아버지 일이라니 급한 모양이구나.’
조금 전 차분해 보이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급한 동생을 보며 아직은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혁아, 그리 조급해 할 것 없다.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것은 지금 이곳에는 없으니까.”
“이곳에 없다면 어디다 감추어 놓으신 거야?”
“후후후, 맞다.”
총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대번에 자신의 말뜻을 알아듣는 동생을 보며 장호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그곳이 어디인데? 이곳에서 가까워?”
“너무 보채지 마라. 너도 잘 아는 분이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잘 아는 분?”
“그래, 바로 서광 스님이 가지고 계신다.”
“뭐! 그 땡중 할아버지에게 맡기셨다는 말이야?”
법명이 서광인 스님은 장혁에게도 낯익은 존재다.
할아버지인 헌승과 어렸을 때부터 1년에 서너 번 찾았기에 잘 알지만 그다지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머리는 깎았지만 술 먹고, 노름하는 것을 다반사로 하는지라 천하의 땡중이라고 장혁의 뇌리에 기억되어 있었기에 인상을 찌푸린 것이다.
자신과 앙숙이나 다름없는 서광에게 유진을 맡겼다니 할아버지의 뜻을 알 수 없었다.
“녀석, 땡중이라니! 그래도 할아버지의 유일한 친우이신 분한테.”
장호가 장혁을 나무랐다.
“그렇지만…….”
“넌 잘 모르겠지만 스님은 불법을 초월하신 분이다. 법력이 높으신 분이니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알았어, 형!”
평상시와는 다른 말투에 장혁은 쉽게 수긍했다.
장호의 됨됨이가 뛰어난 만큼 이렇게 말하는 것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긴, 할아버지가 뭔가를 남겼다면 아무에게나 부탁을 하지는 않았겠지.’
세상의 진실을 한 눈 아래 굽어보던 할아버지가 중요한 것을 땡중에게 맡기실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 대하는 것도 그렇고, 그분에게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이 틀림없구나.’
파계승처럼 불도 어기는 것을 밥 먹듯이 하는 서광이 어쩌면 범상치 않은 비밀을 가지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장혁은 궁금증이 돌았다.
“후후후, 녀석!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나가자.”
자신의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서광 스님에게 맡긴 연유를 찾는 듯 생각에 잠겨 있는 장혁을 장호가 일깨웠다.
“지금?”
“그래, 어차피 갈 것이라면 지금 가는 것이 낫다. 서광 스님께 인사도 드릴 겸 말이야.”
“알았어. 나도 빨리 할아버지가 남기신 것이 무엇인지 보고 싶어. 형!”
“어서 나갈 준비해라. 날이 무척이나 추우니 방에 들어가 든든하게 입고 나와라.”
“응!”
장혁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옷장을 열자 새로 산 옷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고마워, 형. 실망시키지 않을게.”
장호의 마음에 마음이 뭉클했다.
“형이 나 주려고 준비한 모양이지만 내게는 조금 커 보이는 걸.”
취향에 맞는 몇 가지 옷들을 보니 치수를 잘못 알았는지 하나같이 커 보였다.
“그래도 형이 준비한 거니까 입어 보자.”
셔츠나 바지가 조금 크더라도 소매나 바짓단을 접어 입으면 그만이었기에 성의를 생각해 그냥 입었다.
“어? 딱 맞네.”
상당히 커 보였는데 형이 사온 옷은 의외로 잘 맞았다.
큰일을 겪느라 미처 생각하고 있지 못했지만 옷이 맞는 것을 보며 자신의 신체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어디, 거울을 한 번 볼까?”
옷장에 달린 전신 거울에 모습을 비춰 보니 예전과는 많이 다른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한 뼘 정도나 자랐구나. 그사이 더 큰 건가?”
원래부터 자신 또래의 아이들보다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만 지금은 또래의 친구들과 비슷하게 보이는 앳된 소년이 거울 안에 있었다.
“아무래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구나.”
손도 예전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는 더 커졌다. 앳된 얼굴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전보다 컸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몸에 걸친 듯 자신의 모습이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크크, 커서 나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만 나가자.”
장혁은 예전과는 확연히 모습에 피식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에서는 외투를 걸친 장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알았어.”
집을 나선 두 사람은 차를 타고 하남 쪽으로 향했다.
도로 위의 눈은 제설 작업 때문인지 거의 녹아 있어 운전에는 지장이 없었다.
“형, 형은 할아버지가 남기신 것이 무엇일 것 같아?”
차가 팔당 쪽으로 들어서고 난 뒤 도로가 한적해지자 지금까지 생각에 잠겨 있던 장혁이 물었다.
“글쎄다. 할아버지께서 무엇을 남기셨는지 가르쳐 주시지 않아서 나도 잘 모르겠다.”
“절대 평범한 것은 아니겠지?”
“그럴 거다. 집안에 위험이 닥치면 절대 나타나지 말고 있다가 나중에 가문의 피난처로 가서 살아 있는 가족이 있으면 구하고, 만약 그중에 네가 있다면 어른이 된 후에나 보라고 하셨으니 말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걸 보게 되면 우리 가문에 대해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을 거다.”
“으음.”
장혁이 신음을 삼켰다.
‘직접 봐야 알 수 있다는 건가?’
궁금증이 치밀었지만 형도 모르고 있으니 물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장혁은 입을 다물고 창밖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