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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 1권 (16화)
9.슬렘 지구 (2)
아라가 해킹을 통해 얻어낸 그에 대한 자료로도 그의 강함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라는 그의 강함을 ‘근력이 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속도’라는 말로 표현했다.
결국 연구가 끝날 때까지 함께하고 싶다고 그에게 제안을 했고, 그는 동생의 치료를 원했다.
최고의 병원과 최고의 의료진을 그의 동생에게 제공했고 이틀 전, 수술을 무사히 마쳤다.
그동안 최일권은 매일 테스트를 진행했다. 어제는 결국 더미가 이기나 하는 순간이 왔다. 하지만 또다시 한계 속도를 넘어서는 그의 능력에 더미는 산산이 부서져야 했다. 아라의 밝혀내겠다던 장담도 부서졌다. 결국 난 참지 못하고 이유를 물었다.
기(氣).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내공이 그에겐 존재한다는 것이다. 수십 년 전부터 기를 측정할 수 있는 장비는 많이 나왔지만 명확하게 밝힌 장치는 아직까지도 없다.
아라는 반드시 그러한 장비를 만들겠다고 연구에 들어갔고, 나는…….
“허리가 높습니다. 무릎을 더 낮추고 허리를 펴세요. 호흡은 제가 가르쳐 준 대로!”
젠장! 왜 기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을까? 이러고 있는지 얼마나 됐지? 이제 20분? 다리가 후달리고 가볍게 올리고 있는 손이 천근만근이다. 주저앉고 싶다.
“손 똑바로!”
동생과 통화 중이면 그쪽이나 신경 쓰지요?
최일권이 가르쳐 준 기마 자세는 쉽지가 않았다. 그나마 요즘 미친 듯이 운동을 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5분도 못 버텼을 것이다. 아, 이제는 끝이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
“그만. 천천히 숨을 내쉬면서 자세를 바로하고 손을 비비세요. 수고했어요.”
“후∼”
땀이 비 오듯이 흐른다. 어찌 내 한계를 알았는지 모르지만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20분 정도로는 어림없어요. 최소한 2시간 정도는 되어야 기본이 된다고 말할 수 있어요.”
“네∼에?”
2시간이라니 아라가 들을까 겁난다. 심하게 떨리는 다리가 더욱 심하게 흔들린다.
“방금 그 호흡법을 잘 기억해 두세요. 호흡에 몸을 맡기면 한나절 정도는 금방 지나가요.”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이군요. 일권 씨는 얼마나 오랜 동안 기마 자세를 하실 수 있어요?”
“보통은 6시간쯤. 호흡에 몸을 맡기다 시간을 잊으면 아침에 시작해서 밤늦게까지도 해 본 적이 있어요.”
“소설에서 나오는 무아지경?”
“하하, 무아지경이라는 말은 맞는데 소설처럼 환골탈태나 내공이 확 늘거나 하진 않더라고요.”
쳇! 기 때문에 읽은 소설은 뻥이었나 보다.
“자, 그럼. 기마 자세와 호흡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을 드리죠.”
사원들의 휴식터로 사용되는 옥상으로 올라왔다. 의자에 청소용 양철 물통을 올려놓은 그 앞에서 선 채 말을 이었다.
“근접전에 상대와 싸우게 될 때 가장 문제점이 뭐라고 생각하죠?”
가까운 곳에서의 싸움이라……. 10명의 테스터와 더미를 상대할 때를 생각해 본다.
최근 최일권의 무술을 잠든 사이에 연습을 많이 해서 1대1에서는 딱히 어려움이 없다. 물론, 그를 카피한 더미에겐 항상 당할 뿐이지만.
최일권의 무술은 무술이라기보다는 군에서 배운 기술과 무술을 섞어서 만든 살인 기술이다.
“그럼, 1대 다의 대결에서 문제점은 뭘까요?”
다수와의 대결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선 넷 이상은 힘들다. 특히, 바싹 달라붙어 싸움이 진행되면 기술도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
“파괴력? 아무래도 상대방이 붙어서 싸우려고 하니까 때려도 힘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 쓰러뜨리기 힘들더라고요.”
“그렇죠! 파괴력. 제가 맨손으로 10명과 싸울 때는 졌었죠? 무기를 든 상태에서는 이겼고요.”
“그랬었죠.”
“하지만 사실 현실이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요.”
“에∼?”
좀처럼 믿기 어려운 얘기다. 그가 비록 한계 속도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을 가진다고 해도 우르르 붙는 10명과는 힘들 것이다. 내가 직접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에서 내가 슈퍼맨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최일권처럼 한계 속도를 넘도록 조작한 후 테스트를 해 봤다. 6명이 한계였다.
“보여드리죠, 그 힘을.”
물통 바싹 붙어 천천히 팔을 물통으로 내민다.
팡!
“웃!! 깜짝이야!”
엄청난 소리와 함께 양철 물통은 멀리 날아가 버렸고, 안에 담긴 물은 사방으로 튀어 비처럼 내려온다.
“어때요?”
어느새 한쪽이 움푹 찌그러진 물통을 들고 그가 묻는다.
“세상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물통을 향해 내민 주먹은 결코 빠른 속도가 아니었다. 상식 파괴. 자신의 실력이 어떠냐는 듯 웃는 최일권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 청소아줌마한테 혼났다!
***
아침이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자 역시나 입·출력장치 안. 밤새 무슨 일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평상시의 아침이면 전날 처리했던 서류 내용이며 회사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과 밤새 운동한 것들이 주르륵 떠오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안 했다. 웬일이지? 아라가 드디어 날 편하게 해 주는 걸까?
갑자기 땀 냄새가 코를 찌른다. 빨리 샤워를 해야겠다. 입·출력장치가 열린다.
“헉!”
다리가 후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감각이 없다. 팔로 겨우 땅바닥과 키스를 면했다. 설마라는 심정으로 뒤를 보니 다리는 붙어 있다. 설마?
“좋은 아침이에요, 진하.”
“좋은…… 아침은 무슨 좋은 아침! 아라 너, 설마 밤새도록 기마 자세를?”
“호호호! 기마 자세를 통해 진하의 몸의 변화를 살피기 위한 거예요. 최일권 씨에게도 밤새 기마 자세를 부탁해서 두 사람의 데이터를 비교했거든요.”
…….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게 명확하게 기(氣) 때문인지는 더 알아봐야 해요.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게 되었어요. 바로 기마 자세가 남자의 정력에 좋다는 얘기가 사실이라는 거예요. 하체의 힘과 아랫배에 정신을 두고 호흡을 함으로써…….”
그래, 정력에는 좋다는…….
이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잖아! 있어 봐야 쓰지도 못하고 있는데.
“정.아.라!!! 용서 못해∼∼∼!!!”
난 분노에 소리를 질렀다.
***
“아흑∼ 아흑!”
메이가 손을 댈 때마다 신음 소리가 나온다. 온몸이 전기가 통한 듯 짜르르 하고 묘한 쾌감이 든다. 메이드 휴머노이드 메이의 안마 솜씨는 훌륭했다.
아라의 잘못도 용서하기로 했다. 잊고 있었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해 준 대가이다.
의지(Artificial limb, 義肢)와 인공장기(Artificial organs, 人工臟器) 사업을 해 볼 생각이다.
“진하의 생각대로 의지와 인공장기를 연구해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진하가 제게 명령한 ‘인체 실험 절대 불가’를 취소하셔야 해요.”
허, 얜 왜 이리 융통성이라곤 전혀 없냐?
“내 말은 인간이 보편타당하다고 생각하는 범위에서 실험을 하란 말이야.”
“보편타당은 너무 기준이 없어요. 인간적이다 비인간적이다는 관점과도 유사해요. 지금 세계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는 실험들이 과연 보편타당하고 보나요?”
아라의 말이 맞다. NSA에서조차 얼마나 비인간적인 실험이 많이 행해지고 있던가?
아라는 폐쇄 시스템이 아닌 이상 전 세계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녀가 지금 연구소에서 실험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그러한 자료들을 참조하며 행해지는 것이다.
물론, 명백히 이러한 일 자체가 산업스파이 짓임은 분명하지만 남들 다하는 짓을 나만 고고한 척 안 할 생각은 없기에 아라의 그러한 행동을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실험에 대해선 결코 그들을 따라할 생각은 없다.
“그럼, ‘실험을 공개했을 때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범위 내’라는 기준은 어때?”
“역시 애매하지만 좀 전보다는 낫군요. ‘인간으로서의 최초한의 권리, 즉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고, 인간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실험은 가능하다’ 이것을 명령으로 받아드릴까요?”
“명(命)한다!”
“‘명령’을 수정했습니다. 차후 새로운 ‘명령’이 있을 때까지 지금의 기준으로 실험을 실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라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절대 명령이 처음으로 고쳐졌다. 잠시 기계적이고 딱딱하게 말하던 아라는 곧 평소 목소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굳이 의족, 의수를 새로 만들 필요가 있나요? 지금 나와 있는 것들도 충분하지 않아요?”
“아냐, 내가 사용해 봐서 잘 아는데 굉장히 불편해. 그리고 접촉면의 피부가 까지는 건 기본이고 생각대로 움직여 주질 않아서 조심조심 움직여야 한다고.”
“진하가 언제 사용해 봤어요?”
…….
주책스러운 입이다. 코리였을 때를 모르는 아라에게 무심코 말을 내뱉다니.
“아, 아니. 그냥 그렇다는 기사를 봤다고. 말이 헛 나왔네.”
“알았어요. 그럼, 오늘부터 진행하도록 하죠.”
다행히도 그냥 넘어가는군.
“아흑∼ 아흑∼”
그나저나 메이의 손에 은근히 중독이 될 것 같다.
***
환타지월드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며 더욱 바빠진 직원들과는 달리 난 여전히 한가했다. 그 한가한 시간을 취미 생활에 매진하고 있다고나 할까?
눈앞으로 정신없이 날아오는 손들과 틈만 나면 나의 중심을 무너뜨리려는 최일권의 다리 동작을 난 거의 무의식중으로 막으며 그에게 공격을 퍼붓는다.
“이크!”
변칙적인 공격. 다리와 허리의 힘으로 버티며 눕듯이 피했다. 하지만 수세에 몰린다. 대여섯 번의 공격을 막고 옆구리에 한 방 맞은 후에야 겨우 수세를 면한다.
알고 있다. 방금 한 방으로 난 깡통 물통처럼 처절하게 쓰러졌으리라는 걸. 그렇다고 아주 괜찮은 상태는 아니다. 상처가 욱신욱신 쑤시는 건 어쩔 수 없다.
다시 공방. 또다시 변칙 공격. 이번엔 오른팔이 잡히며 바닥에 뒹굴었다.
“항복, 항복!”
그제야 놓고 있던 오른팔을 놓는다. 잠시 서서 숨을 고르던 그도 자리에 주저앉는다.
“휴∼ 갈수록 힘들어지네요.”
“별말씀을요. 이번 대결에서만 전 여섯 번 죽었는걸요.”
“아뇨, 세 번이에요. 나머지 세 번은 기술이 들어가지 않았어요.”
“헤헤, 위로해 주시지 않아도 되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은근히 기뻤다. 날이 갈수록 운동 중독이 심해지나 보다.
“아뇨, 사실이에요. 정말이지 저도 무술에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진하 씨는 저보다 훨씬 천재군요. 아니, 괴물이에요, 괴물!”
“에이, 너무 높이 띄우시면 떨어질까 두려워요.”
“하하하, 지금 진하 씨의 실력이 한 달도 안 되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아무도 안 믿을 거예요. 저는 무술을 시작한 지 벌써 23년이나 됐다고요, 23년! 그런데도 이런 차이라면 제가 허탈해지죠.”
“다 잘 가르쳐 준 스승님 덕분이죠, 하하하!”
메이가 가져다준 음료수를 마시며 숨을 돌렸다.
“무술을 처음 배울 때 형(形)을 배우죠. 한 가지 무술의 형을 배우면 보통 일주일에서 한 달 정도 걸려요. 하지만 말 그대로 형만 기억하는 수준을 말하는 것이지 그 형이 완성되는 건 몇 년이 걸려요. 그 다음이 형을 실전에서 무의식중으로 사용하려면 또 몇 년이 걸려요. 그런데 진하 씨는 그것을 한 달 끝냈으니 문제죠. 아무리 과학적인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이런 실력 향상은 상식을 벗어난 거예요.”
최일권의 말대로라면 입·출력 캡슐이 괴물인 것이다. 형(形)의 경우, 테스터가 얼마나 정확하게 하느냐에 따라 결정 나지만 배우는 것은 하루면 가능하다.
밤새 입·출력 캡슐이 형을 반복하니 틀릴 수가 없다. 완성이라는 의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몸에 익게 연습하는 건 일주일이면 몸에 익는다.
무의식중에 사용이라는 부분이 우습게도 입·출력 캡슐의 장점이 되어 버린다. 내가 의식하지 않은 무의식속에서 밤새 연습하니 생각보다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
“하지만 진하 씨에게 단점이 하나 있어요.”
“뭐죠?”
“아까 저와 대련할 때 느끼는 점 없었어요?”
“있었죠. 못 보던 공격을 틈틈이 하시던데요. 그때마다 제가 얼마나 당황했다고요.”
“진짜 못 보던 공격일까요? 못 보던 공격이라도 잘 막던걸요. 실제로 중간 중간 진하 씨가 모르는 공격을 섞어 봤어요.”
음, 모르겠다. 자, 이제 사실을 말해 봐요.
“자, 저에게 찌르기나 발차기를 해 봐요.”
왜 설명은 안 하고 자꾸 딴소린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가 시키는 대로 지르기를 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들어와 가슴 앞에 손을 내민다. 이게 무슨 의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