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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 1권 (17화)
9.슬렘 지구 (3)


“자, 다시 한 번 더 해 보죠. 대신 진짜 빠른 속도로 해 보죠.”
난 힘껏 그를 향해 다시 주먹을 뻗었다. 그때, 아까처럼 살짝 숙이고 들어오는 최일권. 순간 뻗던 팔을 구부리며 팔꿈치 안쪽으로 그를 가격했다. 하지만 예상을 했을까 팔로 들어 막으며 한쪽으로 물러난다.
“제가 말했던 단점을 아시겠어요?”
“네, 알 것 같아요. 제가 하는 하나의 동작과 초식이 한 가지 공격과 방어를 뜻하지 않는다는 거죠?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그 말인가요?”
“맞아요. 머리, 어깨, 팔꿈치, 손, 허리, 무릎, 발을 모두를 상황에 맞게 사용할 수 있어야 흔히 말하는 고수가 되는 거예요.”
고수라……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왜 웃어요?”
“그냥 고수라는 말에 웃음이 나오네요. 하하하!”
“다음에 대련할 땐 조심해야겠군요. 단점도 사라질 테니까요. 살살 부탁해요, 고수님. 하하하!”
다음이라? 한 달간 그에게서 많은 것을 얻어냈다. 아라는 더 잡아 두고 싶어 했지만 내일 그의 동생이 퇴원하는 날. 한사코 퇴원을 하겠다는 최미호 때문에라도 더 이상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도 가고 싶어 하는 눈치. 이제는 보내 줘야 한다.
“형!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응? 그래도 괜찮을까……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 어릴 때 고생을 해서 늙어 보일지 몰라도 실제 나이는 어려요. 그리고 무술을 가르쳐 준 스승과도 같은 존재잖아요.”
“……그래. 남동생이 있는 것도 괜찮겠네. 하하하!”
내가 아는 누군가와 참으로 많이 닮은 그이다. 한참을 그와 수다를 떤다.
“자, 이제 샤워하러 가요.”
“그럴까?”
“참, 한 가지 말해 줘야 한다는 걸 잊고 있었네요.”
“뭔데?”
“오늘부로 테스트는 끝났어요. 그동안 고생했어요.”
“너, 설마?”
“아니에요. 테스트가 진짜 끝났거든요. 그리고 그동안 수고한 대가는 이미 받으셨죠?”
“……!”
묘한 표정이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형한테 얻어낸 가치는 그보다 훨씬 커요. 나중에 부족하다고 더 받으러 오지나 마세요.”
“……갚을게. 이 은혜 꼭 갚을게. 고맙다, 진하야.”
“형 동생 사이엔 그런 말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미호 좋아지면 한 번 놀러 와요. 제가 맛있는 것 사드릴게요.”
고맙다고 계속 말하는 형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축축함보단 따스함이 느껴진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이 많이 든 사람이었기에 이별은 쉽지 않았다.

***

2020년 통일전쟁 이후 통일정부는 북한 지역을 통제하며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고, 실업자들도 일자리가 넘쳐 나던 시기. 하지만 그 시기는 길지 않았다.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개발 이익은 기득권자가 가지게 되었고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실업자 수는 증가하였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은 하나둘 생존을 위해 대도시들이 쏟아내는 쓰레기장으로 모여들어 목숨을 연명하게 된다.
초극빈층지구, 흔히 슬렘 지구라 불리며 전국 13개에 이르는 거대한 쓰레기 도시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아라가 보여 주는 위성 영상을 통해 바라보는 슬렘 지구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열악해 보였다. 고전 영화인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보던 빈민가의 모습 그대로였다.
“300만이나 저런 상태로 있는데 정부는 뭘 하는 거야?”
“정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태예요. 저들 말고도 극빈층이 1,000만이 넘어요. 극빈층에 대한 지원도 완벽하지 않은 상태이니 초극빈층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죠. 문제는 극빈층 중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결국 초극빈층으로 자꾸 밀려난다는 사실이에요. 그것도 해마다 증가 추세예요.”
“아니, 그럼 초극빈층의 인구가 더 늘어나야 하는 거 아냐? 몇 년 전부터 자료에도 300만이라고 본 것 같은데?”
“슬렘 지구에서 한 해에 몇 명이나 죽는 줄 알아요? 대략적으로 5∼10만이에요. 죽거나 실종된 사람들이 대부분 주민등록 말소자라 막연한 집계지만 이곳의 생활을 말해 주는 숫자라고 할 수 있죠. 초극빈층이 늘지 않는 이유는 죽음으로 그 숫자를 맞추는 것뿐이에요.”
할 말을 잊었다. 단지, 멍하니 영상만을 바라본다.
천천히 세상을 바꾸자던 마음이 조급해진다. 내가 하루를 미루면 20여 명의 목숨이 사라진다니…….
“젠장!”
괜스레 화가 난다. 나에 대해 또 모르는 누군가에 대해.
“조급해 하지 말아요, 진하.”
“알아, 잘 안다고.”
한순간에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잘 안 된다. 그래,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서둘러 보자. 꽉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경기도를 지나 조금 더 차를 달리자 인적과 건물이 드물어진다. 밤새 아라가 무슨 실험을 했는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일권이 형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날에도 입·출력 캡슐에서 뭔가를 하더니 두 가지를 남겼다. 기에 대해 연구를 한다는 것을 알았는지 살기(殺氣)에 관한 것과 처음 보는 이상한 춤사위 같은 동작을 남겼다.
그중 살기라는 것은 실제 기(氣)라기 보다는 뇌의 일부분에서 일어나는 강력한 염원 같은 것. 일반인도 살기 발출이 가능할 것 같다며 내 뇌를 자극한다는 아라의 말을 들었지만 그냥 평소처럼 쿨하게 넘어갔었다.
하지만 살기에 관한 실험의 부작용인지 몸이 안 좋은 건지 두통이 계속되고 있다.

대도시에서 버려진 쓰레기를 실은 트럭들이 뿌연 먼지를 만들어 내며 앞에 달리는 것이 보인다. 이제 슬렘 지구에 거의 도착했나 보다.
두 갈래 길, 차량 유도용 신호봉을 든 사람이 차를 멈추라고 흔든다.
“어디 가십니까?”
“마을로 가려 합니다.”
“저쪽 길로 가면 됩니다. 외길이라 쉽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운전을 하는 경호원이 인사를 하고 차를 우측으로 꺾어 달리기 시작한다. 비포장도로라 차가 요동을 치며 머리를 흔든다.
5분여를 그렇게 들어가자 드디어 마을이 보인다. 장관이라기에는 뭐하지만 도로를 가운데로 두고 좌측과 우측으로 빽빽이 들어선 집 같지 않은 집들, 가을 하늘의 청명함은 쓰레기를 포함한 먼지바람에 회색빛이 인상적이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 경찰 지구대로 보이는 회색 건물이 보인다. 2명의 경찰관이 지나가는 우리 차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차를 멈추라는 듯 손을 흔든다.
차창을 열자 탁한 공기가 코를 자극한다.
“실례합니다. 처음 보는 차인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경례를 하며 실내를 싸악 훑으며 눈이 마주친다.
“알아볼 것이 있어 왔습니다만…….”
“그러시군요. 이곳은 워낙 위험 지역이라 처음 오시면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주민증을 건네자 기계에 일일이 넣었다 뺀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모르지만 해가 지기 전에 나오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혹 해가 져서 사고라도 당하신다면…… 저희도 어쩔 수가 없거든요. 오늘은 자원 봉사하시는 분들이 오셔서 괜찮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큰길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근데, 자원 봉사하는 분들은 어디에 계시죠?”
이곳에 자원 봉사 온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호기심이 들었다. 그냥 보는 것보다는 그들이 이곳 사정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물어볼 생각이었다.
“이 길 따라 쭈욱 들어가면 중앙 공터가 나옵니다. 그곳에 있을 겁니다, 그럼.”
“감사합니다.”
지구대의 크기를 보면 경찰관도 몇 명 없어 보인다. 그 인원으로 이 넓은 슬렘 지구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저들의 역할은 안에 있는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들어가는 사람들을 막고 보호하는 게 임무일 것이다.
지구대를 지나 판잣집과 판잣집 사이의 길로 들어섰다. 예상과는 달리 비록 비포장이긴 하지만 2차선은 됨직한 길이 이어졌다.
간간이 창밖으로 사람의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초점 없는 눈으로 지나가는 우릴 바라만 볼 뿐이다. 좀 더 들어가자 한쪽으로 주차된 차량이 보인다.
한쪽으로 주차를 하고 내리자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퀴퀴한 냄새와 회색빛 먼지다. 그리고 중앙 공터라고 예상되는 곳에서 들리는 웅성거리는 소리. 발길은 자연스레 그곳으로 향했다.
축구장 반 크기의 중앙 공터는 여기저기 쳐 있는 천막들과 바쁘게 움직이는 자원 봉사자들, 뭔가를 위해 길게 늘어선 주민들로 북적이고 있다.
“여기서 대기해.”
경호원들을 놔둔 채 북적이는 곳으로 향했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치료를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앞쪽에는 플라스틱 의자가 준비되어 있어 그곳에 앉아 있지만 뒷줄 사람들은 서 있거나 땅바닥에 주저앉아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낡고 헤진 먼지 묻은 옷들, 신체의 보이는 부분은 땟국물로 얼룩덜룩 까맣고,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냄새가 그들의 몸에서 퍼진다.
하지만 그것보다 팔다리가 없거나 더러운 천을 상처 부위에 감고 있는 사람들, 얼굴에, 팔에, 다리에…… 더러운 천에 까맣게 얼룩진 것은 피가 굳은 것으로 보인다.
“시바!”
뭔가가 울컥 올라오는 걸 욕을 하며 참아 본다.
“잠시만 비켜 주세요!”
뒤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한쪽으로 물러나며 말한 이를 보았다.
40Kg 쌀가마니 두 개를 어깨에 지고, 온 얼굴이 땀투성이인 그는 내 얼굴을 보곤 살짝 인상을 쓴 후 고개를 까닥이곤 빠른 걸음으로 한 천막으로 간다. 그를 뒤쫓았다.
한쪽 천막에선 수녀님들로 보이는 분들과 ‘사랑회’라고 적힌 파란색 조끼를 입은 자원 봉사자들이 음식을 만들고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손에 식판을 들고 밥을 먹는 중이었고, 그들 한쪽으로 식사를 기다리는 줄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과연 저 인원으로 저 많은 사람들의 밥을 해 먹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아까 쌀을 나르던 청년이 다시 한쪽으로 뛰어가는 모습, 난 그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아까 공터로 들어오던 입구 쪽에 이삿짐 차량처럼 보이는 커다란 트럭의 뒷문이 열려 있는 것이 보인다.
트럭 안쪽에 있는 청년이 땀범벅인 청년의 어깨에 쌀 두 가마니를 올린다.
“저도 도울게요.”
쌀가마니를 진 청년은 흘낏 나를 보더니 뛰듯이 사라졌고, 트럭에 있던 청년은 날 가만히 쳐다본다.
난 살짝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자. 청년은 ‘힘들 텐데…….’라며 쌀가마니를 올려준다.
헉! 엄청난 무게. 쌀가마니 두 개를 올리며 위에서 출발하라는 듯이 툭툭 치는 느낌이 든다. 젠장, 무술로 다져진 몸이라고! 이를 악물고 좀 전에 사라진 청년을 뒤쫓았다.
음식을 준비 중인 천막은 옆에서 지켜보는 것보다 훨씬 바빠 보인다. 영화에서 보던 전쟁터의 느낌이 드는 건 비단 바빠 보이는 것 때문 만은 아니었다.
“쌀은 저쪽에 통에 부어요.”
“물이 더 필요해요.”
“다 된 밥은 배식하는 곳으로!”
“국에 넣을 무와 고기는 아직 멀었나요?”
한쪽에 서서 지휘관처럼 모든 걸 총괄하는 수녀님은 전장의 장수 그 이상이었다. 큰 통에 쌀을 붓자 아까 쌀을 나르던 청년이 큰 봉처럼 생긴 물건으로 휘휘 젓기 시작한다.
“전 쌀을 씻을 테니 부식 좀 가져와요.”
퉁명스러운 말이었지만 악의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알았어요.”
난 이 바쁜 현장의 분위기 때문인지 날듯이 트럭을 향해 뛰어갔다.



10.슬렘 지구2 (1)


경호원 3명까지 일에 가세를 시키고 땀이 온몸에 흘러내린다고 생각했을 때쯤 일은 끝이 났다.
갑자기 환자들을 제외하곤 썰물처럼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지만 몸이 힘드니 묻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많이 먹어 둬……요. 저녁에 한 번 더 해야 하니까…….”
평소 먹는 밥의 두 배는 됨직한 식판의 밥을 보며 한숨짓는 내 옆자리로 누군가 와 앉는다. 아까 쌀가마니를 나르던 청년.
“네,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요. 이진하라고 합니다. 올해 스물이에요.”
“배동욱. 올해 스물다섯.”
무뚝뚝하기는. 문득, 숟가락을 드는 그의 손이 쉴 새 없이 떨리는 게 보인다. 왠지 묘한 감동이다. 한 숟갈의 밥을 입에 넣었지만 내가 힘들어서인지 원래 밥이 좋지 않은 건지 모르겠지만 거칠어서 잘 넘어가지 않는다.
“동욱이 형은 언제부터 자원 봉사했어요?”
살가운 내 질문에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내 흔들리는 손을 봤는지 피식 웃는다.
“중학교 때부터.”
“하시는 일은 뭔데요?”
“학생.”
“대학생요? 무슨 과예요?”
“사회복지학과.”
아놔, 이 사람 정말.
“개학하지 않았어요?”
“했지.”
“근데, 수업은 안 들어요?”
“……교수님한테 얘기했다. 빨리 밥 먹어. 설거지해야 된다.”
…….
내가 일꾼이야, 뭐야? 속으론 투덜대면서 숟가락질의 속도를 높였다.
산더미 같은 식판.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식판을 직접 설거지해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식판을 식기세척기에 일일이 넣어야 했는데 이 또한 노동 중에 노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