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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 1권 (18화)
10.슬렘 지구2 (2)
우웅∼
식기세척기가 굉음을 내며 돌아간다.
“자!”
“고맙습니다.”
커피 한 잔을 건네더니 따라오라는 듯 손을 끄덕인다.
공터에서 좌측으로 난 좁은 골목길을 들어가 살짝 꺾인 곳에 2∼3명이 서 있을 만 한 장소가 있었다.
“필래?”
그가 권하는 건 담배였다. 코리였을 때도 시가를 즐겨 피웠고, 진하 또한 어린 시절부터 담배와 술, 마약을 즐겼으니 별로 꺼릴 건 없었다. 오히려 그동안 왜 담배 생각이 없었는지가 의문이다.
“흐읍∼ 콜록콜록!”
“큭큭!”
눈물이 찔금 난다. 큭큭대는 동욱의 모습도 얄밉다.
“여긴 왜 왔냐?”
“네?”
“여긴 무슨 목적으로 왔냐고? 보아하니 좀 사는 집 애 같은데 말이야.”
“그냥, 여기에 대해 좀 알아보러 왔어요.”
“여기에 대해 궁금할 게 뭐 있어? 혹시 기부하려거든 봉사 단체에 하는 게 좋아.”
“왜요? 여기도 이곳을 이끄는 책임자들이 있을 거 아녜요?”
어이없는 표정으로 날 본다.
어이, 이유를 설명하란 말이야.
“휴∼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구나. 내가 간단히 설명해 줄게. 이곳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빈민가가 아냐. 여긴 한마디로 지옥이야, 지옥. 경찰들도 이곳에 일어나는 일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막말로 내가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그냥 ‘재수 없는 놈이구나’ 하고 넘어갈 뿐이야. 방금 네가 말한 이곳의 책임자라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이곳 주민들을 등쳐 먹고 사는 깡패들이라고. 사람들에게 기부금이라고 줘 봐야 그놈들한테 들어가는 거고. 봉사 활동하러 온 사람들이 이곳 사람들에게 많은 생필품을 넘겨줘 봐야 놈들에게 다 뺏기고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기 십상이야. 처음엔 우리도 이곳저곳에서 구한 물품을 이곳에 나눠 줬는데 헛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 그래서 그냥 1년에 두 번 간단한 치료와 밥 몇 끼 먹이곤 철수하는 거야.”
필터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곤 다시 담배 불을 붙이며 판짓집 지붕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보며 연기를 내뿜는 동욱. 난 의문점을 물었다.
“근데, 이토록 위험한 곳이라면 자원 봉사자들도 위험하지 않아요?”
“위험은 하지. 하지만 깡패들에 대한 위협은 없어. 우리가 오면 그들도 이득이니까. 주민들에게 나눠 주던 생필품을 일정 부분 그들에게 직접 줘 버리고 대신 안전과 주민들에게 자원 봉사하는 것에 대해선 그들이 눈감아 주지. 자원 봉사도 쉬운 게 아니라고. 참고로, 깡패들은 위험하지 않지만 주민들은 위험해. 절대 골목길에 들어가서는 안 돼!”
“그건 왜요?”
“내가 말했지, 여긴 지옥이라고. 네가 입고 있는 옷 벗기면 여기 주민들 며칠은 일 안 해도 될 걸. 그걸 위해서라면 널 죽일 사람이 널리고 널린 곳이야.”
말을 들을수록 기가 차다. 아라가 조사한 내용에도 몇 번 봤었지만 실감을 못했는데 이곳에 와서 이들이 사는 모습을 보니 각인되듯이 이해가 된다.
까악∼!
비명 소리. 분명 골목 안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소리다. 순간적으로 반응하여 골목으로 들어가려는 날 누군가가 붙잡는다.
“방금 내가 한 말 잊었어? 사람들 데려올 테니까 같이 가야 해.”
“형이 데려오세요.”
잠시 갈등하던 난 다시 들리는 비명 소리에 그의 손을 뿌리치고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미줄 같은 미로. 비명 소리가 더 들린다면 좋겠지만 누군가가 예상대로 위험한 상황에 쳐해 있다면 기대하는 것은 힘들 터.
“아라야, 위치 좀 부탁해.”
―좌로…… 우로…… 거기서 우로. 바로 거기예요!
아라가 가르쳐 주는 대로 빠르게 움직였다. 젠장! 막다른 골목이다. 여기서 우측이라면 이 벽 너머인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옆의 벽을 박차고 내 키보다 좀 더 높은 벽을 잡고 몸을 날렸다.
착지할 곳의 상태. 괜찮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수녀복! 적의 숫자는 다섯. 3명은 등을 돌리고 있고 앞에서 옷을 헤집는 녀석과 혀를 핥으며 쳐다보는 녀석.
땅에 닿기도 전에 혀를 핥는 녀석과 눈이 마주친다. 땅에 닿자마자 내려온 반동 그대로 몸을 앞으로 밀었다.
등을 돌리고 있던 녀석들도 혀를 핥는 녀석의 놀라는 모습에 뭔가 하고 고개를 돌린다.
입·출력 캡슐이 세상에 나온 지 5개월 남짓, 가상현실 속에서 난 얼마만큼의 결투를 했을까? 기억나지도 않는다.
본격적인 건 이용희와 김호철이 보내준 테스터들 이후의 일이지만 막싸움부터 무기를 들고 하는 싸움까지 안 해 본 것이 없었다.
다 대 일의 싸움도 많이 했다. 정확히 얼마만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나보다 많이 한 사람은 싸움에 미친 사람이거나 전장터에서 지금도 칼질을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 많은 싸움 중 내가 가장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은 ‘빠르고, 거침없이’라는 두 단어이다.
좌측에 고개를 돌리는 녀석의 목 부위를 정확히 끊어 쳤다. 그리고 오른쪽 녀석의 놀라는 얼굴을 바라보며 턱을 왼쪽 팔꿈치로 돌리던 힘 그대로 쳐올렸다.
혀를 핥던 녀석은 꽤나 싸움을 해 본 모습이다. 어느새 자세를 잡는다. 하지만 너 차례가 아니다.
수녀의 옷을 벗기려던 녀석이 바지를 반쯤 벗은 채로 일어나고 있었다. 기술이고 뭐고 없다 그냥 왼쪽 무릎을 겨냥해 로우킥.
콰직!
힘없이 부서져 버리는 다리. 그리고 그 힘으로 90도 정도 돌면서 남은 두 녀석을 경계했다. 한 녀석은 날카로운 쇳조각을 갈아서 만든 칼, 다른 한 녀석은 흡사 탐지봉처럼 생긴 긴 송곳을 빼 든다.
“너, 너 뭐야?”
송곳을 들고 있던 녀석이 입을 떼는 순간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다가가는 모습에 놀라설까 찔러 온다.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원을 그리듯 오른손을 놀려 녀석의 오른손을 잡아 바깥으로 비틀었다.
“아악!”
비틀리며 송곳을 놓친다.
인간의 손은 무척이나 약하다. 특히 바깥쪽으로는 인식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돌리면 순식간에 부러져 나간다.
가상현실에서도 자주 쓰는 수법. 순간 힘을 주어 돌리자 ‘뿌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팔이 뒤틀린다. 그 팔을 살짝 당기며 왼손으로 턱을 쳐올렸다.
혀를 핥던 놈만 남았다. 다리가 부러진 놈도 고통에 기절을 했는지 말이 없다. 뒷걸음을 치며 칼끝이 심하게 요동을 치는 걸 보니 이미 싸울 의사가 없는 듯 보인다. 난 그때서야 쓰러지듯이 누워 있는 수녀의 얼굴을 보았다.
“아라?”
아라일 리가 없다. 하지만 분명 누워 있는 수녀의 얼굴은 가상현실에서 보았던 아라의 모습이다. 순간, 머릿속 한 부분이 자극이 되었다. 아니, 아까부터 자극되어 오던 것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익! 사, 살려…… 큭!”
피가 튄다.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음에도 잔인하게 치고 또 친다. 현실인지 가상현실인지 모호해진다.
―……춰욧! 진하, 멈추라구요!
귓속에 들리는 아라의 목소리와 누군가가 내 팔을 하나씩 잡고 있었다. 그때야 눈앞에서 피거품을 내며 쓰러지는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맙소사, 내가 무슨 짓을…… 주위를 돌아보며 비로소 내가 한 짓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게 현실이라는 것도.
***
뭔가로 머리를 찌르는 듯한 두통, 끊임없이 흔들리는 두 손. 두 손에 묻은 피가 좀 전의 상황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왜 내가 그리 행동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현실과 가상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가?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그들에게 저질렀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를 저질렀으니 당연 벌을 받아야 한다고 머리가 외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이분법적인 사람이었나? 그들을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는 건가? 아님, 인간애라는 자체가 없는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난 이곳을 바꾸기 위해 왔다. 아까 동욱의 말을 들으면서 분명 이곳을 장악한 깡패들을 몰아낼 생각을 했었다.
그게 평화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님을 분명 알고 있었다. 이곳뿐 아니라 전국 모든 슬렘 지구에 경호원들을 투입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당연 경호원들과 깡패들의 충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벌인 일 따윈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평화적인 방법? 법에서조차 버림받은 지역이다. 그들이 설령 쫓겨난다 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다른 이들에게 똑같은 피해를 입힐 것이다. 그렇다면 난 어떻게 그 일을 해결하려고 했었지?
머리는 잔인하게 처리할 것을 종용한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가슴은 같은 인간으로서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을 해 봐도 뚜렷이 해결할 무언가도 떠오르지 않고 머리와 가슴이 자신을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누군가가 내 손을 잡는다. 언제 왔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다가오는 것도 느끼지 못하다니. 하얀 가운, 자원 봉사에 온 의사인가보다.
그는 말없이 나의 손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가 치료한다. 난 고개를 숙인 채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상처 입은 손은 어느새 어린이 캐릭터 모양의 밴드로 깨끗해졌다.
“목은 다 나았냐?”
목이라니? 내가 목에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아는 의사는?
“한대현 선생님?”
고개를 드니 예의 그 산도적 같은 얼굴이 웃고 있다.
내가 병원을 탈출한 후 제일 먼저 한 게 그 병원의 비리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감춰 둔 그 원장의 재산을 깔끔하게 빼네 사회단체에 기부해 버렸다.
그때, 이분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의사니 잘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역시 잘살고 계셨군요.
“넌 볼 때마다 사고구나. 그나마, 이번엔 자해가 아닌 게 다행이랄까? 아주 깔끔하게 부러뜨려 놓아서 치료하기 편했다.”
“죄송합니다.”
“뭐, 나라도 그런 상황이었으면 너처럼 행동했을 거다. 너무 걱정 말아라. 그쪽도 그리 문제 삼을 것 같진 않더구나.”
친절한 목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분이라면 내 문제의 답을 알고 있을까?
“저, 한 가지 질문해도 될까요?”
“뭔데?”
“선생님, 오늘 제가 한 일이 잘한 일일까요? 아님, 잘못한 일일까요?”
“음…… 글쎄,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지 않을까? 강한 힘을 가진 이가 그 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장난 따위가 도움이 되진 않겠지? 그냥 내 개인적인 생각을 말해 주마. 결과적으로 넌 잘했다. 네가 막지 않았다면 수녀님이 험한 꼴을 당했을 거야. 그들은 겨우 팔다리가 부러진 것뿐이야, 몇 달 고생하면 다 낫겠지. 법적으로 따진 다면 과잉 방어로 너의 잘못이겠지만 보편적으로 본다면 아마 너의 행동에 더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낼 거야. 네가 용기가 있다면 다음에도 그러한 일이 생긴다면 다시 똑같은 행동해 주길 바란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이지 않습니까? 과연 제가 인간을 벌할 권리가 있을까요?”
여전히 혼란스럽다. 그래서 내 생각과는 다른 일반적인 질문을 던졌다.
“넌 그들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니? 내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그 당시에 짐승이었을 뿐이다. 성욕에 굶주린 짐승. 넌 단지 인간을 물려고 한 짐승을 몽둥이질로 쫓아 버린 것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다.”
그런가? 그들은 짐승이었을 뿐인가?
“그럼, 그 짐승들이 인간이 되어서 치료를 하신 건가요?”
“난 아주 자주 수의사가 되곤 한단다. 조금 전까지 수의사로서 치료를 한 거지 결코 의사는 아니었다.”
“인권위에서 알면 노발대발하겠어요, 헤헤헤!”
“쉿! 비밀이다. 그 양반들 워낙 꼬장꼬장해서 내 밥줄을 끊으려고 할 거다.”
두통은 여전하지만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직까지 다른 것들이 혼란스럽긴 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를 한다.
“진하야, 네가 무슨 의도로 그러한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 말에 혹시나 편협 된 생각을 갖게 될까 조금은 걱정스럽다. 그래서 덧붙이고자 싶은 말이 있다. 네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의 깡패가 모두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살기가 더 좋아질까? 아님, 더 나빠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