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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 1권 (19화)
10.슬렘 지구2 (3)
“더 살기가 좋아지지 않을까요?”
“과연 그럴까? 내 생각으로 오히려 밤이 무법천지로 바뀌지 않을까 생각한다. 힘 있는 자들의 각축전이 시작될 거고, 한 지역을 장악한 집단에 의해 힘을 쓰지 못하던 양아치들이 설치기 시작하겠지. 흔히, 우리는 건달이니, 깡패니, 양아치니 구분해서 부른다. 본래 뜻과는 무관하게 비슷하게 부르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건달은 뭔가 정의롭고 양민을 위한 대의를 가진 채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처럼 묘사되고, 깡패는 폭력만을 행사하는 무리, 양아치는 못된 짓을 스스럼없이 행하는 쓰레기 같은 놈들을 말하지. 주먹을 쓴다고 건달이고 칼을 쓴다고 깡패고 총을 쓴다고 마피아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야. 그 집단이 행하는 것들을 기준으로 건달과 깡패, 그리고 양아치라고 구분하는 게 오히려 맞겠지. 나의 기준은 이렇다. 일반 시민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며 자신의 영역에서 이익을 도모하는 집단은 건달, 일반 시민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서 이익을 도모하는 집단은 깡패, 오로지 이익을 위해선 어떠한 일도 스스럼없이 않은 집단을 양아치라고 말이야. 이건 어둠의 세계에서 뿐 아니라 정치, 경제 모든 곳에서 통용되는 기준이 아닐까 한다. 너도 너의 기준을 세워라. 많이 배우고 많은 정보를 알아감으로서 천천히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세워라. 말이 길어졌구나.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어 난 가 봐야겠다. 여기가 요즘 내가 일하는 곳이다. 전화하고 한 번 와라, 술 한잔 살 테니까.”
어깨를 두드리고 나가려는 그에게 한 가지를 더 묻고 싶었다.
“선생님, 그렇다면 이곳을 장악한 이들은 셋 중에 어디에 속하는가요?”
“글쎄, 나도 그들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는데…… 환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셋 중에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할 것 같구나. 이들은 돈을 위해서 인간을 사고파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신체 장기도 팔아넘긴다더구나. 만일, 진정 그렇다면 이들은 해충이다. 완전히 박멸해야 할.”
건달, 깡패, 양아치, 해충. 이분법이 아닌 사분법이다. 하지만 확신이 서 있는 그의 말투에 왠지 부럽기도 하다. 나의 생각은 아니지만 참고할 만한 기준이라 생각이 든다.
“실례합니다.”
낯선 여자의 목소리. 고개를 들어 보니 아라를 닮은 수녀님이다. 경호원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다가온다.
“아, 어서 오세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더, 덕분에요.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 감사합니다.”
생김새는 정말 아라와 똑같다. 하지만 아라의 목소리가 성숙하고 섹시하다면 수녀님은 앳된 목소리다.
“별말씀을요. 여기에 앉으세요. 아직 충격이 다 가시지도 않았을 텐데…….”
“네.”
막상 맞은편에 그녀가 앉았지만 딱히 뭐라고 물을 말이 없다. 그래서 신기한 듯 쳐다보다 아라와 다른 곳을 한 곳 발견했다.
아랫입술 옆에 작은 점.
차이점에 빙긋 웃다가 눈이 마주쳤다.
“제,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 아뇨! 제가 아는 사람과 너무 닮아서……. 실례했습니다. 근데, 어쩌자고 그곳에 들어가셨는지?”
민망함에 화제를 돌렸다.
“한 아이가 어머니가 아프다고 저에게 도움을 청해서요. 여기에 오기 전 교육을 받았지만 워낙 정신이 없다 보니 그냥 생각 없이 따라가게 된 거예요.”
“그러셨구나. 정말 그만하기 다행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
할 말이 없다. 공통적인 화제라고 해 봐야 아까 사고에 관한 것인데 서로 얘기를 꺼내 봐야 좋을 것도 없었다. 어색한 시간. 쓸데없는 상상이 든다.
가상현실에서 아라의 모습은 사실 나의 이상형적인 모습이다. 무수한 여자 얼굴을 무의식중에 보여 줌으로서 나의 반응을 체크해 만든 모습이니 오죽하겠는가.
성형 수술로 얼핏 보면 모두 한 배에서 난 것처럼 비슷한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혹시 수녀님도 성형 수술…… 헙!”
“네? …….”
윽, 주둥이를 꿰매고 싶다. 생각이 정제되지 않고 입 밖으로 나오다니. 또다시 어색한 침묵.
“이제 가 봐야겠네요.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다행히도 그녀가 먼저 일어난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왠지 종교인에겐 이렇게 만드는 아우라가 있는 듯하다.
“저 자연 그대로예요. 그리고 타르실라 ……예요.”
“아, 네네, 전 이진하입니다.”
마지막 말과 함께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을 본다. 아무래도 성형 수술이냐고 물은 것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그나저나 마지막의 저 짓궂은 아이 같은 표정은 정말 아라와 똑같군. 타르실라 수녀님이라.
“뭐해?”
“아, 동욱이 형.”
참, 생각할 시간도 없이 들이닥치는군. 이 형은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하다.
“저녁 시간이다.”
“네?”
“쌀가마니 날라라.”
……. 그래, 먹고살 사람들은 살아야지. 이 형에게 뭘 바라는 내가 바보다.
“자.”
그가 건네는 핑크빛 빨래 장갑. 오, 날 위한 거요?
“쌀에 피 묻는다. 청결을 위한 것뿐이다.”
참, 무뚝뚝하군. 그래도 뭐 이것도 나름 괜찮지 않은가?
같이 가요, 같이∼
11.아바노이드 (1)
제2연구소에 만들어 둔 휴머노이드에게 가상 인물의 신분을 부여해 각 슬렘 지구로 보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정보 수집과 슬렘 지구의 정화. 특히, 정화 부분에 아라와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범죄에 대한 증거가 확보되기 전까진 보류하자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니까, 아라 너는 각국에 휴머노이드 공장을 만들고 싶다는 거지?”
“네, 아무래도 가상 인물이 많아질수록 빈틈이 많아지니까요. 현재 제2연구소에서 하루에 만들 수 있는 휴머노이드는 2대예요. 슬렘 지구에 각 다섯 대씩 65대, 제1, 2연구소 연구원으로 분한 휴머노이드가 75대, 주식 거래를 하고 있는 33개국에 각 한 대씩 33대, 이곳에 배치된 경호원 8대와 회계팀 4대, 총 185대의 휴머노이드가 있지만 사실 거의 국내의 일을 도맡고 있죠. 앞으로 생산될 분량도 진하가 추진하고 있는 고아원, 양로원, 소년 소녀 가장 등 그들의 생활을 파악을 위해서 배정되면 한동안 여유분이 없어요. 진하에게 얘기는 안 했지만 제1, 2연구소에서 소비되는 장비와 원자재는 대부분이 수입해 오고 있어요. 갈수록 많이 필요한데 현재로서는 가상 인물과 그들이 내세운 대리인만으로는 한계가 있더군요. 가상 인물들을 이제 휴머노이드로 대체시켜서 일을 진행해야 해요.”
아라가 이런 소리를 할 정도면 많이 힘들다는 소리인 것이다. 정보 차단도 한두 개일 때 완벽하게 없애는 것이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허점이 생기게 마련이다.
“좋아, 허락하겠어. 언제 정도면 휴머노이드가 나오기 시작할까?”
“1개월이면 충분해요.”
뭔가 이상하다. 공장 짓는 게 아무리 빠르다고 최소 3∼6개월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보낸 휴머노이드들이 어제부로 준비를 마쳤어요. 진하의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호호!”
내 표정을 파악하고 금세 변명이다. 공교롭게 어제부로 준비를 마쳤다니…… 설마, 이미 생산하고 있는 건 아닐 테지? 뭐, 지금 상황에선 오히려 잘된 건가?
“알았어, 그 문제는 이렇게 넘어가기로 하자. 현재 가상 인물들을 통한 국내로 자금 유입은 얼마나 진행됐어?”
“라이베리아, 파나마, 버뮤다, 버진아일랜드에 있는 페이퍼컴퍼니(서류상의 회사)를 통해 한국에 투자회사를 만들고, 약 3조원의 돈을 주식 시장을 통해 만들어 뒀어요.”
“그래? 잘됐네. 그럼, 올해는 그 돈을 몽땅 슬렘 지구와 불우 이웃 돕기에 써야겠어.”
“진하!”
“내 말대로 해 줘, 아라야. 아라의 말처럼 천천히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해서는 내 평생 슬렘 지구를 없애지 못할 것 같아. 네가 무슨 걱정하는지 알아. 자금의 출처에 대해 조사가 진행될까 봐 그러는 거잖아. 그거에 대해선 나도 생각해 봤는데 외국에서 돈을 많이 번 독지가가 한국의 실상을 보고 그냥 돈을 기부했다는 식으로도 가능하지 않겠어. 그 독지가가 돈만 던져 놓고 사라진다고 해서 지들이 어쩌겠어, 안 그래?”
“휴, 진하의 생각이 그렇다면 그대로 따라야겠죠. 알았어요, 그렇게 조작을 하죠.”
체념한 듯이 말하는 아라.
현재 아라가 불린 재산은 약 10조. 33개국에서 주식 투자로 모은 돈이다. 각국의 부동산과 이미 투자되어 있는 돈, 제1, 2연구소에서 소모하는 돈을 제외한다면 실상 운영할 자금은 얼마 남지 않게 된다.
그리고 지금 L&J소프트에서 벌어들이고 있는 막대한 돈도 새로운 사업과 연구소에 쓸 생각이라 아라의 걱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늦출 생각이 없다. 돈도 더욱 필요하다. 난 이미 결심하고 있던 말을 꺼냈다.
“대신, 지금까지 ‘공정하고 시장이 인정하는 타당한 범위 내에서 돈을 벌 수 있다’라는 항목을 삭제하겠어.”
“정말요?”
“그렇다고 그렇게 기뻐하지는 마. 내가 풀어 주는 건 주식 시장뿐이니까. 그리고 세계 경제 순위 51위권 이하 나라에 시장 교란을 통한 이익 창출은 금지…….”
“쳇! 제가 가진 돈으론 다른 나라들은 힘들다고요.”
“끝까지 들어. 주식 시장의 투기 자금에 대해서는 어떤 형식이든 상관없으니 돈만 벌어. 이러면 됐어?”
“그 정도면 괜찮네요. 후회 안 하죠?”
…….
“후회해. 추적 안 당할 정도만 해 줘, 부탁이야.”
“오호홋! 진하가 그토록 부탁하다면 들어줘야죠. 오호호호호∼!!”
……왠지 기분이 나쁘다. 하지만 돈이 필요하다. 돈을 버는 덴 아라만큼 훌륭한 애가 없다. 그래 참자, 참어. 으득!
“그럼, 다음 안건. 슬렘 지구 사람들을 다시 사회에 편입시키기 위한 방도에 대해 생각 좀 해 봤어?”
“했죠. 참, 3조원 투입 전까지 제가 운용해도 괜찮죠?”
“알아서 해. 무슨 방안이 있어?”
“네, 호텔업과 리조트 사업을 하는 거예요.”
“웬 뜬금없이 호텔업이야?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잖아?”
“하고는 있죠. 하지만 많이 부족한 실정이에요. 관광객 수에 비하면 형편없죠. 그리고 호텔업과 리조트의 경우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도 제가 선택한 이유예요. 건설할 때 노동자로 슬렘 지구 사람들을 쓰고, 그중에서 괜찮은 사람들은 직원으로 선발하는 거죠.”
“좋아, 그걸로 진행하자.”
난 아라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아라와 사업에 대한 여러 얘기가 오갔고, 그렇게 오전이 지났다.
“식사하세요, 사장님.”
메이의 말에 아침 식사를 하고 시작한 기마 자세를 풀었다.
“휴∼!”
기마 자세도 어느새 익숙해져서 땀이 비 오듯 오진 않는다. 수건으로 땀을 닦고 식탁으로 향했다. 큼직한 스테이크가 맛있어 보인다.
살기(殺氣)가 계속 발해지는 현상. 내 두통의 원인은 역시 아라의 테스트에 의한 것이었다. 아예 살기를 바깥으로 표출하거나 입·출력 캡슐에 들어가 아라의 도움으로 살기를 죽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기마 자세나 일권이 형이 남겨 두고 간 춤사위를 따라할 때를 제외하곤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날이 갈수록 더해지는 두통에 결국 방콕 신세가 되었다.
살기는 성격을 흉포하게 만들었다. 슬렘 지구 정화를 얘기할 때 발산하는 살기와 모두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내 자신에 대해 놀라야 했다.
그리고 심지어 식습관까지도 육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보니 요즘은 아예 사람과의 만남을 스스로 끊고 실내에서 두문불출이다.
아라는 자신이 꼭 원인을 찾겠다고 했지만 테스터가 나 하나인데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를 일이다.
차라리 범죄자들을 잡아다가 테스트를 해 볼까? 젠장! 빨리 밥 먹고 입·출력 캡슐에나 들어가야겠다.
***
가상현실 속에서의 싸움도, 게임 속에서의 레벨업도 지겹기만 하다. 희미한 은색빛으로 사라지는 몹(게임 속 몬스터)이 떨군 아이템을 줍기도 귀찮다. 주변을 둘러보니 몹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그들이 떨구고 간 아이템들만 반짝인다.
또다시 리젠되겠지? 앞쪽에 새하얀 불빛이 번쩍거리며 무언가가 나타나려 한다. 발에 힘을 주고 그곳에 주먹을 뻗었다.
“어머, 이제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할 정도인가요? 흑흑! 제가 빨리 치료해 드리겠어요. 그러니 제발 예전의 진하로 돌아와∼요.”
이 가증스러운…….
“손이나 놓고 얘기햇!!”
비틀린 손을 그제야 놓아 준다.
“좋은 소식이 있어서 냉큼 달려왔더니 보자마자 주먹질이라니 아라는 슬퍼용∼! 흑!”
“그만하지?”
“알았어요, 진하가 심심할까 봐 웃음이나 주려고 한 행동인데…….”
점점 줄어들더니 뒷말이 결국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뒷말을 알 것 같다. 이것이 요즘 다시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이야?
네 정녕 권주를 마다하고 단매를…… 이건 아니다.
“좋은 소식이 뭔데? 드디어 원인을 알아낸 거야?”
“아뇨, 대신 밖으로 나와 볼래요?”
아니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정말 예쁘지만 않았어도. 그래도 좋은 소식이라니 다행인 건가? 난 재빨리 접속을 종료하고 입·출력 캡슐을 열었다.
“짜잔!”
방 안을 울리는 아라의 장난스런 목소리. 그것보다 입·출력 캡슐 앞에 이 두 녀석은 뭔가? 한 녀석은 완전 제비다. 흡사 잘생긴 서양인과 동양인을 섞어 놓은 이목구비, 늘씬한 체형. 인형 같은 놈이다.
다른 한 녀석은 딱 봐도 열혈의 무술가, 잘생긴 갱단 행동대장, 젊었을 때 놀았던 놈처럼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