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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 1권 (20화)
11.아바노이드 (2)


“이 둘은 뭐야? 이놈하고 싸우면서 놀라는 거야? 아님, 이 녀석과 사귀라는 거야? 차라리 예쁜 아가씨들이나…….”
“어머나, 진하의 상상력이 이 정도로 빈곤하다니. 아무래도 공부와 자료가 많이 필요하겠어요.”
또 머릿속에 잡다한 지식을 쏟아 넣을 참이냐?
“아냐 아냐, 농담이다. 근데, 이 둘은 휴머노이드처럼 보이는데 이게 좋은 소식이야?”
“그럼요. 아주 특별한, 진하만을 위한 휴머노이드거든요. 바로 미래의 궁극의 기술, 아라가 진하를 위해 준비한 ‘그래, 놀아 보자’ 프로젝트의 결정판! 원격 휴머노이드, 일명 아바타 휴머노이드 줄여서 아바노이드랍니다.”
짐작이 간다. 내가 좋아하던 배우 부르스 윌리엄이 주연한 세로게이트라는 영화를 아라가 본 게 틀림없다.
“기쁘지 않나요? 진하가 심심해하는 것 같아 만든 거예요.”
“기뻐, 정말로 기뻐. 어차피 살기가 해결된다고 해도 밖에 나돌아 다닐 수 없잖아. 고마워, 아라야.”
“천만에요, 진하. 진하 생각하는 건 저밖에 없죠? 호호호!”
금세 목소리가 슬퍼졌다가 다시 밝아진다. 너 그러다가 엉덩이에 털 난다.
생각해 보면 경호원 없이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 은근히 마음을 설레게 한다.
코리였을 땐 항상 어두운 곳에 박혀 생활했고, 이 몸을 얻은 후에는 테스트로 참여했을 때를 제외하곤 혼자 놀러 다닌 게 한 손으로 꼽힌다. 어찌 보면 참 불쌍한 인생이다.
“어떻게 작동하는 거야?”
“입·출력 캡슐에 들어가 아바노이드1, 아바노이드2 중 하나를 선택하면 돼요.”
역시나 입·출력 캡슐인가? 입·출력 캡슐로 들어가 아바노이드1을 생각했다. 순간 어둠으로 쑤욱 빨려간다. 그리곤…… 아! 눈을 감고 서 있는 느낌.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입·출력 캡슐이 있다. 마치 로봇처럼 둘러싸인 내 모습이 보인다. 비록 눈 있는 곳밖에 보이지 않지만 생경하다. 다가가 입·출력 캡슐을 만져 본다. 신기하다.
근데, 뭔가가 이상하다. 뭐가 이상할까? 비록 아바노이드의 몸이지만 약간의 어색함 말고는 이상할 게 없다. 그럼, 뭐지?!!
“아라야, 내가 움직이는데 왜 입·출력 캡슐은 움직이지 않지?”
“아바노이드는 작동 방식이 달라요. 물론, 동일하게 만들 순 있지만 그래선 속도에서 차이가 나더라구요. 지금도 진하의 생각과 조금은 괴리감이 있을 거예요. 물론, 자동으로 싱크를 맞추게 되니 조금만 지나면 어색하지 않게 되지만 0.04초 정도의 괴리감은 있으니까 이해하세요.”
“그냥 아바노이드의 경우는 뇌만 사용한다는 거구나.”
“맞아요.”
항상 가상현실에서 몸과 같이 움직였으니 이 역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했었나 보다. 아바노이드로 있을 땐 아라에게 괴롭힘을 안 당하니 그나마 좋군.
끼이잉!
갑자기 입·출력 캡슐이 움직인다. 설마…….
“노느니 뭐해요. 기(氣)도 테스트할 겸 108식(아라는 일권이 형이 남긴 춤사위를 이렇게 부른다. 동작을 분석하면 108개의 동작이 나온다나 뭐라나)이나 기마 자세를 해야죠.”
눈앞에서 덩실거리는 듯 춤을 추는 내 모습이 불쌍하게 보인다.
아라가 노는 걸 볼 위인이 아니었다. 춤을 추는 나에게서 돌아섰다. 이제 아바노이드를 살펴볼 차례.
호주머니를 뒤지자 지갑과 열쇠 꾸러미가 나온다. 지갑에는 돈과 신용카드 그리고, 신분증이 있다. 신분증에는 차인호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지갑을 넣고 열쇠를 살펴보았지만 어디의 열쇠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 열쇠는 뭐야?”
“제 선물이에요. 하나는 숙소 열쇠, 또 하나는 숙소에 있는 선물 열쇠, 나머지 하나는 주차장에 있는 선물 열쇠예요.”
…….

“네 선물이다! 생일 축하한다, 코리야.”

환한 얼굴로 들어오셔서 작은 나에게 큰 선물 박스를 안기시던 양아버지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다시 한 번 뵙고 싶어진다.
“고마워, 아라야.”
“진하가 기뻐하니 제 마음이 더 기뻐요.”
미운 짓만 하던 녀석이…….
“자, 그럼. 나만의 가상현실을 즐기러 가 볼까?”
양부모님의 모습을 지우며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밀턴 형님과 샤라 누님은 잘 계시나 모르겠군.
지하 주차장에 내려와 아라의 선물을 확인했다.
검은색과 진한 회색으로 절묘하게 조화된 바디와 은빛 스틸로 된 의자 위에 그보다 진한 갈색 시트. 속도보다는 안정성을 위해 무게감이 있어 보이지만 디자인만으로 날렵하게 느껴진다. 손잡이를 잡아보니 클립감도 훌륭하다.
아라의 선물은 오토바이였다. 정확한 명칭 따위는 모르지만 한눈에 봐도 멋져 보인다. 타고 달리면 정말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오토바이를 타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아라가 이걸 선물했다는 것은…… 큭!
역시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데이터들. 그래, 이제는 탈 수 있다. 흡사 이 오토바이를 수십 번 몰아 본 느낌마저 든다.
“고맙다.”
―천만에요. 아흥∼
마치 머릿속에서 말하는 것 같은 아라의 음성. 아바노이드의 귓속에 담긴 도청장치를 제거해야 할 텐데.
어쨌든 이제는 탈 수 있게 되었으니 선물을 즐기는 일만 남았다.
조작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냥 당기면 되는 오토바이였다.
열쇠를 홀에 대자. 작은 기계음과 함께 은빛 스틸 한 부분이 열린다. 사실 특별히 필요 없는 기능임에도 디자인적인 요소로 삽입한 장치들이 형형색색의 모양을 뽐낸다.
오토바이에 앉자 이 오토바이의 장점을 알 수가 있었다. 이건 마치 몸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다.
모든 것이 준비 완료. 그런데 어디를 가지? 이왕이면 잘 뚫린 길을 가고 싶다. 그래, 얼마 전 TV에서 본 청평호로 가자.
“청평호!”
반투명한 내비게이션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자, 출발해 볼까?
―헬멧 쓰세요. 법을 준수해야죠. 의자 밑에 있어요.

망할! 폼을 있는 대로 잡았는데…….

***

부우우우우우우웅!
전기 엔진 특유의 소리가 뒤쪽에서 들리고 시원한 가을바람이 옷을 날린다.
위이잉∼ 위이잉∼
차 옆을 지날 때마다 들리는 소리 또한 경쾌하기만 하다. 분명 차 안에 있는 이들은 날 욕하고 있으리라. 실제 내 눈으로 본다면 어떨지 모르지만 아바노이드의 눈으로 본 세상은 맑고 깨끗하며 도로 위에 있는 작은 돌멩이마저 보인다.
시속 200Km가 넘어가는데도 좀 더 좀 더라는 듯이 액셀러레이터를 당기고 있는 내 모습. 속도광들이 속도에 열광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가을의 청평호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붉게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들과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수면은 보는 것만으로도 심신의 안정을 줬다.
호수를 빙 돌아 난 도로를 천천히 감상하며 돌아본다. 멀리 호수를 경주하듯 달리는 요트 3대가 보인다. 하얀 포말을 날리며 순식간에 스치듯이 요트들이 지나간다.
재밌겠다. 오토바이와는 또 다른 느낌일 것 같다. 요트가 사라진 방향으로 속도를 높였다. 맞은편에 요트 선착장이 보인다.
요트 선착장은 2개가 있었다. 한 곳은 사유지라는 간판에 위협적인 글이 적혀 있고 경호원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철문 안쪽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다른 한 곳은 다행이도 수상 레져를 즐길 수 있는 곳.
“죄송합니다. 오늘은 영업 안 합니다.”
여름 동안 얼마나 햇볕에 노출이 되었는지 피부 빛이 흑색에 가까운 사내가 날 보자마자 영업을 안 한단다.
영업 시간을 알리는 푯말에는 분명 쉬는 날은 아니다. 하지만 주인이 안 한다는데 뭔 말을 하겠는가?
“네에. 혹시, 다른 곳은 없나요?”
“밑에 있는 여섯 곳도 아마 오늘은 영업 안 할 겁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마음이 동하던 일이라 섭섭하긴 했지만 미련을 접기로 했다.
“잠깐, 호수 좀 구경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위에서 보는 화면과는 좀 색다를 거요.”
흑색 피부의 사내 말처럼 이곳에서 보는 풍경은 위에서 보던 것과 또 달랐다. 물 위에 떠 있는 선착장으로 나가니 시원한 바람이 나를 반긴다.
산의 중간 중간에 보이는 펜션과 별장들이 거슬리긴 했지만 산과 호수가 만들어 내는 모습에 멍하니 자연을 느껴 본다. 멋있고, 화려하고, 눈을 사로잡는 가상현실에 비하면 평범하지만 이 나름대로 충분히 아름다웠다.
“커피 한 잔 드실려우?”
뒤돌아보니 커피를 건네는 흑인이 보인다. 커피를 들고 아프리카산 원두인지 확인해 본다. 하지만 1회용 커피다. 물론, 이 커피도 맛있다. 하지만 아바노이드의 몸으로 맛을 느낄 수 있을까?
“맛있네요!”
아바노이드가 음료를 마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아바노이드를 통해 내가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자체도 놀랐지만, 커피 맛이 정말 좋았다.
“내 10년 노하우지.”
하얀 치아를 보이며 엄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뽐낸다. 자랑스러워할 만큼 커피 맛이 좋았다.
“서울에서 오셨수?”
“네.”
“먼 길 온 손님이라 태워 주고 싶은데…… 이해하슈.”
그의 눈길이 닿는 곳은 개인 소유의 선착장. 이해가 되었다. 부유한 이들이 오늘 하루 이곳과 다른 레져 센터를 산 것이다. 그들 때문에 요트를 탈 수 없어 기분은 조금 상하지만 그게 끝이다.
진하의 기억 속에도 카페나 술집을 통째로 빌리는 기억이 있다. 그것이 과시욕보다는 괜히 얼굴이 알려지고 남의 구설에 오를까 봐 그러는 것임을 안다.
“실례합니∼다앙.”
남성이 여성의 고음을 낼 때 들리는 중성적인 목소리. 거기에 살짝 들어간 비음. 뒤돌아보니 여성호르몬의 과다 분비가 문제인 남자가 보인다.
하늘거리는 와이셔츠에 7부바지, 산발처럼 보이지만 묘하게 패셔너블한 머리, 흐느적거리며 걷는 모습까지 누가 봐도 나와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게이?!
“얼음이 있으면 좀 얻을까 해서 왔어∼용.”
“잠깐만 기다리슈.”
흑색 피부의 사내가 사무실로 들어가자 게이로 보이는 사내는 팔짱을 끼고 왼손가락을 오른 볼에 대며 흥흥거린다. 몸까지 흐느적거리는 모양새를 보니 나름 노래를 부르나 보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동그랗게 커지는 눈. 뭘 보슈?
“어머, 어머, 어머, 어머! 이 오빤 누구양?”
오빠 아니거든. 형님,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마치 품평회에 나온 귀부인마냥 고개를 요리조리 갸웃거리며 아래위를 훑는다.
평소 여자들에게 행하던 나의 무의식적인 행동이 얼마나 상대방에게 나쁜 기분을 느끼게 하는지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곳을 벗어나야겠다.
하지만 오토바이가 있는 곳으로 가려면 그를 지나가야 했다.
“잠깐, 자암깐∼”
제발 그냥 보내주세요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다른 의도로 받아들인 게 분명하다.
그가 팔뚝을 살포시 잡는다. 난 그를 떼어내진 않았다. 다민족국가이면서 별별 사람들이 다 있는 미쿡에서 살았으니까.
“무슨 일이죠?”
“이 오빠 맘에 드넹∼ 여기서 아르바이트해요?”
난 분명 냉정하게 끊는 목소리로 말을 했는데 이 사람은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망할 아바노이드 같으니라고.
생긴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어.
“아뇨, 요트라도 타 볼까 해서 들렀어요. 하지만 오늘은 영업을 안 한다니 별수 있나요?”
“그랬구낭. 이거 괜히 내가 미안해지능 걸∼”
놔! 놓으란 말이야! 여성 호르몬이 많이 분비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꽈악 움켜진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호기심을 채워 줄 때까진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근데, 학생? 아님, 마델?”
“영국에 있다가 잠깐 들어왔어요.”
“유학생이구낭. 혹시, 연예계에 관심 있음 연락해엥∼ 이 정도면 마델로도 괜찮겠당.”
오빠 소리보단 반말이 한결 편하다.
그가 건네는 명함에는 ‘Christian Cho’라는 금색 선이 휘갈김 체로 적혀 있었다. 드디어 갈고리(?)를 푼다.
난 오토바이를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잠깐, 자암깐∼ 아무래도 불안하다, 얘. 나가자마자 명함을 버릴 것 같앙∼”
헐, 이 사람 독심술도 배웠나 보다.
“전 연예인이나 모델에 관심 없어요.”
“어머, 어머, 얘, 얘! 그건 죄악이야∼ 이 정도의 몸을 가지고 그러면 남들이 욕해.”
온몸을 주물덕거린다. 진정 내가 죄악을 저질러야 정신을 차릴 테냐!!!
“안 되겠다∼ 꼭 연락 준다고 약속행∼ 아니, 아니. 차라리 너 연락처 나한테 주라∼ 내가 연락할게.”
머리가 아프다. 차라리 전화번호를 던져 주고 가고 싶다. 하지만 전화 자체가 없다.
“반드시! 꼭! 기필코! 절대로! 전화 드릴게요.”
“아항! 그래 꼭 그래야 해.”
…….

떨어져! 이 변태! ……흐, 흑인 아저씨,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욧. 절대…… 절대! 그런 거 아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