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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 1권 (21화)
12.해충 (1)
전 세계가 환타지월드에 빠졌고, 난 아바질에 푹 빠졌다.
차인호가 되어 영화도 보고, 길거리 공연도 보고, 홀로 쇼핑센터에서 쇼핑도 해 보고 매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살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지지부진이지만 그래도 화가 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됐구나 싶어 아바질에 열중했다.
그중에 새로운 사업 아이템도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무비메이커(Movie Maker).
아라에게 내가 생각한 것을 설명했다. 그녀의 대답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상현실 게임 하나를 만들 때 한 달이 걸리지 않는 아라였다. 물론, 시나리오와 기본적인 컨셉이 정해져 있는 경우에 한하지만, 시나리오를 좋은 걸로 구하면 그뿐이다.
“어떤 장르로 할 생각인가요?”
“성인……은 안 되지? 연령층도 한계가 있으니까. 액션으로 하자 액션.”
성인물을 찍으려 했지만 괜스레 찔려서 말을 돌렸다.
“액션보다 환타지 쪽이 어때요?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판타지 소설을 읽었는데 괜찮은 소설들이 많더라구요. 외화의 경우를 보더라도 자국의 소설을 영화화한 경우가 많잖아요. 그리고 외국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고 재밌는 작품들이 많아요. 그런데 한국 소설에 대해선 어째 부정적인 면이 많더라구요. 이 기회에 한국 소설도 알릴 겸 좋잖아요?”
“그래?”
좋은 생각이었다. 약간의 각색이 필요하겠지만 한국 소설도 알리고 돈도 벌고 일거양득이었다.
“좋아! 그럼, 판권을 사들이자. 나중에 가격이 오를 수 있으니 이참에 괜찮은 소설의 판권은 죄다 긁어 오고. 성공하면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를 테니.”
바로 일을 시작했다. 예상외로 판타지 소설을 출판하던 회사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작가들도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거나 전혀 다른 계통의 일을 하다 죽은 경우도 있었다.
사람을 찾는 게 어려웠지 판권을 사는 일은 정말 쉬웠다. 적은 돈에도 순순히 허락을 한 것이다. 오히려 그 말을 듣고 나중에 책을 재출판할 땐 수익을 5:5로 나누기로 계약을 다시 해야 했다.
일단 어려운 작품보다 재밌는 작품을, 액션이 많이 들어가고 볼거리가 풍성한 작품을 선택했다. 첫 번째 작품으로 선택된 소설은 무수한 역작을 낳았던 ‘쥬신’이란 작가의 ‘천마악’이었다.
각색을 했다. 너무나 마초적인 분위기를 완화시키고 내용을 좀 더 압축시켰다. 이 영화가 성공한다면 2부까지 만들 요량으로 단락을 나누었다.
모든 작업은 아라의 몫, 나는 옆에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며 거들 뿐이다.
문제는 배우였다. 배우를 쓸 필요가 없다고 좋아했지만 살짝 고민이 되었다.
“배우는 누가 좋을까?”
“그냥 만들어서 찍기로 했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이름 있는 사람이 낫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 그냥 멋지게 만들었는데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나오면 곤란하잖아.”
“진하는 ‘랜덤녀, 랜덤남’ 사건 몰라요? 워낙 사회적인 파장이 커서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몰랐군요.”
“뭐, 랜덤녀? 랜덤남? 뭔 소리야?”
아라의 설명을 듣고 실소가 나왔다.
내용인즉, 환타지월드의 게임 중 ‘드림오브카’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차를 사면 옵션이라는 명목으로 남자에겐 여자를, 여자에겐 남자를 한 달 기간제로 준 것이다.
여성 단체에서 들고 일어났지만 신경도 안 쓰던 것이 한 여자의 소송으로 연일 방송을 타게 되었다.
옵션으로 준 여성이 자신과 외모적으로 닮아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고 우리 회사를 상대로 거액의 소송을 한 것이다.
물론, 게임 중에 손을 잡는 것은 허락되지만 가슴을 만진다든가 야한 행동을 할 수는 없었기에 우리 회사는 반발했다.
우리와 계약했던 법무법인이 할 일이 생긴 것이다.
소송은 연일 화제를 몰며 방송에 나왔다. 우리 측 주장은 모든 것이 프로그램상에서 랜덤하게 모델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80억이 넘는 인구 중에서 비슷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듯이 게임상에서도 그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증거로 소송한 여자와 비슷하게 생긴 여성들을 증인으로까지 채택했다.
어쨌든 결과는 일부승소. 게임상의 캐릭은 삭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피해 비용은 없다라는 판결이 났다.
그런데 재판 중에 랜덤하게 얼굴을 만드는 프로그램이 이상하게도 그 여자와 비슷한 얼굴을 너무나 자주 만들어 낸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녀와 너무나도 닮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붙은 별명이 ‘랜덤녀’가 되었다.
너무나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얼굴이라는 뜻의 신조어가 탄생한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랜덤남’도 있었는데 이 남자의 경우 오히려 이를 이용해 방송계 스타가 되어 버렸다. 물론, 회사에서 약간의 손을 쓰긴 했단다.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게임상의 캐릭터와 비슷하게 생겼으면 우리 회사에 삭제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아주 간혹은 있었지만 대부분이 삭제를 요구하지 않았다. 게임상의 캐릭터와 비슷하다는 건 기본적으로 미남미녀라는 소리와 같은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럼, 특별히 문제는 없다는 거네?”
“그렇죠. 하지만 이미 유명인이 된 연예인과 80% 이상 비슷하면 삭제하는 프로그램을 추가시켰어요. 제가 하는 일이 늘었지만 대신 배우로 쓸 캐릭터를 만드는 일은 더 쉬워졌죠.”
“그렇다면 한 번 선택해 볼까?”
아라가 펼치는 화면에서 주요 배우들을 소설 속의 인물들과 맞게 고르는 작업을 시작했다.
몇 시간의 노력 끝에 내 맘에 드는 사람들을 골랐지만 여주인공의 경우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주인공은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는군.”
“평면적으로 봐서 그럴 수 있어요. 그리고 지금 고르는 건 순전히 진하의 취향이구요.”
“하긴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긴 하지. 하지만 일단은 주요 배역이 다 서양인이라고. 그래서 고르기가 더 힘들어.”
“차라리 제가 할까요?”
광고에도 나왔으니 그래도 되겠다 싶다. 타르실라 수녀님이 아라와 닮았지만 문제될 것 같지는 않다.
“그래, 아라의 모습에 머리 색깔만 바꿔서 보여 줘.”
화면의 모습은 정말 딱 내 취향이었다.
“좋아, 아라가 여주인공 맡으면 되겠다.”
“순전히 진하의 취향이라니까요.”
“음, 가슴을 조금만 더 키워 보겠어?”
“변태!”
최근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더니…… 쓸데없는 단어를 쓰는군. 어쨌든 모든 인선을 마쳤으니 촬영에 들어가야 했다.
***
“스탑! 스탑!”
벌써 10일째, 이 영화를 몇 번을 봤는지 모른다. 가상현실에서 아라가 만들어 놓은 모든 영상을 단지 편집만 하면 끝이었다.
정말 실제와 같은 화면에 피 튀기는 장면 하나하나까지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배우들의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는데 막상 편집을 하고 나면 집중이 안 된다.
“잘 안 되나 봐요?”
방금 전까지 화면에 있던 아라가 튀어나오며 괴상한 장면을 연출한다. 여기는 가상공간, 불가능한 것은 없다.
하지만 촬영이나 편집 자체는 내 능력으로 불가능이었다. 아라가 머릿속에 입력해 주는 영화 촬영 기법 따위를 아무리 봐도 조금 나아질 뿐 만족스럽지 못했다.
최초에는 아예 가상현실의 공간에서 직접 보는 방법을 택하려 했지만 전투 때를 제외하곤 도저히 집중을 할 수 없는 구조였다. 도망가는 주인공을 언제 쫓아가면서 보라는 말인가?
그래서 최근 영화의 트렌드인 4D영상을 염두에 두고 찍기 시작했다. 4D보다 더 사실적으로 화면에 내보일 순 있었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안 되겠다, 아라야. 난 예술적인 재능은 없나 봐. 네가 영화처럼 한 번 만들어 봐.”
“알았어요.”
아라도 모두 알고 있는 수많은 촬영 기법과 엄청난 양의 TV를 보아 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편집한 영상의 전투신은 압권이었지만 뭔가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 슬슬 지쳐 간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그냥 내보내자, 응?”
결국 나의 종잇장 같은 인내심이 찢어졌다. 하지만 아라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수많은 소설들을 읽고, 학생들이 공부하듯이 영화와 관련된 책들을 수도 없이 봤으니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작품(?)에 대해 애정이 깊어 보인다.
“안 돼욧! 아무래도 2%로 부족한 것 같아요. 세계 최초의 완전 가상현실 영화란 말이에요. 역사는 영화감독 ‘정아라’를 기억하게 될 거라고요.”
…….
얘가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다. 아무리 영화가 히트를 쳐서 크게 이름을 날린다고 해도 실체를 보여 줄 순 없잖은가? 나의 의문은 곧 풀어졌다.
“얼굴 없는 여성 영화 감독 정.아.라! 얼마나 로맨틱해요.”
왜 거기 로맨틱이 들어가냐. 이 영화는 결코 로맨틱 영화가 아니다. 한마디로 초 슈퍼 울트라 판타스틱 앤 다이나믹 액션 블록버스터급 액션 영화다.
아마 섬세함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은 여성 감독으로 이름을 날릴 것이다.
난 차마 이 말은 하지 못했다. 지금도 손가락이 들어가지 않는 튼튼한 다리와 육체가 아마 강철로 바뀔 정도로 혹사시킬 테니까.
“그럼, 직원들에게 보여 주자. 그리고 감상문을 받아서 그 부족한 2%로를 채우면 될 거 아냐?”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긴 하네요. 그럼, 이번 주에 회의실에서 상영하도록 해 보죠.”
“그래!”
이제 해방이다.
“참, 광고는 언제부터 시작할 거예요? 광고를 원하는 사람들의 전화 때문에 업무를 못한다고 난리에요.”
환타지월드의 게임 중 ‘리얼월드’의 맵 크기는 중국만큼 커졌다. 하지만 접속했을 때 시작되는 지점은 다섯 곳. 대광장이라 할 이 시작점에 광고를 원하는 이들이 있었다.
게임 시작과 함께 문의는 있었지만 지금까지 이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결재도 해 주지 않았다. 이유는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가격. 아주 날로 먹으려는 이들이 많았다.
지금은 그들이 제시하는 가격이 높아졌다. 하지만 TV 광고보다 여전히 낮다. 그래서 리얼월드의 힘을 보여 주고 싶어졌다. 아라가 만든 영화가 그 힘을 보여 줄 것이다.
전 세계인이 접속하는 리얼월드의 힘을.
“네가 만든 영화 상영 후 결과를 지켜보다 시작할 생각이야.”
“그래요? 준비해야겠네요. 그럼, 원래 계획대로 경매 식으로 팔 거예요?”
“당연하지. 난 아라가 만든 걸 싸게 팔 생각은 없다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영화가 실패하면 값싸게라도 팔 생각이다. 너무 오래 사용하지 않으면 똥이 된다는 진리가 있지 않은가.
업무에 대한 얘기를 마치고 차인호로 분하기 위해 캡슐로 향했지만 아라의 말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슬렘 지구에 대한 조사 결과가 나왔어요.”
심장이 두근거린다. 설렘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예상과 맞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이었다.
“입·출력 캡슐 안에서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 그냥 이곳에서 볼래.”
무얼 걱정하는지 알았지만 이번만큼은 현실을 직시하고 싶었다.
두통이 일어나긴 했지만 예전만큼 아픈 것은 아니었다.
의자에 앉아 잠시 심호흡을 해 본다. 며칠 간격으로 아라는 내게 슬렘 지구의 정보를 보여 주긴 했었다.
휴머노이드들이 각 슬렘 지구에 일을 시작했고, 일하는 도중 습격을 받은 일, 그들을 무력화시킨 일 등. 하지만 조사 결과가 나왔다는 건 완전히 슬렘 지구를 장악했다는 것이다.
“보여 줘.”
화면 오른쪽으로 슬렘 지구를 장악하고 있던 범죄 조직에 대한 설명과 조직원들의 신상 명세, 그들의 범죄 내용과 증거 확보 여부가 주르륵 올라간다.
눈에 띄는 것은 범죄 내용. 살인, 강간, 폭력, 갈취, 인신매매, 마약……. 세상에 모든 범죄가 이곳에 모여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장기 밀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증거 확보 여부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실패’라고 적혀 있다.
다른 한쪽으론 그들의 본부로 보이는 건물을 급습하는 장면이 보인다.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칼을 휘두르는 이, 긴 대나무에 칼을 꽂아 휘두르는 이, 휴머노이드는 손에 호신용 봉을 들고 그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한참 지속되는 싸움은 총을 든 한 남자를 제압하면서 끝이 났다.
이때 화면이 바뀌었다. 지하로 보이는 장소에 사람들이 감금되어 있는 모습. 도망가지 못하게 다리 한쪽이 묶여 있다.
제일 많은 것은 아이들. 초점 없는 눈으로 휴머노이드를 보고 슬금슬금 기며 피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눈에 박힌다.
또, 화면이 바뀐다. 장부다. 글로 빽빽이 적혀 있는 장부. 화면 오른쪽에 그 장부에 적혀 있는 글로 보이는 내용이 보인다.
이름:이상철. 나이:17세. 혈액형:A. 신장, 안구, ……2013년 경기 수원 태생. 2025년 모친과 함께 슬렘 지구로 들어옴. 사진 없음. 이후 기록 없음. 모친도 기록 없음.
안구까지 적힌 글을 보면 대략 짐작이 간다. 이후의 글은 분명 아라가 별도로 조사한 내용일 것이다.
화면은 내가 보고 있는 이상철의 기록이 적힌 페이지에서 멈춰 있다. 이상철이라고 희미하게 보이는 글 위로 볼펜으로 찍찍 밑줄이 그어져 있다. 와락 심장이 멈춰 버리는 것 같다. 안구가 뿌옇게 번진다. 어금니를 앙다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