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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 1권 (22화)
12.해충 (2)
이상철은 볼펜의 몇 줄로 세상에서 지워진 것이다.
장부의 앞쪽은 지워진 이들로 가득했다. 마지막 몇 장은 이빨 빠진 모양으로 군데군데 지워진 이들이 보였고, 나머지는 지하 창고에서 보던 얼굴들이 보여진다.
장부는 절반 정도까지 작성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장부가 반이 넘는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하다니…….
지워진 이들이 980명. 무사한 이들이 31명. 이것이 슬렘 지구 한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머리의 한 곳이 새하얀 섬광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아라는 주도면밀했다. 슬렘 지구의 조직이 팔아넘긴 사람들을 처리하는 조직을 알아냈다.
슬렘 지구 조직을 괴멸시킨 지 3시간, 내가 그 조사 결과를 확인한 지 1시간 만에 모든 휴머노이드들이 그 조직들의 아지트에 집결했다.
13곳의 슬렘 지구는 5개의 상위 조직에게 사람들을 납품했다. 중국의 흑풍회와 홍천회, 일본의 야쿠자, 소련의 마피아, 한국의 깽단. 현재 내가 위치한 곳을 제외하고는 공격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난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아라의 반대에 결국 아바노이드2인 신진호의 몸으로 서울과 가장 가까운 홍천회의 비밀 아지트에 왔다.
폐공장으로 보이는 두 건물 앞에는 중국인으로 보이는 3명이 불을 피우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며칠 전, 새벽에 길 가던 여성을 성폭행하던 얘기를 자랑스럽게 지껄인다. 차라리 진하의 몸으로 왔으면 안 들렸을 텐데 신진호의 귀는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박멸!”
12대의 휴머노이드에게 명령을 내리며 숨어 있던 숲에서 뛰쳐나갔다.
“어어, 저 새끼들 뭐야?”
늦었다. 성폭행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던 녀석의 턱을 노리고 휘둘렀다.
퍼억!
휴머노이드의 힘에 제한을 걸어 놓지 않았으면 턱째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억제를 했다고 해도 턱이 버텨 낼 리 없다.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지는 녀석의 다리 사이를 힘껏 걷어 올려 찼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감각이지만 이미 기절한 상태였는지 반응은 없었다.
하지만 자랑하던 그 물건은 두 번 다시 쓸 수 없을 것이다.
세 명은 일행을 부르기도 전에 제압되었다. 6대의 휴머노이드를 창고처럼 생긴 건물 쪽으로 보낸 후 큰 건물로 갔다.
철컹!
안에서 잠겨 있다.
“뭐야?”
문에 달린 자그마한 쪽문이 열리며 들리는 중국어. 휴머노이드에게 걸린 제한을 풀었다. 그리곤 문을 향해 강한 앞차기.
쾅!
“저, 적이다!”
문은 우그러질 뿐 부서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결국 3번의 발차기에 문은 부서져 나간다. 순식간에 훑어지는 내부. 총을 지니고 있다.
총이 영향을 미치진 못하겠지만 인공 근육의 손상은 당연할 터 휴머노이드들은 할 일 많았다.
탕탕탕탕!!
빗발치는 총소리. 재빨리 문에서 떨어져 옆으로 몸을 굴렸다. 아무래도 흥분을 했나 보다. 철문보다는 공장으로 쓰이던 벽이 훨씬 얇다는 걸 이제야 확인하다니.
내 생각이 끝이 나자 휴머노이드들과 벽으로 달려갔다.
쿠앙! 쾅!
제한이 풀린 몸통 박치기에 얇은 금속으로 된 벽이 힘없이 뚫리고 쓰러졌다.
실내를 한 번에 확인했다. 일곱. 놀라서 총을 나에게 향하는 이의 팔을 비틀었다.
제법 무술 실력이 출중한지 그 와중에 몸을 비틀린 팔 쪽으로 돌리며 뒤차기를 날린다. 자연스레 풀리려는 팔 쪽으로 몸을 앞으로 밀자 옆으로 발이 지나간다.
뿌그득!
근육이 파열되며 관절이 뒤틀린다.
“으아아아…… 크악!”
비명을 지르는 녀석의 입에 주먹을 선사했다. 이곳도 제압 완료.
쓰러진 놈들을 감시할 휴머노이드 2대를 남겨 두고 창고로 향했다.
창고 앞에 2명이 쓰러져 있고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열려 있다. 이미 조용한 걸 보니 상황은 종료가 되었나 보다.
“한 명도 도망가지 못하게 쓰러진 놈들을 한곳으로 모아 둬.”
나머지 휴머노이드를 놔둔 채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피 냄새? 아바노이드의 코끝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끊임없이 올라온다.
지하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엔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수술대로 보이는 금속 침대 위에는 헤집어진 사람이…… 그 옆 유리병에는 적출된 장기들이 괴기스럽게 담겨 있고 침대 밑 스테인레스 통에는 연신 피가 떨어지고 있다.
바닥과 벽은 무엇이 굳었지 검은색 얼룩들로 가득했고, 한쪽 옆의 열린 냉장고에는 유리병과 혈액을 담은 봉투들이 혈액형을 표시한 채 쌓여 있다.
“이, 이 아이는?”
하얗게 변해 버린 머릿속에 침대에 힘없이 누워 있는 남자애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15, 16세 정도 되어 보이는데 의외로 편안한 얼굴이다.
“미안해요, 진하…….”
네가 왜 미안해? 네가 왜…….
“으으, 사, 살려 주세요.”
그제야 한쪽에 제압된 2명과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그중 의사는 정신을 차렸나 보다.
“하, 항복입니다. 저, 전 이들 말대로 한 죄밖에 없습니다.”
어설픈 한국어. 두 손을 들며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두 손에 낀 장갑에는 방금 전 살아 있던 저 아이의 피가 묻어 있다.
그 피가 그의 소매를 적시고 있다. 그리고 그의 귀에 꽂힌 무언가에서 신나는 댄스 음악이 들린다.
“주, 죽……어.”
“네?”
“죽∼∼∼∼∼∼∼어!”
아라가 외치는 소리도 막으려고 하는 휴머노이드의 움직임도 이미 늦었다.
내 발동작에 터져 나가는 머리. 피……피……피. 죄의식 따윈 없다. 바닥과 벽에 굳은 것과 비슷한 흔적이 새로 한 겹 더해졌을 뿐이다.
난 해충을 제거했을 뿐이다.
13.변화 (1)
“이씨, 소장님이 부르시는구먼.”
“소장님이? 무슨 일이지?”
“내가 아나. 얼른 가 보게. 그리고 함바집에서 막걸리 준다고 하니 그쪽으로 오게.”
정리하던 동바리를 놓고 현장 사무실 쪽으로 향했다. 이 사내의 이름은 리동만. 사람들은 ‘이씨’라고 부르지만 개의치 않는다.
먹고사는 게 힘든 판국에 이름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원래 함경북도 출신으로 김일성 그 후레자식이 만들어 놓은 조선주의인민공화국 국민이었다.
어느 날 북남이 통일되고, 우리보다 못산다던 남한 모습에 고향을 버리고 서울로 내려왔다.
젊어서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세상은 만만치가 않았다.
안 해 본 것 없이 뛰어다녔지만 남한에서는 집 한 칸 빌리는 것도 힘이 들었다.
특히, 남한 주민들 중에 내전을 일으킨 북쪽 주민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유 없이 맞기도 어지간히 맞았다.
하지만 결혼도 하고 불안정하지만 정기적인 수입이 생기자 살 만하다는 생각도 잠시, 불행은 그들 가족을 덮쳤다.
프레스에 그의 오른손이 망가져 버렸다.
그나마 업주를 잘 만나 약간의 보상을 받았지만 그가 돈을 벌지 못하게 되자 도저히 서울에서 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서울에서 경기도로 또,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먹고사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모진 고생만 한 아내가 병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아이만 놓고 저 세상으로 가 버린 후 이 모진 목숨도 끊으려 했지만 그녀와의 사랑으로 나온 아이를 버리고 갈 순 없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생활은 어려워져 갔다. 밀리고 밀려 그와 아이가 간 곳은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 이미 많은 이들이 그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낡은 합판을 주워 집을 만들었고 그곳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냥 살았다. 하지만, 또 한 번 하늘은 그를 버렸다.
어느 날 아들이 쓰레기 더미에서 뭔가를 잘못 밟았는지 한쪽 다리가 퉁퉁 부었고, 돈이 없는 그로써는 무언가를 해 줄 수가 없었다. 쓰레기를 주워 먹고 사는 인생. 아이의 다리가 썩는 것을 처연히 볼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때 사회봉사 활동을 나온 대학생이 아니었다면 그 아이는 죽었을 것이다.
이제 평생 그곳에서 벗어날 길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곳에서 변화가 생겼다.
작은 변화.
쓰레기 하치장에서의 생활 중 가장 고달픈 시기는 역시 겨울이었다. 매년 겨울이면 그곳 주민 중 얼어 죽고 굶어 죽는 이들이 많았다. 쓰레기 속에서 재활용품을 주워 먹을 것을 살 것인지 연탄을 살 것인지 매일 고민했다.
추운 날씨에 아들 녀석과 쓰레기를 줍고 있는데 엄청난 트럭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온 차량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소문으로 듣던 철거반인가라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지만 아니었다.
연탄과 먹을거리, 옷가지와 이부자리. 장장 일주일 동안 그들은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니며 물건들을 뿌렸다. 돈 많은 사람이 죽기 전에 불우 이웃 돕기에 나섰다는 소문이었다.
사실 이곳 쓰레기 하치장의 주민들은 불우 이웃에도 속하지 못했다.
리동만이 지내 온 8년간 간간이 찾아오는 학생들과 종교 단체의 사람들도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풀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한 집 한 집 돌며 필요한 물건을 다 돌린 것이다.
비록 악귀 같은 깡패 놈들에게 받은 것의 대부분을 다시 뱉어내야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는 진실로 빌었다. 그 돈 많은 사람이 내년까지 살아 있기를 그래서 한 번 더 구원의 손길을 이곳에 주기를.
어느 해보다 따뜻하고 배부른 겨울이었다. 주민들 중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몇 명이 죽었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특히, 그들이 리동만의 아들에게 던져 주고 간 바이올린은 아들에게 웃음을 찾아주었다. 아이가 있는 집마다 던져 준 건지 하루 종일 깽깽대는 소리에 지겨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몇몇 아이들만이 기타며 바이올린 등을 가지고 놀았다. 소리 또한 시끄럽지 않고 듣기가 좋았다. 특히, 그의 아들 리항수는 옆집 사람들조차 인정할 정도로 연주 실력이 좋았다.
그렇게 그해 겨울은 무사히 넘어갔다.
그 다음해 가을 쓰레기 더미에서 날리는 분진이 가득할 때 낯선 5명의 남자가 쓰레기 하치장으로 들어왔다.
원체 낯선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라 기억을 못해야 당연하지만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들답지 않게 양복에 썬글라스까지 쓰고 나타난 이들이라 리동만은 기억했다.
그들이 온 이후 마을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혼자 살던 고아들과 나이든 노인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는 웃기는 소문이었다. 장기를 빼서 파는 패거리들이 활보하는 곳이 이곳인데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새로운 소문이 돌았다. 그 장기를 빼서 파는 패거리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 소문은 사실이었다. 쓰레기를 주울 때 껄렁대며 시비 걸던 놈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썬글라스를 낀 5명이 그들을 없앴다는 소문이었는데 그가 생각하기엔 어림없는 소리였다.
그들 패거리가 도시의 조폭들과도 연관되어 있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 5명이 온 이후에 마을은 점차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가 직접 목격한 일이 있었다. 어디가 아픈지 항상 누워 있던 옆집 정씨네 부인이 그들에게 업혀 사라졌고, 얼마 후,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봤다.
자신의 집도 아들이 혼자 있을 때 그들이 와서 몇 가지를 묻고 갔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별일 없었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역시 그의 간절한 소원은 이루어졌다. 돈 많은 사람이 죽지 않았는지 또다시 트럭들이 마을에 몰려들었다.
또 하나 기적과 같은 일이 생겼다. 그 이상한 5명 중 한 명이 찾아와 일할 생각이 없냐고 묻곤 공사장을 소개시켜 주었다. 물론, 한쪽 손이 불편한 그로써는 정상적인 일당을 받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호텔을 짓는다는 이곳 공사장은 이상했다. 나 같은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다른 공사장과는 달리 분위기가 좋았다. 함바집에서 나오는 음식은 정말 좋았다.
그리고 처음 받은 돈이 일당 7만원. 다른 정상적인 사람들이 받는 15만원의 절반. 하지만 행복했다. 3만원만 받아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얼마 만에 쥐는 현금이란 말인가?
쓰레기를 주워서는 약간의 쌀과 반찬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정상적인 몸으로 다른 공사장에서 번다고 해도 일당 8만원이다.
이놈에게 뜯기고 저놈에게 뜯기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워낙 인력이 남아돌기 때문에 잘못 찍히면 바로 잘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당을 주면서 함바집에 가서 내 이름으로 된 음식을 받아 가랜다.
그렇지 않아도 집에서 굶고 있을 아들 놈 생각에 목으로 넘어가지 않던 음식이었다.
함바집에서 내준 음식은 꽤 양이 많았다.
저녁과 내일 아침은 물론이거니와 내일 일하러 나올 때 집에 홀로 있는 아들놈이 먹을 수 있을 만큼이나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