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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 1권 (23화)
13.변화 (2)
그날 처음으로 아들이 먹을 과자를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리동만은 두려워졌다. 이 공사장 일을 못하게 될까 두려웠다. 불편한 몸이지만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움직이지 않던 몸이라 삐거덕거렸지만 쫓겨나지 않게 열심히 했다.
그걸 알았음인지 이번 달부터 일당 15만원으로 올랐다. 그날 함바집에서 받은 음식을 들고 집으로 가는 길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소장실 앞이었다.
호텔 공사는 아직 많이 남았는데…… 혹시, 오늘이 잘리는 날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요 몇 달간 살 희망과 용기를 얻었기에 이곳 일이 끝나더라도 다시 한 번 열심히 살아볼 생각이었다.
“들어오세요.”
“부르셨습니까, 소장님?”
소장실로 들어가자 소장은 먼저 온 손님과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쪽으로 앉아요. 김소리 씨 커피 한 잔 더 부탁해.”
소장의 옆자리에 앉자 맞은편의 산적처럼 생긴 사내가 그를 유심히 바라보며 묻는다.
“이분이 리동만 씬가? 보기에도 착실하게 생기셨구먼.”
“예, 사장님. 아까 본 5명보다 더 착실합니다.”
앞에 있던 산적처럼 보이는 사람이 사장이라는 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리동만이었다.
“난 한만호요. 만나서 반갑소. 오늘 내가 리동만 씨를 부른 이유는 몇 가지 묻고 싶은 것과 제안할 게 있어서요.”
“말씀하십시오, 사장님.”
“혹, 내가 말한 것 중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말해 주시오. 이름 리동만. 함경북도 출신. 나이 42세. 오른손이 절단되어 사용할 수 없고, 12살 난 아들이 있으며 오른쪽 다리가 불구. 주민등록은 말소되었고 현재 강원도 쓰레기 하치장에서 생활 중. 험험!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오. 그냥 조사된 내용을 읽어서 확인하려는 것뿐이니.”
알고 있는 사실을 열거하는 것뿐이지만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내용은 리동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마음이 얼굴에 나타났음인지 사장은 헛기침을 하며 너스레를 떤다.
“……3개월 전부터 이곳 L&J강원호텔 공사장에서 일을 시작했으며 성실함으로 정상인들과 같은 일당을 받고 있음. 같은 마을 뒷집의 지선미라는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음. 특이 사항으로 아들이 음악적 재능이 뛰어남. 내가 열거한 내용 중 잘못된 것이 있소?”
완전 옆에서 지켜본 것처럼 딱 맞는 내용이었다. 누가 자신과 같은 사람을 조사했는지 모르지만 북쪽 출신이라 약간의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대답은 해야 했다.
“아닙니다. 모두 사실입니다.”
“진하 녀석, 정말 철저하다니까. 뭐 어쨌든 어려운 처지에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지녔군요. 오히려 저보다 낫습니다.”
“별말씀을요. 같이 어려운 처지였는데 제가 좀 사정이 좋아져서 약간의 도움을 준 것뿐입니다.”
“그러기가 쉽지 않죠. 그건 그렇고, 리동만 씨에게 온 이유는 훨씬 좋은 직장을 소개하려 왔소. 잘 듣고 판단하시오.”
정신이 번쩍 들었다.
“L&J의지라는 회사가 있소. 자네처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의족이나 의수 등을 만드는 곳이지.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곳이지만 꽤 대우는 좋은 걸로 알고 있소. 3개월간 인턴 생활을 해야겠지만 지금 받는 일당보다 훨씬 좋지. 그리고 정직원이 되면 아마 자네 아들 학비 걱정이나 사는 걱정은 없을 거요. 물론, 공장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하고 주민등록도 갱신해야겠지. 어떻소? 리동만 씨가 원한다면 내일부터 당장 그곳으로 갈수 있소.”
물어보다마나 당연히 좋았다. 이런 기회는 자신에게 평생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난 겨울부터 돕다가 마음에 들게 된 지선미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선뜻 대답할 수 없게 만든다.
“손 때문에 망설이는 거라면 걱정 안 해도 될 거요. 아마 들어가자마자 좋은 의수와 자네 아들의 의족을 받게 될 테니까. 집 문제도 2명이 살 만한 집을 월세 조금만 내면 회사에서 알아서 구해 준다니 꽤 좋은 조건 아니오?”
“저, 그게 아니라…… 제가 사귀는 선미 씨와 그녀의 딸이 마음에 걸려서…….”
“하하하하! 역시 자네 마음에 드는군. 내 동생으로 삼고 싶어. 근데 왜 그게 문제인가? 주민등록 정정을 하면서 결혼하면 될 거 아닌가?”
한만호의 반말이 기분 나쁘진 않았다. 의외로 정이 많아 보이는 사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그래도 괜찮습니까?”
“자네가 결혼하겠다는데 누가 말리겠나? 회사에서 뭐라고 하면 나에게 말하게. 그 회사 사장이 내 동생이니까 아무 걱정 말라구. 하하하하! 그럼, 자네도 허락한 걸로 알고 그렇게 말해 둠세. 내일쯤 사람들이 자네를 찾아갈 거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리동만은 자신이 우는지도 모른 채 그저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
“엄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큰엄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공부 열심히들 하고 조심히 다녀오너라. 여보, 다녀오세요.”
언제나 아침이면 그렇듯이 오늘도 아이들의 인사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온다.
24인용 버스 2대에 나눠 탄 애들이 출발하자 그제야 주위가 좀 조용하다.
“언니, 들어가요.”
“그래, 지선이와 희연이가 기다리겠다.”
오늘의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안에 들어가자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얼른 들어가 우는 아이 중 한 아이를 안아 주었다.
“울 애기 엄마를 찾았쩌?”
우는 아이를 잠시 토닥이자 금세 울음을 그친다.
“큰 엄마, 에디가 안 보여요.”
또 다른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만화 캐릭터 인형을 찾는다.
“그래? 우리 희준이 에디가 어디 있을까? 엄마랑 찾아볼까?”
아이를 한 손에 안고 잔뜩 쌓인 장난감 속에서 에디를 발견해 건네자, 아이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또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언니, 손님 오셨어요. 지금 원장실에 계세요.”
희연의 말에 이제는 울음을 그치고 방긋거리는 아이를 넘겼다.
희연이 말하는 투를 바서는 후원자리라.
겨울철이면 항상 고맙게도 찾아주시는 후원자들을 허투로 대할 수는 없었다.
원장실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김테레사는 남편과 버려진 아이들을 키웠다. 지금처럼 큰 건물이 아닌 남의 땅에 건물을 짓고 자신들이 먹을 음식을 나누면서 하나둘씩 모아 키우기 시작한 게 몇 해 전이다.
둘이서 열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커 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 부부의 삶은 행복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 오셨어요?”
원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사과를 하고 얼굴을 보니 익히 알던 얼굴이다. 무뚝뚝하지만 고아원의 가장 큰 후원자인 사내였다.
“금방 왔습니다. 항상 고생이 많으시군요.”
여전히 무뚝뚝하게 말하는 사내의 말에도 김테레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 겨울, 이 사내가 찾아왔을 땐 이 고아원에서 쫓겨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땅 주인의 독촉이 심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사내는 많은 것을 해 주었다. 땅을 사 주었고, 그곳에 고아원을 크게 지어 주었다.
특히나 자신의 하나뿐인 친자식을 취직까지 시켜 준 은인이라면 은인이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혹시 맡기실 아이가 있으신가요?”
이 사람이 오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아이들을 맡길 때뿐이었다.
“예. 3명의 아이를 맡기고 싶은데 여유가 되시겠습니까?”
“현재 57명이니 아직 여유가 많아요. 어떤 아이들인지 빨리 보고 싶네요.”
그녀의 말마따나 그녀와 함께 일하는 동생들이 맡고 있는 아이들의 수였다.
혼자일 때 15명을 길렀지만 늘어나는 아이만큼 자신을 돕고자 하는 사람들도 데리고 와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도 14명이었다. 더 늘릴 생각에 알아도 보고 있는 중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오후쯤 보내겠습니다. 예쁘게 키워 주세요. 그리고 이것.”
“어머, 더 이상 안 주셔도 되요. 지난달, TV에 나간 후 들어오는 후원금이 많아져 충분하답니다. 저희가 아닌 필요한 곳에 써 주세요.”
사내가 건네는 봉투는 안 봐도 뻔했다.
그는 올 때마다 아니면 통장으로도 항상 많은 돈을 후원했다. 무엇보다도 세탁기며 냉장고며 필요한 가전제품뿐 아니라 아이들의 등록금이나 필요한 학용품, 장난감 등도 작년 크리스마스 때와 올해 설날 때도 한 차씩 보냈기에 항상 감사하면서도 미안했다.
최근 TV프로그램에 잠시 나오면서 후원자들도 많이 늘어 지금은 약간 여유가 있었다.
“아닙니다. 너무 아이들만 신경 쓰지 마시고 일하시는 분들도 생각을 하셔야죠. 물론, 자신의 영달을 버리고 일하시는 분들이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사실 사내의 말도 맞는 말이다. 먹고 자는 것만이 행복은 아니다. 자신은 이미 한평생을 이렇게 보낼 각오를 하고 있지만 다른 동생들에게 강요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몇 가지 필요한 물건을 보내겠습니다, 그럼.”
“차도 한 잔 안 드시고…….”
“아닙니다. 또 다른 곳을 찾아봬야 해서 다음에 뵙겠습니다.”
필요한 말만 하고 휭 하니 가 버린다.
세상에 저런 사람이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김테레사는 그를 위해 나지막이 기도했다. 그리고 그가 건넨 봉투의 돈을 보고 조금 놀랐다. 꽤 많은 돈이었다.
***
오동인은 오늘도 리얼월드의 패션 거리를 거닐고 있다.
엄청난 인파가 제각각 움직이는데 모두들 멋쟁이에 미남미녀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과 마찬가지지로 자신의 캐릭터가 남들보다 뒤지면 묘하게 기분이 나빠서 꽤나 투자를 많이 했다.
이곳에서 만난 인연으로 실제 만나 본 적도 있었지만 지금의 여자 친구를 제외하곤 캐릭터는 캐릭터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빠!”
“혜진아! 빨리 왔네?”
“응, 일찍 들어와서 새로 생긴 옷 가게 돌아보고 있었어.”
“그래? 괜찮은 곳 생겼어?”
이곳 리얼리티에는 수많은 가게가 있고 오픈마켓의 발전형이라 불릴 만큼 많은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신과 여자 친구인 혜진이도 이곳에서 가게를 하고 있었다.
제일 처음 생겼을 때 입점을 해서 꽤 좋은 위치에 가게를 낼 수 있었는데 그 덕분에 집도 사고 돈도 꽤 많이 모았다.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라 의류 쪽은 특히나 경쟁이 심했는데 하루에도 많은 가게들이 새로 생기고 사라져 갔다.
“아니, 경쟁될 만한 곳이 한 곳 있었는데 아직 초보인지 미숙하더라고.”
“고생했네.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칫! 맨날 이곳에서 맛있는 거 먹으면 뭐해? 배도 안 부른걸.”
“하하! 만나면 맛있는 거 사 줄게. 그래도 먹을 땐 꽤 훌륭하잖아. 식감이나 향기까지 똑같다고 자기가 말해 놓고.”
“흥! 좋아. 그럼, 오늘은 이곳에서 아주 아주 비싼 거 먹을 거야.”
“그래, 그러자. 하하하!”
둘은 서로의 몸을 기댄 채 거리를 걸었다.
리얼월드라는 곳에서 결혼을 하게 되면 간단한 신체 접촉도 가능했기에 둘은 이곳에서 가상 결혼을 했다.
물론, 현실에서도 곧 결혼할 예정이라 둘은 한참 좋을 때였다.
날이 갈수록 입점하는 곳이 많아지는 명품 거리를 지나 고급 레스토랑에 들렀다.
현실에서 가려면 지갑이 얇아지겠지만 이곳에서는 커피 두 잔 값이면 해결되는 일이었기에 가볍게 잡고 들어갔다.
오동인은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테이크의 육즙이 살아 있고 식감 또한 부드러워 녹듯이 사라졌다. 취하지 않는 와인 한 잔과 함께 후식까지 정말 만족스러웠다.
간혹 왜 그곳에서 음식을 먹냐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곳 맛에 길들여지면 어쩔 수가 없었다.
신혜진과 오동인은 식사 후 거리를 걸었다. 분위기가 좋았다. 이럴 때 호텔이라도 운영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아직까지 L&J소프트에서는 생각이 없나 보다.
“정말 재밌다. 이야, 우리나라 작품 같은데 여주 모습 봤냐? 크! 슴가가 예술이지 않냐?”
“크크크! 맞아. 난 그 가슴에 빠지고 싶더라. 덕분에 간만에 재밌는 영화 봤다.”
머리가 칼라인 두 남자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드디어 이곳에 영화관이 생겼나 보다.
“혜진아, 이곳에 영화관이 생겼나 봐. 영화나 한 편 볼까?”
“영화? 지금 오빠 가게에서 접하고 있는 거 아냐? 손님 오면 어쩌려구.”
“일시정지나 뭐 그런 것 있지 않을까?”
“그럼, 일단 검색부터 해 보자. 메뉴에 영화관 생겼으면 걷지 말고 바로 이동하면 되잖아.”
신혜진도 영화가 싫지 않은지 곧 검색을 했다.
“예고편 한 번 봐. 재미없을 수도 있으니까.”
예고편을 클릭하자 화면에 멋진 장면들이 연출된다. 카피 내용을 보니 자신이 읽었던 판타지 소설이 생각났다.
“아, 이 소설 읽었었는데. 재미있겠다. 가자.”
“그래요.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