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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오션 1권(22화)
8장. 땡중 서광(3)
‘지금은 시작할 수도 없는 일이다. 차근차근 준비한 후 최씨 가문의 생존자가 있는지 찾아야 한다.’
몇 가지 단서는 있었지만 할아버지도 드러내 놓고 찾지 못했던 일이다.
자칫 최씨 가문의 존재를 적들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훗날을 기약해야 했다.
마음을 가라앉힌 장혁은 할아버지의 유진이 무엇인지 천천히 살펴보았다.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가문이 한 일 때문에 유심히 봐야 할 것들이 상당히 많았지만 이곳에서 모두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대충 살펴보았다.
‘저 녀석과 나에게 남겨진 운명이 만만치 않겠구나.’
자신에게 남겨진 편지를 다 읽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장호의 얼굴이 자못 심각했다.
자신과 동생의 앞날에 놓인 숙명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탁!
“혁아!”
동생이 유진을 살피는 것을 멈추자 장호는 심각한 음색으로 동생을 불렀다.
“왜? 형.”
“쉽지만은 않은 일이겠지?”
“그래, 할아버지의 유지를 잇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될 거야.”
“그렇지만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겠지?”
장호 또한 가문의 유업을 이어 간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아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남가의 사명이니까. 그리고 놈들은 우리의 원수들이니 그냥 잊고 살 수는 없잖아?”
“그래 원수들이지.”
불구대천의 원수들이니 가문의 사명이 아니더라도 싸워야 했기에 장호가 입을 악물었다.
“장혁아, 나는 서광 스님께 사사하라고 쓰여 있는데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인 거냐? 네가 말한 대로 한다면 가문의 절기들을 수습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지만 장혁이 문제였다.
할아버지의 의지로 인해 숨겨 길러진 이가 바로 동생이었다.
장혁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오직 자신과 가족들뿐이었기에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생존해 있다면 준비해 둔 방법이 있을 테지만 이제는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장혁이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뭔가 준비를 해야 했다.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신분에 관한 일이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의논한 대로 신분을 만든다면 살아가는 일에는 문제가 없을 테지만 할아버지가 남기신 것들을 익히는 일이 어려워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후후후, 그건 걱정하지 마. 어떻게 해서든지 반드시 익혀 낼 테니까.”
‘뭔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어느 때보다 강렬한 눈빛을 보이는 동생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을 꺼낸 것을 보면 이미 그런 점을 염려에 두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래,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대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라.”
“알았어, 형.”
“후후후, 녀석!”
조금 전 비장했던 것과는 달리 귀여운 웃음을 보이는 동생을 바라보니 마음이 든든했다.
저 웃음 속에 천만 가지 생각이 가득 들어차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
“왜?”
“이제 서광 스님을 불러야 하지 않을까 모르겠네. 바깥이 무척 춥던데 말이야.”
“이런! 그렇구나.”
영하로 내려간 날씨에 바람까지 불어 감기 들기 딱 좋은 날씨다.
할아버지의 유지를 읽고 생각하느라 미처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상당한 시간 동안 바깥에 있었던 터라 아무리 무예로 단련된 서광 스님이라 할지라도 탈이 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셔올 테니 넌 이것들을 치워라.”
“알았어.”
할아버지의 유진을 치우도록 한 장호는 자신에게 남겨진 편지를 품에 갈무리하고는 서둘러 바깥으로 나갔다.
안에 남은 장혁은 가지고 온 백팩에 할아버지가 자신에 남긴 것들을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으으, 춥다.”
잠시 뒤에 장호와 함께 들어온 서광은 부리나케 자리에 앉더니 연신 손을 비비며 화로의 온기를 만끽했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아…….’
촐랑거리며 행동하는 서광의 태도에 마음속으로 혀를 차는 장혁이었지만 바깥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래, 할아버지의 유지는 잘 보았냐?”
자신이 건네주었던 것들이 어느새 치워지고 없었기에 서광이 물었다.
“예, 스님. 그리고 여기.”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여 달라는 말을 어떻게 꺼낼까 고심하던 장호는 서둘러 편지를 서광에 내밀었다.
“네 할아버지가 남기신 거냐?”
“한 번 읽어 보십시오.”
“내가 읽어도 상관없는 거냐?”
아무리 친우라지만 남의 유진을 함부로 볼 수 없어 서광이 물었다.
“스님과도 연관이 있는 일이라 상관없습니다.”
“알았다.”
서광은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편지를 펼쳐 들더니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서광은 헌승이 장호에게 남긴 편지를 통해 대강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심각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으며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서광의 시선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장호에게 향했다.
“이것이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허어, 네 가문의 참화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을 했지만 너를 본문에 들이라니…….”
친우의 부탁은 서광으로서도 뜻밖이었다.
‘그토록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다가 유언으로 남기다니 모를 일이군.’
그동안 장호를 제자로 달라고 몇 번 부탁을 했었지만 헌승은 가문의 일 때문에 안 된다고 매번 거절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부탁한다니 뜻을 알 수 없었다.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스님.”
할아버지가 유언으로 남긴 뜻을 따라야 했기에 장호는 합장을 하며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을 했다.
“허어!”
서광이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본문의 맥은 저 아이가 아니면 온전히 잇기 어려울 것이다. 저놈의 상이나 기운이 꺼려지기는 하지만 천연을 이은 아이를 내칠 수도 없고…….’
장혁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낀 감정은 거리감이었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인연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동안 퉁명스럽게 대한 것도 그런 것이 마음에 있었기 때문이다.
‘장호만 한 계승자를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그렇지만…….’
꺼려지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장호가 탐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금강밀문의 절기는 재질도 재질이지만 인연을 더욱 중시하는지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으음, 이리된 것도 인연이다. 혈연으로 이어진 아이들이니 별일은 없겠지.’
장혁과의 알 수 없는 거리감이 꺼려지기는 했지만 장호를 제자로 거두어들이는 것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장호야, 너의 자질은 내가 보아 온 사람들 중에서 최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 스님.”
제자로 받아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장호가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서광을 바라보았다.
“허허허!”
자신의 말에 실망스러운 듯 신음을 흘리는 장호를 보며 빙그레 웃은 서광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라. 최상의 재질이 아니기는 하지만 본문의 절기를 이어받기에는 가히 최적이라 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스님!”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기에 장호의 감사한 표정으로 서광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동안 네 할아버지에게 누차 너를 제자로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하지만 계속 거절한 터라 섭섭했었는데 이렇게 인연이 이어질 줄 몰랐구나.”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스님께서 저를 제자로 거두어 가르쳐 주신다니 고맙습니다.”
서광이 민족의 전통 무예를 익힌 고수라는 것을 알기에 장호는 오히려 고맙다는 듯 서광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유언으로 남긴 할아버지의 당부를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예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는 터라 고마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하하, 좋다. 가문의 큰일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네 할아버지의 부탁대로 너를 문하에 들이도록 하마. 내가 믿는 유일한 친우의 손자인 네가 절기를 이어받게 되면 그것으로 민족의 염원을 이룬다고 하니, 기꺼이 전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본문의 율법이다. 본문의 율법은 지엄하다. 네 할아버지가 너에 무슨 사명을 내렸는지는 모르나 내 말을 듣고 지킬 자신이 없으면 본문에 들어오는 일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예, 스님!”
장호는 순순히 대답을 했다.
어차피 할아버지의 뜻과 배치가 된다면 포기를 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은 서광의 말을 들은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은 일이었다.
“우선, 민족의 정기를 지키는 것이 본문의 제일 큰 사명이다. 그 다음은 불가의 맥을 보존해 종통을 지키는 일이다. 계율에서는 자유로우나 이 두 가지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서광이 하는 말에 장호의 눈이 반짝였다.
‘다행이다. 할아버지의 뜻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서광 스님의 진전을 이을 수 있다니.’
두 가지 다 가문에서 지켜온 사명은 물론 할아버지의 유명과도 배치되지 않는 일이었기에 장호는 마음에 남아 있는 부담감을 지울 수 있었다.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당부하지만 본문의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만약 이를 어기는 일이 발생한다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니 이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예, 스님!”
“좋다. 나에게 삼배를 하도록 해라.”
입문 절차를 시작한다는 뜻이었기에 장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광에게 세 번 큰절을 했다.
“장호야, 이제 외인은 나가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구나.”
사제지연을 맺는 의식이 끝나자 서광이 장혁에게 내뱉은 첫마디였다.
한마디로 장혁은 외인이라 상관이 없으니 이제는 나가 보라는 뜻이었지만, 자신을 바깥에 세워둔 데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그 양반 심통은! 역시, 땡중이 맞아. 그렇지만 한가락하는 양반인 것은 확실한 것 같고, 형이 저렇게 경건한 것을 보면 이제부터 내가 뭐라고 그럴 수는 없는 일이겠지.’
이제는 형의 스승이 되는 사람이기에 장혁은 말없이 일어나서 공손히 인사한 후에 바깥으로 나갔다.
장호와 단둘이 남게 되자 서광이 입을 열었다.
“내가 반야금강의 맥을 이은 56대 제자니, 너는 57대로구나. 오늘은 본문의 역사에 대해서 우선 말해주고, 앞으로 틈나는 대로 너를 찾아 본문의 절기를 전수해 주도록 하마.”
“예, 스승님.”
“본 문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그러니까…….”
장혁이 나가고 시작된 설명은 한참을 이어 갔다.
‘본 문이 그리 대단하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서광의 설명을 들으며 장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금강밀문은 오래된 문파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보다도 훨씬 오래 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무문이었던 까닭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는 상당 시간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