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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 오션 1권(23화)
9장. 할아버지의 유진(1)
바깥으로 나간 장혁은 차가운 공기가 춥게 느껴지지 않고 그저 시원하기만 했다.
꽤나 추운 날씨였지만 차가운 공기가 마음을 씻어 주는 것 같은 기분이다.
비명에 가신 할아버지의 유진을 보고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이 겨울 찬바람에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응?”
한동안 주변을 거닐며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장혁은 갑작스럽게 암자에서 나오는 기척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대단하구나.’
가문의 피난처에서 일어난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전과는 다른 오감을 가진 자신이다.
귓속말로 소곤거린다고 해도 집중한다면 암자 안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형 때문에 집중했음에도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이한 기운이 암자를 감싸고 있는 것을 보면 서광이 차단한 것이 분명했다.
‘소리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보면 그 양반이 차단한 것이 분명하구나. 이 정도 실력자라면 형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다. 그나저나 이야기가 꽤 길어질 것 같구나. 그럼 난 조용한 곳에서 할아버지가 남기신 것들이나 다시 한 번 보자.’
암자 안에서의 대화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장혁은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살폈다.
‘저기면 적당하겠구나.’
암자를 한 바퀴 돌자 장혁은 이곳에 놀러 올 때면 언제나 머물렀던 장소를 찾았다.
자연적인 암반이 삐죽이 나와서 마치 의자처럼 생긴 곳으로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하기 좋은 장소였다.
‘별로 차갑지 않구나.’
감각이 확장된 이후부터 추위를 느끼지 않게 되었기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위였지만 아무렇지 않게 앉았다.
장혁은 백팩에서 할아버지가 남긴 기록을 꺼내 다시 읽기 시작했다.
가문의 비사와 당부는 이미 전부 읽었던 터라, 할아버지가 남긴 유진을 살폈다.
장혁은 정독을 하며 천천히 외워 나갔다. 가지고 있다가 누군가에게 발견이 된다면 하나도 좋을 것이 없기에 외우기로 한 것이다.
할아버지와 장호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장혁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적인 기억력을 지니고 있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할아버지가 특별하게 준비한 교육을 받았던 장혁의 사고력은 보통 사람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뛰어났다.
특히나 참사를 당한 후에 감각이 확장되는 일을 겪고 나서는 어쩐 일인지 더욱 머리가 좋아졌다.
외우고자 한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기에 장혁의 머릿속에 완벽하게 담기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유진을 외워 나가는 장혁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할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남긴 기록에는 가문이 가진 무력이 기록되어 있었다.
가문에 의해 단죄를 받은 자치고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선조들은 그런 이들 대부분을 가문을 드러내지 않은 채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처리했다.
당대에 있어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세도가들을 가문이 가진 무력을 하나도 쓰지 않으면서 오직 계책으로만 처리했다.
그런 위대한 가문에서 최후의 비책으로 남긴 것이니 허술할 리 없었다.
“으음, 이런 힘들을 가지고 계셨으면서도 쓰시지 않았다는 것은 선조들께서 그만큼 머리가 좋았다는 이야기인데…….’
체술과 검술이 하나씩, 그리고 어려서부터 해 왔던 가문의 명상법보다 더 상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심결이었다.
가문의 유진은 엄청난 것이었다.
몇 개 되지 않는 것이지만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다.
외워 가며 알아낸 바로는 세 가지에 담긴 위력은 의식 속에 자리한 경험과 지식들로 비교해 봐도 상당한 수준의 것이었다.
아직 제대로 된 수련을 하지는 않았지만 위력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고절한 절기들이었던 것이다.
‘하아! 무력을 자제하고 그런 일을 하면서 이어 온 자랑스러운 가문인데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다니 정말 아쉽구나. 할아버지도 때가 되면 알려 주려고 했었겠지만 미리 알았다면 좀 더 정진할 수 있었을 텐데…….’
장혁은 가문이 가지고 있는 저력이 감탄스러우면서도 가문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몰랐다는 것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대략은 어떤 것인지 알아냈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하루 이틀에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이것들을 익혀 가며 하나하나 준비를 해야 한다. 섣불리 나서는 것 보다 먼저 힘을 길러 가문의 사명을 이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할 테니까.’
세 가지 절기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놓은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차피 지금으로서는 나서기 곤란한 처지였다. 원수들을 상대하기 위한 힘을 갖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앞으로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할아버지가 남긴 힘이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련을 통해 진의를 깨달아야 했다.
‘의식 속에 자리한 그것들도 함께 수련해야 한다. 나에게 전해진 이유가 확실치는 않지만 이제는 형과 나뿐이니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일이니까.’
할아버지가 남겨 주신 것들을 이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유도 의식 속에 자리한 기억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것들이 무서움 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의 기억인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그것들이 모두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강력한 힘을 얻게 해 줄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조금은 자신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
“장호야, 내가 처음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금강밀문의 역사를 모두 전하고 난 뒤 서광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네 자질이 최상은 아니지만 본문의 절기를 익히기에 최적이라고 했던 이야기 말이다.”
“예, 기억납니다.”
“내가 너에게 그렇게 이야기한 데는 연유가 있다. 본문의 절기는 아무나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질 말고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본문의 절기는 글이나 말로써 전하지 않는다. 그렇게 전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는 전수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본문의 절기라고 할 수 있다.”
“허면…….”
“너는 염화시중이라는 말을 아느냐?”
잘 아는 이야기다. 이신전심으로 불리기도 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경지를 말함이다.
“혹시, 이심전심이라는 그 염화시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장호 또한 모르지 않았다.
“맞다. 본문의 절기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전수 방법이지. 하지만 너라면 가능할 것이다.”
“제, 제가요?”
“그렇다. 사실 네 할아버지에게 너를 제자로 달라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네가 여기에 처음 왔을 때 난 강한 끌림을 느꼈었다. 그래서 시험해 보았었지.”
“시험이요?”
“그래, 생각해 보아라.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자면서 조금 이상한 꿈을 꾸지 않았느냐?”
“혹시, 그 꿈이…….”
처음 할아버지와 함께 서광을 만나러 왔을 때 밤이 늦어 암자에서 잠을 잤었다.
너무 피곤해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그날 밤 꿈에서 너무도 선명한 만다라를 볼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막연히 부처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서광의 시험이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맞다. 네가 꾼 그 꿈은 내 의지로 구현된 금강밀의 만다라였다. 본문의 절기를 인연자가 아니면 절대로 볼 수 없는 것이지.”
“그, 그렇군요.”
“하하하, 의심을 가질 만도 하건만 금방 수긍하는구나.”
“그날 밤의 꿈이 지금도 선명하니까요.”
“이 스승도 평생을 참오하기는 했지만 본문의 절기를 완벽하게 익혔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묘한 것이다. 뜻이 너무 깊어 말로서는 온전하게 전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본문의 절기는 그렇게 의식에서 의식으로 전할 수밖에 없다. 내가 스승에게 전해 받은 방법대로 오늘 너에게 본문의 절기를 전하고자 한다.”
“지금 말입니까?”
“그래, 어서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아라. 지금부터 내 본신진기 중 일부와 평생 참오해야 할 본문의 절기를 전수하겠다. 내가 얻었던 깨달음도 전할 터이니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불법을 수호해라.”
“예, 스승님.”
평소와는 달리 엄숙한 모습에 장호는 예전 서광에게 배웠던 대로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았다.
서광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바닥을 장호의 머리에 댔다.
정수리에 손을 대고 금강밀문의 진수를 전하는 서광의 몸에 장엄한 금광이 어리기 시작했다.
은은하게 어린 금광은 어느새 머리 쪽으로 옮겨갔고, 기이한 형상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장호가 꿈에서 보았던 만다라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뜨거우면서도 시원하다.’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명상에 들자 뜨거우면서도 부드러운 기운이 정수리를 통해 흘러들어 오며 청량감이 들었다.
스승의 전수가 시작된 것이다.
꿈을 꾸지 않았는데도 전에 보았던 황금빛 만다라가 의식 속에 그려졌다.
알 수 없는 기운이 내부를 돌아다니며 전신이 시원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기억들이 뇌리에 가득 차올랐다.
***
끼이익!
‘이제 나오나 보다.’
자신에게 남겨질 것들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암자에서 누군가 나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상당히 오래 걸렸구나.’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났다는 소리였기에 장혁은 상념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전등 불빛으로 인해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미 밤이 찾아와 주위가 어두워져 있었다.
“혁아, 춥지 않니?”
“춥긴, 그런 대로 견딜 만은 해. 그런데 이제 다 끝난 거야?”
“그래, 오늘은 다 끝났다. 이제 집으로 가도 된다.”
“그럼 서광 스님께 인사를 드려야겠네.”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된다.”
장혁이 암자로 들어가려 하자 장혁이 말렸다.
“서광 스님께 인사드리지 않아도 되는 거야?”
“그래, 지금은 운기 중이시라 인사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니 그냥 가도록 하자.”
“그렇지만 인사하지 않고 그냥 가면 나중에 난리를 칠 텐데. 형도 알잖아, 서광 스님이 한 성질 한다는 것을 말이야.”
“하하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럼, 형이 책임지는 거다.”
“그래, 내가 책임지마.”
호언장담한 장호는 동생의 어깨를 자신에게 끌어당기며 몇 번 두드려 주었다.
“자, 가자.”
“알았어.”
두 사람은 곧바로 차가 주차되어 있는 암자 밑으로 내려가 차에 올라탔다.
할아버지인 헌승이 남긴 유진을 물려받은 두 사람은 곧장 서울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아무런 대화가 없어서 그렇지 집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화가 없었던 이유는 두 사람 다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들어가서 물어보자.’
집에 도착한 후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장혁은 차 안에서 내내 궁금했던 것을 형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형, 금강밀문이라는 곳 어때?”
식탁에 앉으며 장혁이 물었다.
“아주 유서 깊은 곳이다.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입문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구나. 형이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정말 대단한 곳인 것 같네?”
“대단하지. 스승님으로부터 상상하지도 못한 힘을 물려받았으니까.”
“상상하지도 못할 힘이라니 무슨 말이야?”
뭔가 알 수 있다는 생각에 장혁이 물었다.
“미안하다. 스승님과 약속해서 말이다. 자세한 것을 말해 줄 수가 없구나.”
“금강밀문도 우리 가문 못지않게 비밀이 많은 모양이네. 할 수 없지 뭐. 사문의 비밀이라는데.”
사문의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을 했는지 미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한 것을 보고 더 물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