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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엘 전기 1권(5화)
2장 흡수할 계획을 세우다(3)
4000만 골드.
지위고하를 떠나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다.
만약 이를 마차로 운반한다면 적어도 커다란 짐칸이 몇 개는 필요할 것이다.
카이사르의 홍등가를 빠져나가고 있는 마차는 줄줄이 짐칸을 매달아 마치 상단의 원행을 보는 것 같았다.
조용히 카이사르의 성문을 빠져나와 외곽으로 접어드는 마차위의 마부는 졸린 눈을 비비며 말을 몰았다.
“아니, 무슨 물건인데 이 새벽에 운반을 한다는 거야?”
늦은 새벽에는 자주 있지 않은 일이다.
무슨 물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옆 동네까지만 가면 보수를 준다기에 마부 조니는 어쩔 수 없이 고삐를 잡았다.
투덜투덜 말을 몰아가던 그의 눈에 웬 소년이 들어왔다.
조니는 굵은 장맛비를 작은 우산과 횃불로 버티고 서 있는 소년이 안타까워 마차를 세웠다.
“얘야, 왜 이곳에 서 있는 거니?”
이제 12세나 되었을까?
사람도 잘 지나다니지 않는 밤길에 혼자 있는 것이 불쌍하여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말없이 조니를 지켜보던 소년은 조용히 손가락으로 뒤를 가르쳤다.
소년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조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검은색 복면을 쓴 이들이 소리 없이 마차를 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니는 두 손을 번쩍 들어 적의가 없다는 것을 알렸다.
“아이고, 나리. 소인은 그저 시키는 것을 했을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마부 인생 20년. 조니는 능숙하게 상황을 대처해 나갔다.
‘어쩐지 이 새벽에 마차를 몰아달라고 하더니만!’
이런 상황이라면 범죄와 관련되었거나 정치인의 비자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사코 마다하였지만 절친한 친구가 부탁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해 주었던 것에 후회가 막급이었다.
마차를 뒤지던 복면인들은 점점 다급해져 가는 듯 보였고 가려진 얼굴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은 당혹감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서로 눈빛만 주고받던 그들은 이윽고 자취를 감추었다.
조니는 살인멸구를 하지 않고 자취를 감추어준 이들에게 감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오늘은 그나마 운이 좋구먼.”
안도의 한숨을 쉬는 조니는 아직도 멀뚱멀뚱 서 있는 소년에게 말했다.
“그런데 너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거니?”
아무런 말이 없는 소년을 보며 어깨를 으슥해 보인 조니는 계속하여 말을 몰아 목적지로 향했다.
소년은 멀리서 말을 달려 다가오는 청년을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앞에선 청년은 하마하며 소년을 응시하였다.
“그들은 모두 철수하였느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들이 물러갔단 말이지?”
청년의 손에서 튕겨져 나온 금화는 소년의 손으로 향하여 날아가 착지하였다.
자그마한 미소를 그린 소년은 몸을 돌려 빗속으로 사라졌다.
쾅!
천둥이 치며 번개가 뻔적하였다.
순간 환해지는 빛에 드러난 청년의 얼굴은 참 준수해 보였다.
비를 맞고 서 있는 청년의 정체는 다름 아닌 카미엘이었다.
4000만 골드를 위해서는 비를 맞는 수고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감수하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봇짐을 멘 기사들이 변장하여 영주 성으로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멀쩡히 그 많은 재화를 성으로 옮기면 상당히 시끄러워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자금의 유동을 약간 바꾼 것인데,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다.
다행히 사상자가 발생하지도 않았고 조용히 자금은 이동했다.
슬슬 말에 오른 카미엘이 고개들 돌려 정면을 바라보자, 한 인영이 말을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공자님, 자금이 안전하게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수고했다.”
그의 어깨를 두드린 카미엘은 미소를 머금고 말을 달렸다.
“이랴!”
쾅!
“없다? 지금 없다고 하였는가!”
고개를 숙인 복면인들을 향해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청년은 경매장에서 환하게 웃던 93번 청년, 테미안이 분명했다.
‘불꽃’이라고 쓰여 진 간판을 앞에 두고 부동자세를 한 복면인들은 그저 눈치만 볼 뿐이었다.
“마리아!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설명하라!”
어둠 속에서 촛불을 들고 서 있는 여인은 화장기가 전혀 없음에도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었다.
천천히 다가와 촛불을 옆에 놓고 그의 허리에 양팔을 감았다.
테미안의 등에 얼굴을 기댄 그녀는 그의 향기를 한껏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자들이 머리를 쓴 것이겠지요. 자금은 다시 마련하면 그만입니다. 저에게는 그 정도 능력은 충분히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껏 찾았던 물건을 손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복면을 벗은 사내가 천천히 다가와 그의 귀에 속삭였다.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들은 듯 시원한 미소를 짓는 청년은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파밧!
오로지 바람에 옷깃이 스치는 소리만 들릴 뿐 그들이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허리를 감고 있는 그녀의 팔을 천천히 물린 청년은 천천히 밖으로 향했다.
“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와 나의 사이도 마찬가지다.”
양손을 허리에 올린 마리아는 어떤 유혹도 통하지 않는 그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얇은 종이로 말려 있는 담배를 꺼낸 테미안은 성냥으로 불을 당기며 중얼거렸다.
“망나니가 맞긴 한가 보군. 돈에 미쳐 가보를 팔아먹다니.”
카미엘은 창고에 가득한 금화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우리가 한동안 먹고 살기에는 괜찮겠지?”
눈이 휘둥그레진 헥토르는 뒷목을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아니, 공자님! 아무리 그래도 가보를 팔아먹다니요!”
만약 아침이 밝고 영지를 순찰하던 랭턴이 이 광경을 목격한다면 눈이 튀어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헥토르는 다시 금화를 수레에 주워 담으며 말했다.
“이런 것 없이도 이제껏 잘 살아왔습니다. 다시 바꾸어 오십시오. 공작께는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열심히 금화를 주워 담는 헥토르를 보며 카미엘은 환하게 웃었다.
“아마 안 될걸? 누가 물건을 가져갔는지 알 수 없으니까.”
헥토르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카이사르 공작이 무덤에서 깨어나실 일입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금화를 보며 연신 흐뭇한 미소를 짓는 카미엘은 헥토르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다 우리가 잘 먹고 잘 살자는 의미에서 한 일이야. 그렇게 화낼 필요는 없잖아?”
멍하니 카미엘을 보던 헥토르는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났다.
“아무튼 내일 이야기 하시지요.”
돌아서 창고를 빠져나가는 헥토르는 경비병들에게 함구를 당부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3장 신비의 묘약(1)
세상에는 합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을 쥐는 길과 머리를 잘 굴려서 거상이 되는 길이 바로 그것이다.
일단 돈을 벌자면 결정적 계기도 있어야 하고 뚜렷한 목표의식도 있어야 한다.
목표가 있으면 그에 대한 이유가 반드시 생긴다.
카미엘의 경우가 그렇다.
천마신공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돈을 벌어야 한다.
경매장의 일이 밖으로 새어나간 모양인지 카미엘은 순식간에 가보를 팔아먹은 파렴치한이 되었다.
비급을 팔아 생긴 이득으로 생활은 윤택해질지 모르겠으나 가보를 팔아먹은 부분은 질타를 받아야 했다.
맹비난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자신의 목표를 실행해 가던 중 손님이 찾아왔다.
랭턴의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인 제피로스 후작이 카이사르를 방문한 것이다.
접객 실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둘은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각하의 아드님이 벌써 저렇게 장성했었습니까?”
한가롭게 정원을 거니는 카미엘을 보며 제피로스가 말했다.
이에 랭턴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저 허우대만 멀쩡한 허수아비에 불과하네. 저 나이 먹도록 혼담이 없는 걸 보면 아마 소문이 자자한 것이겠지.”
제피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랭턴은 젊어서 수려한 외모와 화려한 입담을 구사하는 멋진 청년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출중한 검술과 인간미 넘치는 성품으로 왕국에서도 꽤나 명망이 높았었다.
비록 영지는 가난하고 점점 쇠퇴의 길을 걸어가지만 인간 랭턴을 놓고 본다면 귀족들 사이에서도 꽤 평판이 높은 편이었다.
“그래도 젊은 시절 각하를 꼭 빼닮았습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봅니다.”
정원에 쭈그려 앉아서 이름 모를 풀포기나 뽑고 앉아 있는 아들을 보자니 랭턴은 속이 터지는 것 같았다.
“글쎄, 내가 젊은 시절에 저렇게 정신 못 차리고 살았나 싶다네. 아니면 아이의 모친이 숨겨놓은 끼가 있었나 싶기도 하고.”
병약하기는 했지만 성품이 곱고 수더분한 외모를 자랑하던 랭턴의 아내는 사교계에서 꽤나 인기가 많았었다.
“설마하니 그렇겠습니까? 언젠가는 공자도 정신을 차리고 비상하는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잡초를 뽑아다 맛을 보고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는 카미엘을 보는 랭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진 않을 것 같아 보이네. 요 며칠 사이에 작은 변화가 있긴 했네만 아직 가망 없어. 차라리 덕망 있는 집안에서 데려가 사위로 삼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멀리서 정원을 거닐고 있는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며 랭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제피로스는 얼굴색을 바꾸며 헛기침을 했다.
“험험, 제 딸은 검공 가문에서 데리고 가기엔 너무 부족한 아이라서 제가 감히 말을 꺼내기 힘듭니다.”
돌려서 말하기는 했지만 혼담은 결사코 싫다는 뜻이었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랭턴은 혼자서 풀이나 뽑고 있을 아들이 더욱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긴 누가 내 아들을 데려가겠나. 빨리 사람이나 만들어야겠어.”
그러던 중 아리따운 아가씨는 랭턴의 아들을 향하여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카미엘이 자리에 쭈그려 앉아서 뭔가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본 제피로스의 딸은 호기심이 발동한 듯 말을 걸 채비를 하는 듯했다.
“어어, 저!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게 남자가 있는 곳에 가다니!”
제피로스는 행여나 딸과 카미엘이 만날까 봐 노심초사하였다.
“좋지 않은가? 선남선녀가 만난다는데? 허허!”
기분이 좋아진 랭턴은 속으로 카미엘을 응원하며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아침 일찍 운기조식을 마친 카미엘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하여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온 뒤라서 아침공기는 신선하고 상쾌하였다.
청량한 공기를 마시며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던 카미엘은 구석으로 눈을 돌렸다.
익숙한 약초가 아침 바람에 흔들리며 그를 맞이하였다.
“오! 유기노초(劉寄奴草)가 이곳에 피다니! 이런 경우도 다 있군 그래.”
곯은 상처나 산후조리에 좋고 칼이나 화살에 베인 곳에 쓰이는 풀이다. 주로 산이나 들에서 자라지만 어쩐 일인지 정원에 피어 있었다.
카미엘은 금창약이라도 만들 요량으로 뿌리가 상하지 않게 뽑아서 흙을 털어내었다.
입으로 나머지 잔여 흙을 털어내 뿌리의 맛을 본 카미엘은 환하게 웃었다.
“역시! 확실히 유기노초가 확실하군.”
이곳은 확실히 의술이 발전되어 있지 않아서 금창약은 요긴하게 쓰일 것 이다.
게다가 이곳의 약초는 상상을 초월하는 효능을 갖고 있는 듯했다.
얼마 전 그 효능을 확인한 카미엘은 약의 성능을 극대화하는 데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카미엘은 얼마나 더 피어 있을지 모르는 유기노초를 채취하기 위하여 허리를 숙여 정원을 살폈다.
이곳저곳을 살피던 그의 눈에 사람의 발이 보였다.
“음?”
천천히 위를 올려다 본 카미엘은 소녀의 미모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동그란 눈과 오뚝한 코, 그리고 약간 옆으로 넓지만 전체적으로 얇은 입술은 오히려 깜찍해보였다.
그녀는 살짝 미소 지은 채 뒤로 깍지를 끼고 있었다.
“당신이 이곳의 공자 카미엘인가요?”
칼리어스는 여성이 관심을 가져 준다는 것은 신사로서 당연히 영광으로 여긴다.
“그렇습니다, 레이디.”
정중히 인사한 카미엘의 손에는 약초가 쥐어져 있었다.
살짝 무릎을 구부려 화답하며 그녀가 말했다.
“저는 제피로스 후작님의 딸 엘레니아라고 해요.”
손을 뒤로하여 깍지를 끼우는 것이 습관인 듯 흡사 뒷짐을 진 자세로 허리를 숙여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약초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쪼그려 앉아서 무얼 하고 있나요? 손에는 이상한 꽃이 있는 것 같은데.”
“약초를 캐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상처 치료에 아주 좋은 효험을 가진 약초입니다.”
전체적으로 씁쓰름한 향이 나지만 기분 나쁜 냄새는 아니었다.
약초에 관심을 보이는 그녀에게 카미엘은 호의를 보였다.
“이것을 달여서 먹으면 달콤한 향이 납니다. 몸에도 좋으니 제가 나중에 찻잎이 완성되면 대접하겠습니다.”
“어머, 감사해요. 그런데 약초에 대해서 잘 아시나 봐요?”
아마 그녀도 카미엘이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예전에 책에서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검상이나 화살 독에 좋은 연고를 만들까 합니다.”
“음, 그렇군요. 오늘은 많이 채집하셨나요?”
“이제 시작을 했으니 오후쯤에는 끝나지 않을까 합니다. 중간 중간에 찻잎도 딸 계획이니 댁으로 돌아가실 때 제가 조금 드리겠습니다.”
엘레니아는 뿌리의 냄새를 한 번 맡아보고는 말했다.
“좋아요! 주신다면 마다하지 않고 받을게요.”
그녀는 슬그머니 카미엘에게 귀를 빌려달라는 시늉을 하였다.
엘레니아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댄 카미엘은 서서히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아버지가 카미엘이라는 공자를 만나면 조심하라고 하더군요. 정원에서 확 덮칠지도 모른다고.”
묘하게 표정이 일그러지던 카미엘은 몇 초 뒤에 큰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그의 안 좋은 소문을 이용한 약간의(?) 농담인 듯했다.
“하하하! 저의 명성이 후작령까지 닿은 모양이군요. 확실히 제가 난봉꾼으로 소문이 자자하긴 하나, 백주대낮에 아름다운 여인을 덮칠 만큼 강심장은 아닙니다.”
그녀는 입가를 가린 채 카미엘과 함께 웃었다.
카미엘은 그녀의 성격이 아버지를 닮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제피로스 후작은 검술과 병법에 대한 경지가 높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의(義)와 덕(德)을 지킴은 물론이고 성격이 좋아서 사람 좋다는 평을 얻고 있었다.
공작령이 위기를 맞을 때면 발 벗고 나서는 것을 보면 젊은 시절 의리를 철저히 지키는 것이리라.
“역시 후작님의 영애다운 재치를 가지고 계시군요. 괜찮으시면 제가 야생초를 말린 차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저야 영광이죠, 공자님.”
카미엘의 애프터 신청을 엘레니아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어떤 의도인지는 몰라도 망나니 공자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지 않은 것을 보면 확실히 싫어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