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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엘 전기 1권(6화)
3장 신비의 묘약(2)
“저런 지조 없는!”
창밖으로 보이는 딸의 행각에 좌불안석 엉덩이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제피로스를 보며 랭턴은 유유히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아니, 의자에 불이라도 났다던가? 자꾸 일어섰다 말았다 하는가? 후작이라는 사람이 말이야.”
“험험, 그게…….”
딸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다.
열이면 열, 멀쩡한 놈이 딸에게 관심을 갖는다 해도 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무남독녀 외동딸이, 그것도 소문난 망나니에게 넘어가게 생겼다.
제피로스의 입술이 타들어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렇게 보여도 심성은 착한 아이야. 그것은 자네도 잘 알 것이 아닌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냥 관심만 갖는 것인데 무슨 일 있겠는가?”
아들을 가진 아버지는 속으로 그를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 마음을 추스르려는 듯 뜨거운 차를 한 번에 꿀꺽 삼킨 제피로스는 몹시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고 있었다.
연신 헛기침을 하며 랭턴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것이 마음이 상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랭턴도 제피로스의 반응에 썩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이윽고 랭턴은 살짝 화가 난 말투로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아니, 내 아들이 영애에게 다가서는 것이 그렇게 못마땅한가?”
아무리 사람 좋기로 유명한 제피로스라고 하지만 딸의 일만큼은 입장이 다른 듯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딸은 능력 있는 청년에게 주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카미엘 군이 능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고…….”
“알고 있네. 내 아들놈이 무능력한 망나니라는 것을. 하지만 효성이 지극하고 사람의 경우는 아는 놈일세. 남자가 그 정도면 되었지. 안 그런가? 그리고 요즘 작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 않았나?”
제피로스는 뭐라 반박을 하고 싶은데도 꾹 참는 눈치였다.
젊은 날에 워낙에 절친하고 랭턴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터라 더 이상 의가 상하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전에는 산에서 무슨 약초를 캐다가 금창약이라는 것을 만들었다네. 어디서 알아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효과가 대단하다네.”
며칠 전 랭턴은 아들의 숨겨진 능력을 발견하였다.
의술이 발달되지 않은 칼리어스의 기술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능력이었다.
“금창약이라,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입니다.”
생소한 단어에 금세 호기심을 갖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는 제피로스를 보며 랭턴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상처가 난 사람에게 효과가 대단하더군. 얼마 전에 시녀 중 한명이 계단에서 굴러서 얼굴에 대문짝만한 상처가 난 사고가 일어났었네. 그런데 카미엘이 만든 연고를 바르고 며칠이 지나자 씻은 듯 나았지 뭔가?”
“농이 심하십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제피로스는 랭턴이 아들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려 과장을 한다고 생각했다.
랭턴은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며 진지하게 말했다.
“나도 처음엔 믿지 못했다네.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순간, 정말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네.”
“설마요.”
만약 사실이라면 이것은 왕국에 큰 파란을 가져올 만한 일이다.
의학의 발달이 거의 전무할 정도로 형편없는 의술을 가진 칼리어스로서는 어쩌면 카미엘이 위인의 반열에 오를 만한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잘만 하면 신성제국에서 비싼 돈을 주고 사제를 데려와 상처를 치료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만약 이것이 전쟁에 도입된다면…….”
제피로스의 눈이 번쩍 뜨인다.
아직 사실이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랭턴은 허위로 사람을 기망하는 인물이 절대 아니다.
“일단은 아들놈이 만들어놓은 약들을 확인하러 가세. 내가 오늘 자네를 초대한 까닭은 이것에 있었네.”
제피로스는 반신반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아버지의 대화가 무르익는 동안 청춘남녀의 데이트도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엘레니아는 진심으로 그와의 대화가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또래의 소녀들이 다 그렇겠지만 별것 아닌 얘기에 폭소를 자아내는 것이 카미엘에게는 탄력을 제공한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익살스럽게 대화를 이끌어가는 카미엘은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생전 자신이 이렇게 말을 잘 했나 싶기도 하고 원래 자아의 주인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향기로운 들꽃을 따다 말려 우려낸 차는 그 향기만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아마 이것도 그녀와의 즐거운 시간을 만드는 데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공자님은 말씀을 참 잘하시네요. 정말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요.”
사람이 호감을 느끼는 것은 얼굴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이미 그녀의 표정과 눈빛이 카미엘에게 푹 빠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영애께서 저의 별것 아닌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 주시니 저야말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 보세요. 정말 물 흐르듯 말을 잘 하시잖아요. 다른 여인들도 공자님께 분명히 호감을 갖고 있을 것 같아.”
살짝 새침해진 표정으로 팔짱을 끼운 엘레니아는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자고로 통통 튀는 맛이 있어야 한다.
만약 여인이 남자에게 한 번에 넘어가버리면 남자는 그 여인에게 금세 흥미를 잃고 만다.
엘레니아의 행동은 여자의 본능에서 나온 것일 확률이 높다.
“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후훗!”
카미엘은 허둥지둥 그녀의 페이스에 맞춰준다.
당황하는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엘레니아는 살짝 웃으며 그를 곁눈질 한다.
“참고로 저는 바람둥이를 싫어한답니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저는 바람둥이의 근처에도 못가는 사람인지라.”
왠지 간이라도 빼서 보여줄 것 같은 그의 눈빛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장난이에요. 공자님이 어디를 봐서 그럴 사람으로 보이나요?”
남자를 쥐락펴락하는 엘레니아는 천상여자가 분명해 보였다.
한편 문 밖에서는 두 사람이 들어갈지 말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카미엘은 그녀에게 귀를 잠시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녀는 눈이 동그래져서 카미엘 쪽으로 몸의 중심을 옮겼다.
그의 따뜻한 숨결이 느껴지자 엘레니아는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밖에 아버님과 후작께서 계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먼저 인기척을 해야 기다리시는 일이 없으실 텐데.”
엘레니아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먼저…….”
순간 가까이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이런 경우 눈빛이 통했다고 하는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몸이 그녀를 향해 움직이는 카미엘의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
쿵쾅!
긴장하긴 그녀도 마찬가지.
두 눈은 커다랗게 확장되고 심장소리가 들릴까 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그의 접근을 허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고 밀쳐내면 그가 민망해 하지는 않을까?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교차하느라 정신이 없는 그녀와는 반대로 카미엘은 본능에 충실하고 있었다.
비록 첫 만남이긴 하지만 키스를 하지 말라는 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은 남자의 기교와 능력에 따른 것이다.
마침내 그의 두 눈이 강렬하게 타오르며 의지를 굳건히 다지자 그녀 또한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사뭇 진지하다.
또래의 남자들과는 다른 무게감을 가진 카미엘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번에는 그녀도 천천히 그와의 거리를 좁혀왔다.
풋풋한 첫 키스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똑똑.
“험험! 자네 거기 있는가?”
눈이 번쩍 뜨이며 뭔가 복잡한 표정을 짓는 카미엘을 보며 엘레니아는 웃음을 지었다.
억울함과 분노, 아쉬움이 섞여 있다고나 할까?
아직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카미엘은 억지로 문을 열었다.
“후작님! 이곳까지 직접 오시다니. 소인을 부르시면 될 것을…….”
고개를 숙이며 제피로스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는 카미엘은 어쩐지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제때 현장을 덮쳤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짓는 제피로스는 카미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네도 언젠가는 공작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아닌가? 자고로 남자는 발걸음이 가벼워선 안 된다네. 그렇지 않습니까, 각하?”
미소를 짓는 그와는 반대로 랭턴은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
남자라면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은 눈치채는 것이 당연하다.
랭턴도 남자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한 일이 얼마나 짓궂은 일인지 알고 있다.
“험험, 글쎄. 아무튼 식사나 하러 가자고. 이미 점심때가 지난 것 같으니.”
슬며시 엘레니아의 표정을 살핀 랭턴은 미소를 지었다.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누가 보아도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감정이 복잡하게 섞인 네 사람은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사가 이어지는 내내 카미엘과 엘레니아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서로 눈빛을 맞추며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이제는 슬슬 안 보이는 곳으로 장난도 주고받는 것 같아 보였다.
이 모습이 좋아 보일 리 없는 제피로스는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험험! 아참, 전하께서 아까 말씀하신 사항을 좀 자세히 들어보고 싶습니다.”
본래 식사의 목적이기도 했고 화제를 전환해야 꼴 보기 싫은 광경이 없어질 것 같아 제피로스가 말했다.
흐뭇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랭턴은 그제야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하세. 카미엘이 저번에 금창약을 만들었었지. 정확한 효능과 치료 범위를 말해 보거라.”
이윽고 시선이 그에게 몰렸고 엘레니아는 몸을 앞으로 당기며 그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 모습을 본 제피로스는 어쩐지 더욱 표정이 좋지 않았다.
“금창약(金瘡藥)이란 검이나 화살로 생긴, 그러니까 쇠가 낸 상처에 사용하는 약입니다. 그 밖에도 상처가 곪거나 짓물렀을 때 사용합니다. 제가 알고 있던 원료들의 효과보다 카이사르의 약초가 효과가 월등이 높아 보입니다. 그래서 얼마 전 시녀가 얼굴을 다쳤을 때도 놀라운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제피로스와 랭턴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흥미를 보였다.
카미엘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테이블에 금창약이 담긴 상자를 내려놓고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 시켜주었다.
“지금 보시는 흰색 연고가 바로 금창약입니다. 비록 연구가 더 진행이 되어야겠지만 만약에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면 엄청난 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하다고 사료됩니다.”
아직 카미엘의 말을 백퍼센트 신용하기는 힘들지만 확실한 결과만 있다면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생각에 잠긴 아버지들에게 카미엘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제가 일전에 집안 대대로 내려져 오는 가보를 팔아먹었다는 소문이 자자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아버지와 후작 각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줄로 압니다.”
순간 랭턴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제피로스도 깊은 신음을 흘렸다.
“방법이 옳지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금창약의 유통의 기반을 마련할 자금을 확보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계속되는 의외의 모습에 두 사람은 놀라고 있었다.
예전의 카미엘이라면 아마 이런 추진력을 갖출 수 없었을 것이다. 뭔가 심경의 변화가 왔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부탁이라……. 우리 둘에게 말이냐?”
랭턴의 눈을 바라보는 카미엘은 결의를 다진 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두 분께서 유통로를 만드는 데 힘을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자금력이 없으나 랭턴의 정치적 입지는 결코 작지 않았으므로 카미엘의 자금과 랭턴의 연줄을 사용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허나 자네가 말한 사업이 승승장구한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확실히 효과가 입증된 것도 아니고.”
제피로스는 사업 얘기가 나오자 다시 예전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돌아왔다.
카미엘은 식탁에 놓여져 있던 포크를 높이 들었다.
“잠시 제가 불경스러운 행동을 해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푹!
놀랍게도 카미엘은 스스로 자신의 손등에 날카로운 포크를 찔러 넣었다.
혈액이 상처 사이로 새어나왔고 엘레니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그의 상처를 돌보려 했다.
그러자 카미엘은 그녀를 만류하며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였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인가? 자신의 손등에 상처를 내다니!”
뭔가 훈계를 하려는 제피로스를 만류한 랭턴은 카미엘을 가르쳤다.
그는 금창약의 뚜껑을 열어 연고를 상처가 난 손에 발랐다.
이윽고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상처가 아물며 피가 멈추었다.
아직 새살이 차오르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상처가 아무는 것 같았다.
랭턴을 비롯한 이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자신들의 눈앞에 일어나자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힘든 것 같았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사업은 확실히 성공합니다. 만약 약의 보급이 가능해지면 국가로서는 막대한 이득이 생기겠지요. 전쟁에서 생긴 상처는 대부분 칼로 낸 것일 테니.”
카미엘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제피로스와 랭턴에게 말했다.
“두 분께서 저를 한 번만 믿어주시면 놀라운 결과를 안겨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저의 모든 것을 건 약속입니다.”
또래 젊은이와 다른 포부와 야망을 확인한 제피로스는 이전보다는 표정이 많이 풀어져 있었다. 망나니로 유명한 카미엘을 조금은 다시 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