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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엘 전기 1권(7화)
3장 신비의 묘약(3)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제피로스는 팔짱을 끼우며 말했다.
“만약 본인이 투자한 금액이 상환되지 않는다면 어쩔 것인가?”
카미엘은 패기가 가득한 얼굴로 제피로스를 응시하였다.
거칠 것이 없다는 것은 젊은이의 특권일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제 목숨을 걸지요.”
랭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껏 한 번도 결의에 찬 아들의 눈빛을 본 적이 없던 그는 흐뭇함과 놀라움이 공존하는 듯 입을 열지 않았다.
제피로스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랭턴에게 말했다.
“각하, 저는 이 젊은이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습니다만. 어떠십니까?”
“음……. 글쎄. 좀 더 경과를 지켜봐서 완벽한 준비가 마쳐진다면 한 번 고려해보겠다.”
카미엘은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패기 넘치고 당당한 목소리고 두 사람을 설득하는 모습을 지켜본 엘레니아는 그가 더욱 마음에 들었던지 강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딸의 눈빛을 본 제피로스는 아직도 못 마땅한지 헛기침을 하였다.
“험험! 그러나 카미엘 군이 다 타버리겠구나. 엘레니아!”
흠칫 놀란 엘레니아는 얼굴을 붉히며 물을 들이켰다.
찝찝한 표정이 된 제피로스는 가까스로 감정을 다잡고 말했다.
“아무튼 생각해 주신다니 다행입니다, 각하. 밤에 셋이 모여서 긴히 술이나 한잔 하면서 대화를 계속 하시지요.”
아직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랭턴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세. 오늘은 아들과 대작을 하게 생겼군.”
랭턴과 제피로스가 술을 권하자 카미엘은 고개 숙여 답했다.
“영광입니다.”
카미엘을 다시 본 제피로스는 그래도 의심이 가는지 오늘밤 있을 술자리에서 결판을 내겠다고 다짐했다.

***

카이사르의 여름을 알리는 소리는 카미엘의 귀를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산의 중턱에 오른 그는 폐부 깊숙이 숲의 청량한 기운을 머금어보았다.
향기로운 흙냄새와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 소리가 어우러져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등산을 하면서 본 카이사르는 야생동물이 참 많은 지역이었다.
고라니와 멧돼지가 심심찮게 뛰어다니고 있었고 가끔 멀리서 맹수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수렵으로 생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테지만 맹수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산적의 횡포일 것이다.
랭턴의 혈압약을 구하기 위하여 산에 들어온 카미엘은 체력단련도 할 겸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검을 수련하다 보면 생기는 상처에 바르기 위한 금창약을 만들어 기사들과 나누어 쓰다 보니 그 수요가 상당히 빈번해져 있던 이유도 있었다.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 그의 눈에 흔치 않은 광경이 들어왔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은 불구경이고 그 다음은 싸움구경이라 했던가?
동굴이 있는 공터 앞에서 맞닥뜨린 곰과 범을 보았다.
곰과 범을 따로 보기도 힘든데 함께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눈빛을 주고받으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평생 동안 산만 누벼도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일 것이다.
흥미가 생긴 카미엘은 기척을 숨긴 채 둘의 승부를 구경하였다.
마주한 범과 곰은 서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덩치로 보면 호랑이가 열새로 보이지만 그 맹렬함으로 보면 승부를 점치기 힘들어 보였다.
선공을 시작한 쪽은 범이었다.
퍽!
앞발로 곰의 안면을 후려친 호랑이는 측면으로 돌며 곰을 교란하였다.
처음 몇 대를 맞아주던 곰은 금세 감각을 찾았는지 몸을 일으켜 호랑이에게 유효적인 공격을 가했다.
호랑이의 민첩함인지, 곰의 육중한 무게감일지 전혀 상반되는 둘의 싸움은 실로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마치 인파이터와 그래플러의 대결을 보는 듯 흥미진진한 싸움이 이어졌다.
끝이 없는 잔타를 날리던 호랑이는 곰의 카운터에 저만치 날아 가버렸다.
퍽!
“카오!”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구른 호랑이는 더 이상의 승부가 불가능하다 여겼던지 자리를 피해버렸다.
산중호걸이라 하는 호랑이도 역시 불곰은 버거운 상대인 듯했다.
하지만 녹록치 않았던 호랑이였던지라 곰의 이곳저곳에는 깊은 상처가 나고 말았다.
“우웅…….”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피를 흘리며 괴로워하던 곰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하늘색 꽃잎을 뜯어먹고 몸에 비비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아마 곰들의 응급처치 법이리라.
동물들은 자신들 나름대로의 구급법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를테면 호랑이는 속이 좋지 않으면 풀을 뜯어먹는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리려던 그의 눈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피가 철철 흐르던 곰의 상처가 지혈이 되며 조금씩 아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니!”
당장 살이 차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피가 멈추고 더 이상 상처가 벌어지지 않는다.
저렇게 깊고 넓은 상처가 어찌 한 번에 치료가 되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운신이 가능해진 곰은 자리를 떠나자 카미엘은 황급히 곰이 있던 자리로 가 보았다.
회청색의 꽃잎은 양끝이 좁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카미엘의 눈이 번쩍 떠진다.
“도라지?”
‘길경(桔梗)’이라고도 하는 여러해살이 풀.
진통, 진정, 해열 작용이 있어 소염진통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염작용을 한다고 해서 당장 눈에 띄는 효과를 가져 오는 식물은 좀처럼 없을 것이다.
게다가 곰이 먹은 것은 꽃잎이었다.
도라지의 효능은 어디까지나 뿌리에서 얻어내는 것이다.
“연구대상이 많은 곳이군.”
사람들과 동물들의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고 느끼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그 역시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도라지는 재배가 가능하다.
만약 도라지꽃을 따다 약을 만들면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거기에 자신이 알고 있던 금창약 제조법에 도라지꽃을 첨가한다면 상당한 치료효과가 있을 것이다.
손에 올려져 있는 도라지의 뿌리를 털어내 맛을 보려던 그는 깜짝 놀라 도라지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헤헤!”
마치 간지럼이라도 타는 것 마냥 꿈틀거리며 웃음소리를 내었다.
“내가 정신이 이상해진 것인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자신의 따귀를 직접 때려본 카미엘은 볼 언저리가 따끔해 오는 것을 느꼈다.
짝!
“꿈은 아니고…….”
바닥에 떨어져 파닥거리는 도라지는 심지어 뛰어다니기까지 했다.
“헤헤, 헤헤!”
마치 비오는 날 정신 줄을 놓은 꼬마아이처럼 뛰어다니는 도라지를 보며 카미엘은 할 말을 잃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저 입을 다물지 못할 뿐이었다.
발광하는 도라지를 잡아다 가방에 집어넣은 카미엘은 흔들리는 가방을 보며 말했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풀뿌리도 정신이 나갔나 보군.”
뭐가 그리 좋은지 자꾸 웃어대는 도라지 때문에 정신이 없던 카미엘은 문득 주위를 돌아보았다.
“헤헤!”
“하하!”
엄청난 숫자의 도라지들이 그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가 하면 옆으로 구르고 엎어지고 난리법석이었다.
만년동안 차가운 눈 속에서 잠을 잔 산삼은 뛰어다닌다는 전설이 있지만 멀쩡하게 생긴 도라지가 웃음소리를 내며 뛰어다닌다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귓가에 맴도는 웃음소리 때문에 정신이 나갈 것 같던 카미엘은 뛰어다니는 도라지를 모조리 잡아다 가방에 넣어 버렸다.
그래도 웃음소리를 멈추지 않아 화가 난 카미엘은 가방을 땅에다 집어 던져버렸다.
“시끄러워!”
퍽!
“…….”
이윽고 잠잠해진 도라지를 보며 한숨을 내쉰 카미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산을 내려갔다.
“요즘 몸이 허약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이 확실해.”

“그래서 요점은, 그 미친 풀포기를 이곳에 잡아왔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술기운에 얼굴이 빨개진 제피로스는 그의 말도 안 되는 증언에 박장대소하였다.
“푸하하! 자네 허풍이 도를 넘어서는군. 하긴, 사내에게 허풍은 생명이나 다름없는 것이지.”
“그게…….”
카미엘은 품속에 잘 갈무리하였던 흰색 천 뭉치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이 무엇이냐?”
대뜸 천 뭉치를 꺼내어 식탁에 올리는 아들을 보며 랭턴은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보시면 압니다.”
잎사귀가 살짝 시들어 힘이 없이 축 쳐진 도라지를 꺼낸 카미엘은 식탁에 있는 물에 도라지를 살짝 담갔다.
푸다닥!
순간, 마치 기절해 있던 물고기가 깨어나는 것 마냥 파닥거린 도라지는 이내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식탁 위를 질주하였다.
“헤헤!”
랭턴과 제피로스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투명한 물 잔을 뒤집어 도라지를 가둬버린 카미엘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것이 조금 방정맞습니다.”
살짝 고개를 털어 정신을 차린 랭턴은 아직도 발광을 하고 있는 도라지를 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무슨 풀포기가 저렇게 정신사납단 말이냐?”
제피로스는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되는 듯 연신 눈을 끔뻑이며 초점을 맞췄다.
“이렇게 많은 개체가 있었는데 왜 아직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일까?”
“아마도 도라지는 인적이 드문 곳에 피는지라 산의 출입이 적은 카이사르에선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좁은 유리잔이 답답한지 자꾸 이리저리 구르며 탈출을 꾀하는 도라지를 보며 랭턴은 턱을 집으며 말했다.
“그런데 저것이 상처를 치료하는 데 핵심이 되는 것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유리잔에 들어 있는 도라지를 꺼내어 한 입 베어 물려던 제피로스는 이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마치 살아 있는 물고기를 통째로 씹어 먹는 것 같아서 징그러운 생각이 드는군.”
몸서리를 치며 탁자 위로 도라지를 휙 집어던진 제피로스는 말했다.
“그래, 나는 자네 말에 확신이 드네. 설마하니 진짜 미쳐 돌아다니는 풀이 있을 줄은 몰랐네. 땅콩으로 와인을 만든다고 해도 자네 말이면 왠지 신빙성이 갈 것 같군.”


4장 망나니 카미엘의 갱생(1)


칼리어스의 수도 체르나.
왕국의 주인 칼번이 주최하는 귀족회의가 소집되었고 속속들이 각 지방의 영주들이 도착하였다.
그중에는 칼리어스의 검술의 본고장이라 불리는 카이사르의 영주 랭턴도 참석하였다.
국왕이 신하들과 국정을 논하는 자리인 대전에는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과 친분을 다지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국왕은 모든 신하들이 모이기 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자투리 시간은 친목을 다지는 용도로 사용되곤 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망나니로 유명한 공작의 아들도 참석하였다.
정치적으로 입지를 굳히는 데 이만한 장소가 없기 때문에 가문을 대표하는 아버지가 참석을 하면 아들도 따라서 입장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 없던 카이사르의 장남이 얼굴을 드러내자 귀족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오, 자네가 카이사르 공작의 아드님이신가? 젊은 시절 공작을 쏙 빼다 박았군 그래.”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칼리어스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랭턴의 정적 시리스 공작이었다.
풍요로운 영지를 소유한 시리스는 권모술수에 능했고 잔인한 손속이 특징이었다.
5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한 절대동안의 외모에 군살이 전혀 없는 탄탄한 몸은 그의 평소 생활이 얼마나 체계적인지 보여주었다.
랭턴 공작과는 젊은 시절 의기투합을 한 적도 있었으나 정치적 뜻과 이념이 달라 결국에는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귀족파의 수장이 된 시리스가 왕당파 랭턴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과찬이십니다. 제 아버지를 따라가려면 아직 백년은 이릅니다.”
소문과는 다른 정중한 모습에 시리스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듣던 것과 아주 많이 다른 것 같군. 역시 소문은 소문일 뿐인가? 아니면 다른 이면이 있던지. 후리고 다닌 처자만 백 명이 넘는다고 하던데.”
순간 랭턴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분노를 삭이는 모습을 보였다.
가문을 이을 아들이 없던 시리스는 유독 랭턴에게 아들에 대한 흉을 많이 보았다.
오늘은 흉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놓고 욕을 하는 바람에 랭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살핀 카미엘은 표정을 풀며 입을 열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문이 이곳까지 닿은 걸 보니 옛말 하나 틀린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발이 없는 말은 정상적인 경로로 여행을 할 수 없지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는 않는 법이네. 행실을 단정히 하고 지금부터 검술에 정진한다면 자네 아버지의 발끝에는 미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소문을 듣자 하니 검술에는 문외한이라던데. 검공의 아들이 문외한이라니. 참 아이러니하구먼. 하하!”
포근한 미소가 무기인 시리스는 겉으로 보기엔 무척이나 사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미소 뒤에 가시를 섞어 오히려 더 사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