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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엘 전기 1권(8화)
4장 망나니 카미엘의 갱생(2)


말도 안 되는 구실로 자신에게 훈계를 하려는 시리스의 의도를 잘 알고 있던 카미엘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검술에 문외한이긴 합니다만, 공작의 기사단보다는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뭐라!”
“카, 카미엘!”
카미엘의 도발에 시리스는 물론이고 랭턴을 포함한 각지의 영주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것은 명백한 도전이다.
계기가 어찌되었던 도전을 한 기사는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바래왔던 대답을 들은 시리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는가? 자네는 우리 영지의 명예를 훼손하는 발언을 하였네. 어찌할 것인가, 랭턴 공?”
당황한 랭턴과는 다르게 여유로운 표정을 한 시리스는 카미엘을 보았다.
“제가 할아버님의 검술을 책으로나마 익히긴 했습니다만 그 경지가 미미해 아버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공작 각하의 기사단장을 한손으로 제압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도전을 넘어선 명백한 도발행위를 자행하는 카미엘을 향해 강한 적의를 들어낸 시리스는 분노하며 말했다.
“말이면 다인 줄 아는가! 기사도가 전혀 없는 청년이군. 만약 우리 기사단에게 패배한다면 자네의 목은 나에게 바친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카미엘은 순간 공력을 발동했다.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 대단한 살기를 발산한 카미엘은 여유로운 말투로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살기?’
랭턴과 시리스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검술을 접해 본 적도 없는 카미엘의 몸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풍겨져 나왔다.
두 사람은 다른 점으로 인하여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제가 두 손을 사용하기라도 한다면 기어서 카이사르까지 내려가겠습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며 화를 삭이지 못하는 시리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그 말 뼛속깊이 후회하게 될 것이네.”
뒤돌아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시리스의 뒤로 그의 측근들이 따라붙었다.
대단한 사고를 친 아들을 보며 그저 입만 뻥긋거리며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랭턴을 대신하여 옆에 있던 제피로스가 입을 열었다.
“자네 너무 무리한 수를 두었네. 아무리 시리스 저자가 입을 멋대로 놀린다고 그에 따라간다면 그건 자네가 패배하는 것 일세.”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제피로스는 경솔했던 그의 실수를 지적해주었다.
“우리도 자네 같은 시절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알게 된다네. 이번 일기토는 없던 것으로 해 주겠네.”
카미엘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랭턴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자가 불경하여 아버님 앞에서 몹쓸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하지만 남아가 뱉은 말은 목이 달아나도 지켜야 한다는 할아버님의 말씀을 책으로 보았습니다. 저는 오늘 시리스 공작의 기사단을 박살내겠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뭐라 말을 하려던 제피로스는 국왕의 등장을 알리는 나팔소리에 그 뜻을 다하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빠밤!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금색 휘장을 어깨에 두른 국왕 칼번이 모습을 드러냈고 신하들은 모두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하였다.
“국왕 폐하를 뵈옵니다!”
공작 랭턴의 선창으로 모든 신하들이 뒤따라 제창하였다.
손을 들어 일어날 것을 명한 칼번은 금빛 옥좌에 자리하였다.
이제 희끗희끗 이곳저곳에 흰머리가 자리한 칼번은 그 나이가 무색하게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그의 존재만으로 넓은 대전이 꽉 차는 것 같았다.
국왕의 카리스마가 물씬 풍기는 칼번은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금일은 짐과 그대들이 국정을 논하는 자리다. 각자 가지고 온 사안을 놓고 발표하도록 하라.”
칼번의 주최로 시작된 회의는 여러 가지 사안이 나왔고 국명으로 통과되는가 하면 귀족들의 반발로 부결되기도 했다.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고 말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무리 일국의 국왕이지만 그 또한 사람인지라 시간이 지날수록 피곤한 기색이 짙어져 갔다.
그것은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인지 길어진 회의에 모두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던 중 시리스 공작은 대전이 떠나갈 듯 외쳤다.
“폐하! 소신 시리스, 폐하께 간청이 있습니다.”
대신들의 의견을 조리하여 적고 있는 서기에게 뭔가를 지시하던 칼번은 고개를 돌려 시리스를 응시하였다.
“말하라.”
“검공 랭턴의 아들 카미엘이 신의 기사단을 모욕하는 언사를 하였사옵니다! 하여 카이사르 기사단의 카미엘과 루시엘 기사단장 라파엘로의 결투를 윤허해 주시기를 간청 드리옵니다!”
랭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올 것이 오고 만 것이다.
“흠……. 그렇단 말인가? 그대는 어떠한가? 랭턴의 아들 카미엘.”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칼번에게 패기 있게 답했다.
“소신 카미엘 아뢰옵니다. 대회의가 열리기 전 소신이 시리스 공작의 기사단장에게 도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단 한 손으로 상대한다 말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폐하께서 윤허하신다면 최선을 다하여 겨루어 보고 싶습니다.”
웅성웅성.
카미엘의 폭탄발언에 대전은 온통 술렁이기 시작했다.
제피로스는 한쪽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좌절했다.
칼번은 부복한 카미엘을 보며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짐은 오늘 정오 두 사람의 결투를 윤허한다. 장소는 이곳 대전이 될 것이다. 대결의 증인이 될 대신들은 정오까지 이곳에 모이기 바란다.”
대신들은 삼삼오오 대전을 빠져나갔고 시리스는 카미엘에게 차가운 미소를 날렸다.

해가 가장 높게 뜬다는 정오.
대전의 중앙에 갑주를 차려입은 카미엘과 라파엘로가 마주하고 있었다.
카미엘의 은빛 갑주에는 비상하는 매가 새겨져 있었다.
묵 빛 검집에는 칼리어스의 상징인 붉은 장미가 새겨져 초대 검공의 자손임을 증명하였다.
화려한 백색 갑주를 입은 라파엘로는 마주선 카미엘을 주시했다.
투구 사이로 삐져나온 검은색 머리칼은 그가 랭턴의 아들임을 가늠케 하였다.
전체적으로 뚜렷한 이목구비는 부드러운 인상을 풍겨 그야말로 꽃미남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렸다. 그러나 진하고 강렬한 눈동자는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어 부드러운 인상을 덮어버렸다.
라파엘로는 이미 불혹을 넘긴 자신이 이제 갓 약관을 넘긴 기사와 대결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대결이다.
젊고 준수한 저 청년이 목숨을 잃는다면 그 아버지는 평생을 눈물로 살 것이다.
하지만 기사의 자존심은 목숨보다 귀중한 것이다.
자존심을 건 대결은 저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숨을 내쉰 라파엘로는 굳게 마음을 먹었는지 결연한 눈빛으로 칼번을 보았다.
칼번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검집에서 검을 꺼내어 내리 잡았다.
카미엘은 예리한 검 날을 세운 그를 보았다.
이윽고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검을 꺼내어 들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대전.
칼번은 긴장의 균형을 깨며 말했다.
“시작하라!”
카미엘과 라파엘로는 천천히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는 라파엘로의 자세와는 다르게 어딘가 엉성해 보이는 카미엘은 검을 아래로 늘어트린 모습이었다.
시리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가 보기엔 정말 랭턴의 아들은 검에 대해서 백치로 보였던 것이다.
‘랭턴 너의 분신을 반쪽 내주마!’
랭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잘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시작된 대결은 그의 힘으로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이젠 아들을 믿어볼 수밖에 없다.
팽팽한 긴장감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균형을 먼저 깬 쪽은 라파엘로였다.
직선으로 빠르게 찔러져오는 검은 상당히 날카롭고 단단해 보였다.
챙!
선공을 한 라파엘로의 눈을 보며 미소를 날린 카미엘은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검은 운이 좋게 그의 검을 쳐낸 것 같았다.
적어도 관중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속으로 헛물을 삼키고 있었다.
손이 얼얼하다 못해 어깨 부근이 저려온다.
아무리 완력이 좋다고 해도 평생 검과 동고동락했던 팔이 저릴 정도의 공격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려오는 팔을 앞뒤로 돌리며 라파엘로가 말했다.
“어쩐지 젊은이가 너무 용기 있다 했더니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군.”
라파엘로는 긴장된 표정으로 한 발자국 물러나 다시 자세를 잡았다.
어쩌면 그는 괴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젊은 나이에 그 성취를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경지를 가졌다.
게다가 엄청난 완력.
뛰어난 검객의 탄생은 기사로서 축하할 일이지만 지금은 목숨이 걸린 결투 중이다.
라파엘로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몇 번의 검을 더 섞으면 손에서 검을 놓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미엘은 이윽고 검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척!
검을 찌를 듯이 내리잡고 한 손은 손바닥이 보이게 앞으로 내밀었다.
자세를 낮춘 카미엘은 앞으로 쏘아져 나갈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늑대와 같은 자세를 한 그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팟!
화살처럼 전방으로 쏘아져 나간 카미엘은 무서운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챙!
일격을 막은 라파엘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겨우 한 손으로 휘두른 공격에 두 팔이 떨려 옴을 느꼈다.
손이 저린 것을 느낌도 잠시, 왼쪽으로 휘어져 들어오는 검을 보며 라파엘로는 몸을 틀어 피해냈다.
한 바퀴 회전하며 거리를 벌린 라파엘로의 이마에는 어느 새 땀이 맺혀 있었다.
다시 공격 자세를 취하는 카미엘은 이번엔 메뚜기처럼 뛰어 올랐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그는 무게중심을 검에 실으며 라파엘로의 머리를 종으로 노리며 들어갔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카미엘을 보며 라파엘로는 급히 검을 들어 막아냈다.
챙!
두 손으로 막아낸 라파엘로는 서서히 몸통과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척추가 떨려서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온몸이 떨려오는 라파엘로는 가까스로 그의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조금 더 있으면 다리가 풀릴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캉!
이윽고 검을 들어 올린 카미엘은 무표정하게 그의 검을 툭 내리쳤다.
가볍게 내리친 카미엘의 검은 라파엘로를 그 자리에 무릎 꿇렸다.
캉!
이어서 다시 내려친 검으로 인하여 라파엘로는 검을 놓치며 뒤로 넘어졌다.
“컥!”
명백한 패배다.
변변한 공격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패배한 것이다.
카미엘은 검을 들어 그의 목에 겨누었고 고개를 들어 칼번을 보았다.
대결에서 승리한 기사는 상대의 생사를 결정하게 된다.
국왕은 뜻대로 하라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카미엘은 검을 높게 들어 라파엘로의 목을 겨누었다.
시리스의 얼굴은 무참하게 구겨졌고 라파엘로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흐읍!”
목을 향하던 검은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 쳤고 이윽고 바닥과의 마찰음을 냈다.
캉!
그대로 대전의 바닥에 박힌 검은 라파엘로의 목 바로 옆에 위치하였다.
자신이 죽지 않은 것을 확인한 라파엘로는 목 언저리를 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묵 빛 검 집에 검을 꽂아 넣은 그는 고개를 숙여 칼번에게 예를 표하였다.
순간 대전에는 정적이 흘렀다.
단지 지금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려 애를 쓸 뿐이었다.
눈을 뜨고도 믿기 힘들었다.
망나니로 유명한 카미엘이 일개 기사단장을 너무나 손쉽게 꺾어버린 것이다.
라파엘로는 일어나 무릎을 꿇었고 자신의 검을 빼어 카미엘에게 내밀었다.
“승부에서 이겼으니 그대의 마음대로 하시오.”
승부에서 패배한 기사는 명예를 잃었으므로 승리한 기사에게 자신의 검을 바친다.
라파엘로는 검을 내밀어 자신의 자존심을 카미엘에게 주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카미엘은 그의 검을 정중히 사양하였다.
“승부는 끝났소. 검을 집어넣고 당신의 기사단으로 돌아가시오.”
카미엘의 아량에 귀족들은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짝!
고개를 숙인 라파엘로는 칼번에게 예를 표하고 대전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랭턴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카미엘은 아버지에게 검을 들어 보이며 당당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