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카미엘 전기 1권(9화)
4장 망나니 카미엘의 갱생(3)
카미엘이 망나니라는 것은 칼리어스에 사는 사람이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얼마나 한량 짓거리를 하고 다녔는가 하면, 여자들이 자신을 배신하는 남자에게 하는 말이 ‘이 카미엘 같은 놈!’이다.
그만큼 카미엘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만약 정치계에 입문하지 않고 사업을 추진했다면 큰 낭패를 볼 것이 분명했다.
제품은 그 사람의 얼굴을 대변한다. 소문난 망나니에 개념이라고는 이만치도 없는 사람의 물건을 쉽사리 믿고 사용하긴 힘들다.
다소 무리수가 작용하긴 했지만 적당한 타이밍에 시비를 걸어준 시리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을 정도였다.
예전의 힘이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검을 잡은 세월만 수 십 년이 넘다 보니 기본적인 초식과 습관이 몸에 밴 것이다.
아무리 기사단의 단장이라고는 하지만 마교의 부교주에 비할 바는 못 될 것이다.
너무 쉽게 끝내서 드라마적 요소가 빠졌지만 망나니의 이미지를 벗기에 충분했다.
이제는 소문의 흐름이 확 바뀌었다.
‘망나니 카미엘이 알고 보니 검술의 천재였더라!’
이곳저곳에서 혼담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는 옳은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지금 왕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하라는 왕명을 받았다.
잘하면 엄청난 영업 소득을 볼 수 있는 자리다.
유난히 검은색을 좋아하는 카미엘은 검은색 정복을 차려입고 길을 나섰다.
카이사르의 비상하는 매가 새겨진 기사단의 정복은 다른 펑퍼짐한 옷보다는 맵시가 살고 중원의 옷과 비슷하여 그가 자주 애용하는 복장이다.
백색 정복을 입은 랭턴은 그의 중후한 분위기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오른쪽에선 카미엘은 뒤를 따르는 기사단을 거느리고 거리로 나왔다.
옅은 파란색의 기사단이 따르는 랭턴은 카미엘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오늘따라 딱 벌어진 어깨가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던지 연신 먼지를 털어주는 모습이었다.
카미엘의 수려한 외모에 길거리에 지나가던 여인들은 모두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 같았다.
왕궁과 거리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잠시 말에서 내려 도보를 선택한 랭턴은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거리를 걸으니 기분이 좋구나. 특히나 왕도의 활발한 거리는 이 아비에게 뭔가 활력소를 주는구나.”
카미엘은 분수대 근처를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서로 흥정에 정신이 없는 시장 상인들을 보았다.
이들은 칼리어스를 이루는 뼈대가 되는 이들이고, 나라의 핵심이다.
백성이 행복한 나라는 절대 기울지 않는다.
칼번이 펼친 복지 정책에 힘입어 서민경제가 살아난 칼리어스의 모습이다.
하지만 왕도의 모습과 카이사르의 모습은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카이사르와 대조적인 모습이지 않느냐? 이럴 때 이 아비는 무능력함에 가슴이 아프단다.”
카미엘은 말없이 랭턴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세월의 흔적이 이곳저곳 묻어 있는 아버지의 얼굴에 카미엘은 세월에 무게를 느꼈다.
“남자는 무릇 책임의 무게를 느껴야 한다. 영주로서의 삶은 더욱 그렇지. 카미엘, 이젠 너의 시대다. 너를 따르는 부하들과 백성들을 생각하여라. 그리고 이번 일을 반드시 성공시켜 카이사르의 부활을 가져다주기 바란다.”
아들은 아무 말 없이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인 손은 예전처럼 커다랗지 않았다.
하지만 그 따뜻함은 여전히 카미엘의 기분을 좋게 하였다.
랭턴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어허, 이놈이. 갑자기 징그럽게…….”
그러면서도 랭턴은 오래도록 아들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 새 왕궁에 도착한 랭턴 일행은 다시 말을 몰아 연회장으로 향했다.
사치를 즐기는 편은 아니나 귀족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칼번은 연회만큼은 성대하게 준비하는 편이었다.
삼삼오오 도착한 귀족들은 저마다 짝을 이루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그중에는 시리스 공작도 있었다.
측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썩 즐거워 보이진 않았다.
그의 옆에는 두 명의 딸이 있었는데 시리스의 장점을 모아다 만들어놓은 인형 같았다.
“공작, 오셨습니까?”
제피로스가 엘레니아와 함께 카이사르 기사단을 맞았다.
랭턴은 반갑게 그와 악수하며 엘레니아에게 숙녀에 대한 예의를 표하였다.
카미엘과 눈이 마주친 엘레니아는 저번의 일이 생각나는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이젠 그녀의 아버지도 카미엘을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여러 귀족들이 카미엘에게 다가와 관심을 보였다.
다소 등장이 늦긴 했지만 공작의 후계고 뛰어난 검술을 가졌다.
그야말로 전도유망한 청년임이 틀림없다.
힘이 많이 약해져 있는 공작집안이라고는 하지만 그만한 리스크를 떠안을 만한 조건이었다.
“오! 역시 공작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군. 공자는 나이가 어떻게 되오?”
“아니! 백작은 좀 빠져 계시오! 내가 먼저 말을 걸었지 않소?”
“아니외다! 본인이 먼저 말을 걸었단 말이오!”
각자 딸들을 데리고 와서 그에게 보여주려 아우성이었다.
난감해하는 카미엘은 눈을 돌려 엘레니아를 보았다.
‘흥!’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 담소를 나누고 있는 랭턴과 제피로스의 등 뒤로 숨어버린 엘레니아를 보며 카미엘은 절망했다.
“엘레니아!”
그녀를 잡으러 가야 하지만 귀족들의 방어가 만만치 않다.
“공자님, 어디 가십니까? 혹시 오늘 함께 온 영애라도?”
난감해 하는 카미엘을 구해주는 나팔소리가 울렸다.
빠밤!
“칼리어스의 주인 국왕 폐하께서 등장하십니다!”
연회장에 모인 인물들은 고개 숙여 왕을 맞이하였다.
왕비와 왕세자, 왕녀가 그 뒤를 이어 등장하였다.
자신의 앞에 부복한 귀족들과 그 자식들에게 일어날 것을 명한 칼번은 무대와 가까이 서서 말했다.
“금일은 먹고 마시는 날이다. 짐이 준비한 술과 음식을 마음껏 즐기라. 연회를 시작하라!”
이윽고 경쾌한 리듬의 음악이 흐르며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술과 음식을 즐기며 이곳저곳에서 무리를 이루어 연회를 즐겼다.
왕세자와 왕녀들은 자리를 옮겨 카미엘에게 향했다.
왕세자 유피아는 상당한 쾌남이었다.
칼번의 카리스마를 그대로 닮아 있었고 왕비의 수려한 외모를 닮아서 꽃미남의 수식어도 충분히 어울릴 만했다.
하지만 시원한 청 발은 매우 이지적인 느낌을 발산하여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였다.
뒤를 따르는 두 명의 공주는 칼번의 장점을 많이 닮아 마치 요정을 보는 것 같았다.
한참 엘레니아를 달래던 카미엘은 왕세자 일행의 등장에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였다.
“소신 카미엘, 왕세자 전하와 공주 마마님들을 뵙습니다.”
왕세자는 살짝 고개 숙여 답하였다.
“그대가 카미엘 경인가? 소문이 자자하더군. 어린 나이에 검술의 성취가 기사단장을 가볍게 뛰어넘는다더군. 역시 검공 가문답군.”
“과찬이십니다.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수려한 외모와 겸손함.
카미엘은 어느 새 왕가에서 탐내는 인물이 된 것이었다.
왕세자는 1왕녀 세실리아의 손을 잡아 카미엘에게 소개하였다.
“내 누이 동생일세. 아직도 혼인을 하지 않아 걱정이라네. 하지만 아직도 아름답지 않은가?”
그녀의 나이 이제 22살이지만 조혼이 성행하는 칼리어스의 사정으로 본다면 혼기를 놓쳤다 보는 것이 맞다.
그런 그녀에게 카미엘은 완벽한 신랑감이다.
능력도 있고 외모도 잘 생겼다. 게다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다.
혼기를 놓친 그녀에게도 잘하면 기회가 올 듯했던지 유피아는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왕녀 세실리아는 도도한 표정으로 카미엘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옆에 서 있는 엘레니아를 번갈아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공자는 나이가 어린 여자가 좋은 모양이군요. 하지만 저 여인도 나이가 적어보이지는 않는데?”
“세실리아!”
비록 10대 초반에 혼사를 치르지 않은 그녀지만 아직 묘령이 되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왕녀의 언사는 질투에 지나지 않는다.
엘레니아는 민망함에 카미엘의 등 뒤로 슬금슬금 모습을 감추려 했다.
마치 가시가 돋친 장미를 보는 듯 아슬아슬한 매력을 가진 세실리아는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상대였던 것이다.
“취향이 참 독특하시군요. 아무리 그래도 좀…….”
점점 더 고개를 숙이는 엘레니아를 보며 카미엘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흠칫 놀란 그녀는 눈이 동그래져서 카미엘을 보았다.
그는 살짝 윙크하더니 고개를 돌려 세실리아에게 말했다.
“어리기도 한데 제 이상형과 일치해서 말입니다. 만약 아내를 맞는다면 이런 여자가 아닐까 합니다.”
순간 주위에 모여 있던 귀족의 영애들은 절망하였다.
이것은 공식적으로 연인을 선언하는 발언과 다름이 없었다.
이미 혼기가 꽉 찬 두 사람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예비부부나 다름없었다.
세실리아는 상당히 언짢은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은 왕족을 경외할 줄 모르는 인간이군요! 숙녀를 앞에 두고 그따위 언사라니!”
아마 자신이 앞에 있는데 다른 여자를 보고 이상형이라고 말한 것이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카미엘은 그녀가 왜 시집을 가지 못했는지 이해가 갔다.
“왕족을 경외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후작의 영애에게 호감을 표시한 것뿐입니다. 만약 그것이 불경스럽게 여겨졌다면 신을 벌하여 주십시오.”
몸을 부들부들 떨며 화를 참는 모습을 보니 아마 세실리아는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상당히 높은 듯했다.
세상의 여자들은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이야기의 방향이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자 유피아는 세실리아를 만류하며 나섰다.
“하하, 그게 무슨 말인가? 좋은 것을 좋다고 한 것이 뭐가 나쁘다고.”
표독스럽게 카미엘을 쏘아보는 세실리아를 보며 유피아는 일부러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카미엘 경, 다른 여인들에게도 기회는 주라고. 저렇게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왕세자님!”
자세히 보니 2왕녀 일루나 역시 몹시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왕녀와 엮이면 상당히 피곤해질 것이다.
권력이 섞인 연애는 무척이나 위태로운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카미엘은 애써 그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반면 엘레니아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카미엘의 옷깃을 꼬옥 잡았다.
‘고마워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인 카미엘의 입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의도를 파악한 유피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카미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이렇게 화려한 출사표를 던졌으니 앞으로 칼리어스를 위해 열심히 해 주시오.”
유피아는 여전히 뚱해 있는 세실리아와 넋이 나가버린 일루나를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오늘 카미엘은 연회에서 자신의 인지도를 확인하였다.
이대로라면 사업은 성황리에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결혼을 선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귀족들은 계속하여 그에게 청혼을 할 것이고 그것은 엄청난 시너지를 가져다 줄 것이다.
본격적인 사업을 앞둔 카미엘은 이런저런 생각에 잠시 연회장을 빠져나와 뒤뜰로 향했다.
정갈하게 꾸며진 뒤뜰은 작은 분수대와 아기자기한 탁자들이 위치해 있어 담소를 나누기에 좋아보였다.
신선한 밤공기를 만끽하던 그의 눈에 푸르스름한 보름달이 들어왔다.
아마 중원의 하늘에도 같은 달이 떠 있을 것이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의 눈이 슬퍼진다.
‘설란…….’
이젠 볼 수조차 없지만 그래도 그녀와의 추억만은 가슴에 남아 있다.
남자의 첫사랑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나이가 얼마가 되었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든, 첫사랑은 평생 가슴에 남는 법이다.
남자의 심장에는 오로지 하나의 사랑만 자리 잡는다. 그래서 깊이 뿌리내린 첫사랑은 절대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그려보던 카미엘의 감각에 한 인영이 걸렸다.
그는 뒤를 돌아 인기척의 주인을 확인하였다.
순간 눈이 마주친 소녀는 황급히 몸을 숨겼다.
“공주마마. 이곳에는 어쩐 일로…….”
다름이 아닌 2왕녀 일루나였다.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하는 카미엘을 보며 그녀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부끄러운지 몸을 배배 꼬며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아, 아니 저는 경을 방해하려던 것이 아니고, 그러니까…….”
얼굴에 새빨개진 일루나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모양이었다.
이제 17세가 되는 그녀도 혼기가 꽉 차서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왔지만 워낙에 낯을 많이 가리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성사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세간에는 그녀가 이상한 취미가 있어서 방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카미엘은 수줍어하는 그녀를 보며 카미엘은 정중하게 말했다.
“방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이곳은 공주님의 공간이 아닙니까? 소인에게 사과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일루나는 그제야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 그런. 헌데, 경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달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보름달이 떠서 유난히도 밤이 밝은 것 같습니다.”
일루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동그란 보름달은 은은한 은빛을 발산하여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일루나는 마침내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