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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엘 전기 1권(10화)
4장 망나니 카미엘의 갱생(4)


“저기, 카미엘 경!”
“예, 공주님.”
“저, 저는 저 달에 토, 토끼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경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막상 말을 꺼내고 후회를 하는 듯 자꾸만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기내서 한 말이 겨우 달에 토끼라니.
하지만 카미엘은 환하게 웃어주었다.
“소신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달나라에는 토끼가 살면서 평생 아프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 불로초를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토끼를 보고 다산과 지혜의 상징이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훌륭하게 맞장구를 친 셈이다.
일루나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럼 카미엘 경도 달에는 토끼가 산다고 생각하시나요?”
“그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척 봐도 계수나무 아래서 열심히 절구질을 하고 있습니다. 소신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녀가 환하게 웃는다.
절대 웃지 않기로 유명한 일루나가 환하게 웃는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발자국 성큼 다가와 그와 더 가까워진 일루나는 더 많은 얘기를 하기 원하는 듯했다.
“카미엘 경. 혹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시겠어요?”
살짝 당황한 카미엘을 보며 일루나는 다시 의기소침하게 말했다.
“귀찮으시면 안하셔도 돼요.”
아마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직 서툰 탓일 것이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일루나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얘기라……. 그렇다면 한 가지 있긴 합니다.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인가요? 우와!”
정말 아이처럼 좋아하는 왕녀를 보며 카미엘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겠습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 이야기라 한 번 놓치면 다시 들을 수 없습니다.”
마주앉은 두 사람의 모습은 연인, 혹은 오누이로 보였다.

귀족회의가 끝나고 복귀 행렬로 인하여 왕도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끝도 없는 병력들과 시종들이 등에 봇짐을 메고 따라나서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 같았다.
그 행렬에는 카미엘도 포함된다.
밀리고 밀리는 행렬에 지칠 만도 하지만 연신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지금쯤이면 아마 그가 뿌려놓은 떡밥에 물고기들이 미친 듯이 몰려들고 있을 것이다.
카이사르에 내려가 어서 경과를 보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
자꾸만 밀려드는 기대감에 웃음을 짓는 그의 곁으로 한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다리를 잡아당기며 자신에게 시선을 둘 것을 청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작은 손으로 자신의 바지춤을 잡고 있어 말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니?”
카미엘의 질문에 그녀는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그의 손에 묶어주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붉은 장미가 그려진 손수건을 보며 카미엘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집 딸내미인지 몰라도 참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수건의 끄트머리에 뭔가 글씨가 보이는 것 같다.
카미엘은 손목에 묶여 있는 손수건을 풀어 펼쳐보았다.
급하게 대충 갈겨쓴 문장이나, 척 봐도 남자의 필체는 아닌 것 같았다.
‘안녕히 가세요. 나중에 만난다면 성숙한 여자가 되어 있을게요.’
이름을 써놓지 않았지만 누구인지 충분히 짐작이 되었다.
카미엘은 흐뭇하게 웃었다.
“세상에 별 일이 다 있군 그래.”
연신 웃음을 지우지 못하는 그의 곁에 아름다운 여인이 다가와 말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우신가요?”
다름 아닌 엘레니아였다.
카미엘은 오늘따라 그녀의 레몬 빛 머리가 상당히 아름답다고 느꼈다.
“별것 아닙니다. 그저 한 줄 편지를 받았습니다.”
엘레니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추궁했다.
“여자구나.”
카미엘은 일부러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때로는 혼자 간직하고 싶은 것이 있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인은 아니니.”
그녀는 고개를 뒤로 스윽 빼더니 팔짱을 끼우며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칫, 여인인지 아닌지 제가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 그 공주일 거야. 맞아. 어쩐지…….”
그는 뾰로통해져 있는 엘레니아가 갑자기 참을 수 없이 귀여워 보였다.
이윽고 웃음기를 지우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보다 제가 따귀를 맞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엘레니아는 멀뚱멀뚱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뜨거운 눈빛으로 엘레니아를 응시하던 카미엘은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더니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야말로 빛의 속도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무방비상태로 접근을 허용한 그녀의 입술에 따뜻한 촉감이 전해졌다.
이내 얼굴을 땐 카미엘은 말했다.
“이제 때려도 좋습니다.”
엘레니아는 눈을 질끈 감은 그가 귀여운지 웃음 지었다.
이윽고 그녀는 양손으로 카미엘의 얼굴을 잡고 진하고 깊은 입맞춤을 하였다.
“웁!”
예상치 못한 그녀의 공격(?)에 당황한 카미엘은 몸을 살짝 떨었지만 이내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녀는 몇 번 지속되지 않았던 만남이었지만 확신이 들었다.
‘이 남자는 믿어도 되겠구나.’
그녀의 확신은 진한 입맞춤으로 표출되었다.
“이보시오, 공자! 어찌 출발하지 않는 것이오?”
안 그래도 밀려 있는 행렬이 더 늦어지자 짜증이 나던 귀족들은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 남녀에게 뭐라 손가락질을 하였다.
하지만 선남선녀의 애정행각을 본 루시우스는 예전의 아름답던 자신의 연애시절이 생각나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잠깐 멈추어라. 뒤의 행렬에 한 10분쯤 늦어진다고 전하라!”
말을 전한 루시우스는 행렬의 중간에 있는 자신의 아내에게로 돌진했다.
젊은이들의 로맨틱한 키스로 주위는 순식간에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5장 토벌의 시작(1)


화살이 빗발치는 전장.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여기저기 신음하는 병사들은 손이 잘리거나 자상을 입어 일어나지 못하고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그때 비상하는 매가 그려진 의복을 차려입은 사내들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돌아다니며 부상자들을 돌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손에 이상한 액체가 든 상자를 들고 와서 상처를 돌보아주니 병사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으악!”
“조금만 참으시오! 내 금방 치료를 해드리리다! 이 금창약만 있다면 문제없소!”
그는 칼에 베인 곳에 연고를 바른 후 헝겊으로 지혈했다.
신음하던 병사들은 전투가 중지되어 막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상처가 씻은 듯 나았고 병사들은 팔팔하게 뛰어다니며 다시 전투에 참가하였다.
다시 부상자가 속출하면 어김없이 등장한 사내들은 약을 발라주며 이 말을 꼭 전하였다.
“이 금창약만 있다면 문제없소!”
그래서일까?
어느 새 전장에서 칼에 베이거나 활에 맞아 쓰러지면 이렇게 외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었다.
“금창약!”

대륙은 언제나 전쟁을 안고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피가 끊일 날이 없다.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나고 사상자는 늘어만 간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백의를 입은 사내들이 한 손에는 약상자를 들고 전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들의 활동은 국가와 인종을 따지지 않았다.
흰색 연고를 바르기만 하면 다 죽어 가던 병사들이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만드는 그들은 어느 새 전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금창약을 들고 전장을 누비던 이들은 종적을 감추었고 급기야 군부에서는 그들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였다.
그러던 중 칼리어스 왕국의 카이사르 지방의 영주 랭턴의 집안에서 만들어 유통한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전쟁을 겪고 있는 국가나 소문을 들은 평시 상태의 국가들은 약을 확보하기 위하여 천문학적인 돈을 들였다.
전쟁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게다가 하루면 누구든, 어떤 상처든 치료가 가능하다는 엄청난 장점을 갖춘 금창약은 이젠 전쟁에 없어선 안 될 물자가 되었다.
심지어는 약을 구하기 위하여 산적 떼를 토벌하는 연합군이 구성되는 진풍경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카미엘은 잠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열심히 일하였다.
이젠 카미엘에게 ‘의학왕’ 혹은 ‘대천사 카미엘’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시리스를 제물삼아 이미지를 쇄신시킨 것이 엄청난 시너지를 가져온 덕이었다.
거기다 카미엘은 약초를 재배하는 데까지 성공하여 대륙 전역에 금창약을 보급하였다.
카이사르는 이제 어업과 농사보다는 약초를 재배하고 약을 생산하는 의학의 중심지로 그 입지를 굳건히 해 나갔다.
재화는 카미엘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카이사르는 눈부신 발전을 시작한다.
가보를 팔아 세운 공장과 인부를 사들였음이 알려져 이제는 파렴치한의 이미지를 벗기에 충분하였다.

카이사르 영주의 집무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를 검토하는 랭턴의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해 보였다.
이제 중년을 넘긴 몸은 예전처럼 순순히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영지에 희망을 불어넣으며 다시 카이사르의 황금기를 불러온 아들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망나니였던 아들이 갱생하여 이제는 영웅이 되었다.
이제는 그에 걸맞는 뒷바라지가 필요할 것이다.
계속하여 집무를 행하던 랭턴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허리와 목 언저리가 뻐근해져 왔다.
과로가 밀려오는 것이다. 혈압이 높은데다 스트레스가 쌓이니 벌써부터 몸에 무리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창문을 열어 정원을 내다보았다.
벌써 여름이 가고 가을이 성큼 다가와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낙엽이 지고 나무에 앙상한 가지만 남으면 혹독한 겨울이 올 것이다.
차갑지만 상쾌한 가을바람을 만끽하던 랭턴은 문득 생각했다.
이제 자신이 물러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야 한다. 세대교체는 고인 물을 순환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고 황금기를 맞은 카이사르가 발전하는 발판이 될 것이다.
막상 은퇴를 생각하니 서글프기도 하고 설레는 마음도 들었다.
젊음을 바쳐 지켜온 영지를 뒤로하고 한 발자국 물러선다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죽을 때까지 아들의 뒤를 봐주며 잔류할 것이다.
카미엘의 성장을 지켜보며 남은 여생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에 잠긴 랭턴의 귀에 인기척이 들렸다.
똑똑.
“들어오라.”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카미엘이었다.
아들의 늠름한 모습을 보니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아들에게 앉을 것을 권하였다.
“그래, 군대 양성은 잘 되어 가느냐?”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벌써 두 배가 넘는 인원이 충원되었습니다. 앞으로 한 달이면 기본적인 전투수행이 가능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천문학적인 자금이 유동되어 주민들 삶의 질은 높아져 가지만 여전히 산적들과 해적들이 자리하고 있어 피해가 속출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다 국가에서 지원하였던 연합군은 교역로를 터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카미엘은 군사를 양성하여 대대적인 토벌을 건의 하였고 그 계획은 순항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지금 훈련되어 있는 병력과 기사단으로 차근차근 토벌을 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당히 추진력이 좋아서 한 번 일을 시작하면 정확하고 신속하게 진행한다. 이것은 카미엘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라. 신병들도 전투에 참가시켜 충분한 경험을 쌓게 하여야 한다. 그래야 군대의 틀이 잡히고 유사시에 대비하기 좋을 것이야.”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리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해군의 문제인데, 선박을 건조하는 데 필요한 기술자와 목재가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흠……. 선박 기술자는 모집공고를 내면 충분히 모일 것이야. 카이사르는 예로부터 항구 도시로 유명한 곳이다. 아무래도 대대로 선박을 건조하는 목수들이 많지. 그것보다 목재를 조달하는 문제가 시급한 것 같구나.”
또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자원을 조달하는 문제는 돈으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다.
목제의 경우는 육로로 운송하기에 부적합한 특성이 있다.
시일이 오래 걸리는 것은 물론이고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카이사르의 경우에는 조달이 어려운 면이 있다.
그렇다면 자체조달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벌목에도 한계가 있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만들 수 없다면 빼앗아야 한다. 먹이사슬의 원리는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좋은 예가 되지.”
랭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