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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엘 전기 1권(15화)
7장 살을 주어 뼈를 취하다(2)


엄청난 피해를 입은 카미엘의 함대는 인근에서 가장 가까운 겐트에 도착하여 전열을 가다듬기로 했다.
겐트는 풍부한 어획량과 군사적 요충지라는 중요성이 있어 카이사르에서 50년 전까지 결사항전을 거듭하던 곳이다.
난공불락의 요새로 유명하지만 가장 최근에 함락된 성으로 아직도 그곳에 기거하는 주민들이 존재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피해상황을 보고하라.”
함대장실에 모여 부동자세를 취한 함장들은 상황판을 보며 자신의 함선에 상황을 보고하였다.
“제 1함선의 피해상황입니다. 병사 500명 중 100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8개의 선실이 불에 타 유실되었습니다. 식량도 3분의 2가 불에 타 유실되었습니다.”
실로 엄청난 피해가 아닐 수 없었다.
노를 젓는 100명 이상의 병사를 제외한다면 4분의 1이 죽거나 다친 것이다.
“제 2함선의 피해상황입니다. 병사 500명중 200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6개의 선실이 불에 탔으며…….”
나머지 함선들의 피해상황도 다를 바가 없었다.
첫 전투에서의 패전은 사기에 심각한 저하를 초래할 수도 있다.
카미엘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작전 상황판을 보았다.
사망 500명, 부상 1000명.
당장 복구할 수 없는 중장비의 피해까지 합산하면 전력의 3분의 1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설마하니 이 정도의 규모를 가진 병력과 조우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카미엘은 깊은 고민에 빠져버렸다.
그러던 중, 함대장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병사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동공이 크게 확장되어 극심한 흥분상태에 빠졌음을 짐작케 하였다.
카미엘을 비롯한 함장들의 눈이 불안으로 물들었다.
“함대장님! 지금 레드드레곤의 깃발을 사용하는 함대가 이틀거리에서 항해중이라고 합니다.”
“뭐라!”
적은 카이사르 군의 항로를 미리 파악이라도 한 것처럼 선발대와 본대가 합류하기 전에 각개 격파를 시키려고 하고 있다.
만약 이대로 선발대가 유실된다면 토벌은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선발대의 손실은 본대와 후발대의 출발을 지연시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토벌을 시작하기도 전에 철수를 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보통내기가 아니군.”
이곳에서는 눈으로 직접 보고 구두로 전달할 수밖에 없어 보고에 엄청난 시간이 소요된다.
아마 지금쯤은 하루거리에서 이곳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도저히 방법이 없다.
카미엘은 머리를 집었고, 함장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던 중 제 2함장인 카파가 말했다.
“이렇게 된 바에야 겐트를 뚫고 들어가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허허, 지금 제정신이오? 이 병력으론 어림도 없소이다!”
그의 제안에 함장들은 길길이 뛰며 나섰고 카파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다 같이 죽을 수는 없지 않소? 어차피 해군의 절반은 전투 경험이 있는 육군으로 채워졌소. 본인은 그쪽이 더 승산이 높다고 생각하오만?”
사실 그의 말이 백번 옳다 느끼고 있던 카미엘 이지만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그나마 병력이 몰살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대로 패주를 한다면 어디까지 항해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불에 타 유실된 식량과 물은 더욱더 그의 목을 옥죄여 올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결국 카미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결심을 피력하였다.
“겐트를 돌파한다.”

아직 새벽의 물안개의 영향력이 거두어 지지 않은 겐트.
새벽에 기습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기 때문에 이른 시간을 택한 카미엘은 병사들과 함께 숨을 죽이며 대기하고 있었다.
속전속결로 일을 마무리 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
무엇보다 추격대가 도착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검을 꺼내어 오른손으로 꽉 쥐었다.
측면으로 숲이 있긴 했지만 그곳을 돌아 후문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길은 오직 정면뿐.
공성용 사다리를 들고 있는 분대를 보며 카미엘은 심호흡을 하였다.
궁수들과 보병들을 대동한 그는 소리를 죽여 성벽으로 접근하였다.
어둠에 적응된 눈으로 본 겐트는 과연 난공불락이라 칭할 만했다.
작은 만큼 병력이 응축되어 방어하기 좋은 구조로 되어 있었고, 공격을 하는 입장에서 볼 때 침입을 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카미엘은 우선 궁수들에게 사격 준비를 명하였다.
조금 더 접근하면 분명 경계병들이 눈치를 챌 것이다.
최대한 숨을 죽인 카미엘은 조용히 성벽으로 다가갔지만 이미 경계병은 눈치를 챈 듯 보였다.
그의 등장을 수상히 여긴 경계병이 횃불을 들고 움직이자 카미엘은 등에서 활을 꺼내어 시위를 당겼다.
핑!
“윽!”
정확히 목을 관통당한 경계병이 쓰러졌고, 병사들은 일제히 사다리를 들고 전진하였다.
함께 경계를 서던 이들은 일제히 달려와 그의 생사를 확인하였다.
“침입자다! 종을 울려라!”
땡땡땡!
비상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비상대기를 하고 있던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카미엘은 검을 들며 외쳤다.
“진격하라!”
“와아아아아!”
궁수들은 지원사격을 하였고, 성벽에서 공격을 하던 병력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내렸다.
이대로 진행된다면 야간 습격은 성공으로 돌아갈 확률이 높았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병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진했다.
하지만 이윽고 등장한 장창병들에게 저지당하여 추락하고 말았다.
“으악!”
놀랍게도 새벽에 일으킨 습격임에도 너무 태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이었다.
몇 개 되지 않는 사다리로 오르기엔, 겐트의 성벽은 너무 단단했다.
이윽고 도착한 적의 증원 병력에 병사들은 무의미하게 희생되고 있었다.
보병들을 지휘하던 쿤트는 다급한 듯 카미엘에게 말했다.
“작전이 실패한 듯합니다! 퇴각을 명령해 주십시오!”
카미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되었던 병력의 무고한 희생은 군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피눈물을 머금고 퇴각 명령을 내렸다.
“퇴각하라!”
뿌우!
퇴각 명령을 알리는 나팔이 울리자, 카이사르의 병력이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다.
병사들과 함께 퇴각을 하는 카미엘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제기랄!”
겐트의 1차 침공은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휴식을 취하는 병사들을 순찰하고 있는 카미엘은 그를 수행하고 있는 쿤트에게 말했다.
“생각보다 많은 병력이 다쳤다. 아무래도 빨리 조취를 취하는 것이 좋겠어. 아무리 금창약의 효과가 좋다고는 하지만 부러진 뼈가 붙거나 하지는 않으니.”
“소신의 생각도 그러합니다. 함대장님의 빠른 판단이 아니었다면 500명의 희생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카미엘은 피곤이 역력한 병사들의 표정을 보며 말했다.
“과연 난공불락이군.”
“예상은 했습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뼈가 부러지거나 신체의 손실을 입은 자를 제외한 병력의 정확한 집계를 이행하고 내일 아침 각 전함의 선장들과 장교들을 모아주게. 겐트를 돌파할 방법을 모색해야겠어.”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쿤트는 선장실의 문을 닫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선장실에 들어온 카미엘은 아까부터 자신을 따르던 인기척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아무도 없다. 우리 둘만이 이곳에 남았다. 정체를 드러내라.”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아마도 극심한 피로로 인하여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하겠지만 놀랍게도 천장에서 한 인영이 뚝하고 떨어졌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 자세한 인상착의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뛰어난 살수임에는 틀임이 없는 듯했다.
벌써 몇 시간이 지나도록 카미엘을 따라다녔음에도 아무도 눈치 챈 사람이 없었다.
그의 숙달된 감각이 아니었다면 까마득히 모르고 지났을 수도 있다.
깊게 가라앉는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본 카미엘은 나지막이 말했다.
“살수인가?”
사내는 그저 품속에 갈무리되어 있던 손수건을 꺼내어 카미엘에게 내밀었다.
흰색 손수건은 이제 누런색으로 변해 있어 오랜 시간동안 소중히 보관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는 사내를 본 카미엘은 조용히 손수건을 받아다 펼쳐보았다.
천천히 손수건을 살펴보던 카미엘은 상당히 익숙한 필체를 발견하였다.
연(緣)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고 그 아래에는 매화로 날아든 한 마리 새가 그려져 있었다.
묵필로 그린 그림은 사대부들이 즐겨하던 사군자임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서예의 필체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군자는 화자의 필체와 성품이 그대로 묻어난다.
선은 부드러우나, 그 끝이 날카로운 것이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를 잘 아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라고 들었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서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다짜고짜 사군자를 들이밀며 고개를 숙인 청년을 보며 카미엘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부터 나를 따라다닌 이유는 이것인가?”
“공자께서 겐트를 수복하시기를 원하신다 들었습니다.”
“그렇다. 헌데 그것이 이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반란군에 대한 적개심을 품은 단원들이 꽤 많습니다. 하여 공자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대표하여 이리로 날아온 것입니다.”
“나를 만나기 위해?”
“그렇습니다.”
“적개심을 품었다는 것은…….”
“저희를 이곳에서 꺼내주신다면 성을 함락시키는 데 협력하겠습니다.”
책상 위에 올려진 손수건에는 한문이 써 있다.
그렇다는 것은 천마신공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청년은 고개를 들어 말했다.
“저희 외가는 예로부터 팔란에 상주하며 성전을 수호하며 살아왔습니다.”
“성전?”
“카이사르 공작께서 만드셨다는 성전으로 세상의 조화와 균형을 위함이라 합니다. 저의 어머니는 그곳을 지키다 돌아가셨습니다.”
처음 듣는 성전의 이야기에 카미엘은 귀를 기울였다.
“그곳이 위치함으로써 세상의 균형이 깨지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세상에 발설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만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곳은 천마신공의 원본이 모셔져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마공이 세상에 나오는 것 자체가 균형이 깨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테인은 그것을 안배하기 위하여 성전을 만들어 무공을 숨겼을지도 모른다.
반쪽짜리 무공서적에서 말하는 그곳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곳의 위치를 알고 있나?”
“제가 가지고 있던 단서의 전부입니다.”
사내는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카이사르의 상징인 비상하는 매가 그려진 단도였다.
단도의 손잡이에는 한문이 새겨져 있었고 끝에는 쪽 빛 크리스털이 박혀 있었다.
단순히 인(人) 자만 보일 뿐,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단서란 말인가?”
“제 어머니가 지니고 있던 것입니다. 돌아가실 때 제가 품속에서 꺼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서를 제외하면 위치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것을 함구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까요.”
“음…….”
카미엘은 아직도 자신의 앞에 부복하고 있는 청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자신이 찾고 있는 것과 가장 부합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 자네 말이 모두 사실이라 치고, 어떻게 겐트를 공략한단 말인가?”
“이미 저는 성문의 뒤편이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성문을 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문을 열게 되면 무혈입성이 가능하게 되니, 지금 성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과 전면전을 펼쳐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
카미엘은 그의 얼굴과 단도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막다른 길에 다다른 그의 입장에서는 달리 방도가 없다.
해적 출신의 자객이 자신을 지원하여 성문을 열어준다는 데 이것보다 더 달콤한 제안은 없을 것이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카미엘은 턱에서 손을 때며 말했다.
“알겠다. 작전회의를 소집하지.”
다시 밖으로 몸을 날리려던 청년을 보며 카미엘이 말했다.
“자네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자객이라도 이름은 있을 것이 아닌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선 청년은 카미엘에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엘리안입니다.”
“엘리안.”
등을 돌려 밖으로 몸을 날리는 엘리안은 보며 카미엘은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엘리안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