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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엘 전기 1권(23화)
11장 바다에서 만난 그녀(2)


“험험, 왕세자 전하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일이십니까?”
“자네가 주당으로는 왕국 제일이라기에 내 직접 예까지 행차했네. 늦은 밤에 실례였다면 용서하게.”
“당치도 않습니다.”
랭턴은 일어나 시종을 불렀다.
“카이사르에 독주가 유명한 것은 알고 계십니까?”
“물론. 그래서 자네를 찾아왔다 하지 않았나?”
“하하,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시녀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독대를 하고 앉은 랭턴은 왕세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말 왕세자 전하가 이곳까지 직접 오신 이유를 알고 싶나이다.”
사뭇 진지한 표정의 랭턴을 보며 왕세자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일단 술이 나오면 그때 얘기하지. 자네는 내가 그리도 불편하던가?”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라…….”
미소를 짓고 있는 왕세자를 보며 랭턴은 칼번을 떠올린다.
엄청난 마인드 컨트롤로 왕세자 시절 그 속내를 알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버지인 선대왕까지 그를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었다.
헌데, 그의 아들 유피아 역시 그를 닮아 있던 것이다.
미묘한 표정으로 왕세자를 바라보던 랭턴은 입을 열려 했지만 술을 준비해온 시녀에 의하여 그 뜻을 접고 말았다.
향기로운 독약이라 불리는 카이사르의 독주를 잔에 채운 왕세자는 랭턴에게 건배를 제의했다.
“일단 건배하지.”
“무엇을 위해 건배하면 되겠습니까?”
“음…… 바다에 나가 있는 자네의 아들을 위하여 하세.”
“광영이 분에 넘치나이다.”
술잔을 부딪친 두 사람은 앞다투어 단숨에 잔을 비워버렸다.
달콤한 첫 맛과는 다르게 목구멍을 태우며 넘어가는 독주는 머리가 얼얼하다 못해, 정신이 퍼뜩 들 정도였다.
다시 술잔을 채우는 왕세자는 랭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자네, 나에게 시집 못 간 누이동생이 둘이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예, 그렇습니다. 두 분 공주님께서는 아직 혼인을 하지 않으셨지요.”
“그래서 말인데, 자네에게 청이 있네.”
“하명하소서.”
고개를 숙인 랭턴을 바라본 유피아는 입을 열었다.
“내 누이동생을 좀 데려가 주어야겠네.”
랭턴의 동공이 확장되며 옆에 있던 술잔을 엎어버리고 말았다.
쨍그랑!
소리를 들은 시녀가 달려와 잔을 바꾸어 주며 엎질러진 술을 닦아내었다.
“왜 그리 놀라는가? 혼기가 꽉 찬 여자 집안에서 자네에게 청혼을 한 것뿐이네.”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라…… 좀 놀랐을 뿐입니다. 용서하소서.”
“혹시 다른 집안 아가씨라도 마음에 둔 것인가?”
대답을 조심히 하던 랭턴은 채워진 잔을 단숨에 비우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것이…… 제피로스 후작가의 영애와 이미 혼담을 주고받았습니다. 두 아이가 서로 연모하는 사이라서…….”
그의 말을 들은 유피아는 자신의 잔을 비우며 양쪽의 잔을 번갈아가며 채웠다.
“어허, 이거 큰일이군. 폐하께서 카미엘 공자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하시던데…….”
랭턴은 상당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이 혼사를 깬다면 제피로스와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될지도 모른다.
아무리 아량이 넓은 사내라고 하지만 거의 다 성사된 혼사를 깨는 것은 인정하기 힘든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왕가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정치적으로 상당히 힘들어질 것이 자명했다.
“일단은…… 제 아들이 전장에 있으니 상황이 정리되면 결정을 하도록 윤허해주실 수 없으십니까?”
“하긴, 결혼은 집안끼리 한다고 하지만 정작 본인이 싫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아무쪼록 좋은 인연이 되어 다시 만났으면 하네. 부탁함세!”
손을 내미는 유피아가 마치 악마처럼 보이는 것은 랭턴의 어쩔 수 없는 심리일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악수를 받아들인 랭턴은 환하게 웃는 유피아를 보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이 진정한 왕제구나!’
그 속에 얼마나 오래 묵었는지 가늠조차 하지 못할 만한 능구렁이가 살고 있는 듯했다.
소문에 들리는 그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늦은 밤에 결례를 범하여 송구스럽네. 아무튼 카미엘 공자가 돌아오면 왕도로 보내게. 이 문제를 심도 깊게 논의하고 싶으니.”
“앞까지 모시겠습니다.”
“아닐세. 보는 눈이 많아서…….”
“아, 송구하옵니다.”
“하하, 그럼 나오지 말게.”
고개를 숙인 랭턴을 뒤로하고 집무실을 나서는 왕세자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내가 한 말은 절대로 잊지 말게. 그럼 나는 가네!”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왕세자를 보며 랭턴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라면 양단간에 사단이 날 것이 분명했다.
랭턴은 자리에 앉아 다시 잔에 독주를 채우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여간 이놈은 당최 조절이 안 되는 놈이군!”
못난이 짓을 할 때는 완벽한 망나니가 되더니, 준수한 공자로 돌아오니 완벽한 남자가 되어 자신의 입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랭턴은 밤이 깊도록 술과 씨름을 하였다.

***

전투로 인한 피해 복구를 쿤트에게 인계한 카미엘은 함선 3척으로 함대를 구축하여 본성으로 향하여 뱃머리를 돌렸다.
겐트 전체를 군사기지화 하여 전초기지로 사용하는 동시에 수정동굴을 개발하여 신약개발을 추진하기 위하여 본성으로 향하는 카미엘은 기뻐하실 아버지의 얼굴과 짭짤하게 들어올 신약의 수입을 기대하며 망루에 올라 있었다.
망루에서 맞는 바람은 선미에 올라선 것보다 훨씬 청량하게 느껴졌다.
비록 본토에서 일어날 일은 전혀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긴 했다.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카미엘은 주머니에서 건 과류를 꺼내서 하나씩 맛을 보고 있었다.
“음, 이 건포도는 너무 바짝 말렸나 보군. 딱딱해서 이빨이 다 아프네.”
전투가 아닌 고향으로의 귀환은 그의 기분을 한층 고무되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살짝 풀어진 기분으로 항해를 즐기던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런! 간만에 피를 보지 않는가 했더니!”
멀리서 상선으로 보이는 선박이 해적선에게 추격을 당하는 것이 보였다.
카미엘은 망루에서 내려와 함대에게 지시했다.
“전방에 해적선 2척이 발견되었다. 전투태세에 돌입한다.”
땡땡땡!
익숙한 종소리가 울리고, 병사들은 한층 숙달된 움직임으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갔다.
부관으로 따라온 엘리안은 카미엘의 추가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궁수와 투석기는 정전을 준비하고, 지하에 노를 젓는 인원에게 최대의 속도를 내라 전하라!”
“명을 받듭니다!”
뿌우!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카미엘의 함대는 이윽고 해적전의 돛대를 볼 수 있었다.
“모처럼 만의 휴식을 방해하다니! 포로는 필요 없다! 모조리 사살하라!”
이젠 사살이라는 말이 입에 벤 카미엘은 자신도 모르게 놀랐다.
엘리안은 자신의 허리춤에서 단도와 장검을 꺼내어 정비하였다.
아직도 핏기가 가시지 않아 불그스름한 빛을 내고 있는 엘리안의 장검을 보며 카미엘도 자신의 검집에서 검을 꺼내었다.
스릉!
검신이 울리며 청량한 소리를 내었고 다가올 전투에 대비했다.
투석기의 사정거리 안에 해적선이 들어왔고, 카미엘은 발사명령을 내렸다.
“무차별적으로 퍼부어라!”
“발사!”
슝슝!
화살과 바위덩이가 하늘을 날았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해적선은 놀라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오합지졸이군. 화살을 계속 발사하라! 엘리안!”
“예, 주군.”
“백병전을 준비하라. 선발을 나포한다.”
“명을 받듭니다.”
전력으로 해적선을 추격하던 카미엘의 함대는 이윽고 해적선의 선미를 들이받았고, 엄청난 충격으로 선박이 흔들렸다.
엘리안은 노를 젓던 병사들을 끌어 모아 백병전을 유도 하였다.
“밧줄을 잡고 적의 선박으로 돌진한다!”
이윽고 두 척의 선박에 모두 접근을 한 함대는 우르르 몰려가 해적선에 올라탔다.
카미엘 또한 선박으로 몸을 날려 해적선으로 올라갔다.
이미 생사를 넘나든 병사들은 오합지졸인 해적들을 순식간에 베어나갔다.
“이런 허수아비보다 못한 놈들! 크하하!”
서걱!
병사들은 몇 번의 전투로 이미 피에 대하여 닳고 닳아 있었다.
이젠 살육을 즐기는 이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보였다.
카미엘 또한 저항하는 해적들을 차례대로 베어나가고 있었다.
“꺄악!”
상선의 선미에 올라선 해적이 웬 여인을 인질로 잡아 협박을 하였다.
“크하하! 우, 우리 아이들을 계속 죽인다면 이년의 모가지를 확 따버릴 것이다!”
병사들은 잠시 멈칫하더니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저런 미친놈을 보았나.”
“이젠 별의별 미친놈이 지랄을 하는구나!”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해적은 물론이고 여인도 적지 않게 당황하는 듯 보였다.
다급해진 여인은 카미엘에게 소리쳤다.
“다, 당신! 내가 누구인줄 알아? 시리스 공작가의 영애다! 만약 나에게 생채기라도 난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목이 날아갈 것이야!”
시리스 공작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병사들의 안색이 좋지 않게 변하였다.
아무래도 랭턴의 정적인 시리스의 집안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상대였다.
병사들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자 엘리안이 카미엘에게 물었다.
“어찌할까요? 주군.”
카미엘은 공포에 질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시리스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 있어 결코 구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개인의 감정으로 목숨을 결정할 수는 없는 법.
카미엘은 손을 내밀어 비수를 달라는 뜻을 표했고, 엘리안은 품에서 비수 한 개를 꺼내어 건네었다.
이윽고 카미엘은 오른손에 비수를 들고 해적을 응시하였다.
그리고는 정확히 미간을 향하여 공력을 실었다.
핑!
“커억!”
정확히 머리를 관통당한 해적은 그 자리에 허여멀건 한 뇌수를 쏟으며 허물어졌다.
선혈과 함께 바닥을 타고 흐르는 뇌수를 본 여인은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상선으로 몸을 날린 카미엘은 엘리안에게 명령했다.
“엘리안! 저들을 모조리 처단하고 선박을 나포하라!”
“예, 주군!”
등을 돌린 엘리안은 병사들과 함께 겁에 질린 해적들을 베어 나갔다.
카미엘과 그들의 엄청난 부하들을 본 여인은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간 카미엘은 손을 내밀어 부축을 권하였다.
용모가 준수한 하긴 하지만, 얼굴에 튀긴 핏자국 때문에 그의 손을 잡기가 힘든 듯했다.
그녀의 팔을 잡은 카미엘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 이봐요! 무례하군요!”
물에서 건져놓았더니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그녀를 보며 카미엘은 실소를 터뜨렸다.
“하하, 무례해서 죄송하군요. 아무튼 가시는 길 조심하여 돌아가십시오. 소인은 이만…….”
다시 해적선으로 몸을 날리려던 카미엘을 붙잡은 그녀는 떨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저, 저기…….”
옷깃을 붙잡힌 카미엘은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동그란 눈동자와 옅은 눈썹.
전체적으로 얇은 입술과 오뚝하지만 그 끝이 살짝 내려가 소녀의 이미지를 풍기는 금발의 여인은 뭔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 길이 없었던 카미엘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예?”
“그냥 가시면……. 전 어떻게 하라고요…….”
보호본능을 자극하긴 하지만 푸른색 눈동자가 시리스를 닮아서 자꾸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하긴요. 상단을 이끌고 목적지로 가야지요. 이번 원행은 아가씨가 행수가 아니었나 봅니다?”
카미엘의 차가운 반응에 여인은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아니! 숙녀가 에스코트를 부탁하면 남자 된 도리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카미엘은 이윽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저희가 큰 전투를 마치고 와서 본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괜찮으시면 카이사르까지 동행해 드리지요.”
카이사르라는 말에 여인은 잠시 망설이는 듯 보였다.
아무리 철없는 귀족 집 자제라고 하지만 정적관계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난감한 표정의 그녀를 보며 카미엘은 한숨을 쉬었다.
“갈 것입니까? 안 갈 것입니까? 해코지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집안은 그리 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어째서 카이사르 공작의 집안이 ‘우리’ 입니까?”
“아니, 그럼 우리 집을 우리 집이라 하지, 그럼 뭐라 부른답니까?”
“카미엘 공자?”
카미엘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랭턴 폰 카이사르의 외아들, 카미엘입니다. 우리 영지까지 함께 가시지요.”
영지의 공자라면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가볍게 다리를 굽혀 인사에 답하였다.
“시리스 폰 루시엘의 장녀 마르엔입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쩐지 처음에 나왔어야 할 대사가 뒤에 나와 기분이 이상해진 카미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이 타고 왔던 선박으로 돌아가려 몸을 돌렸다.
“저기!”
“또, 뭡니까?”
살짝 짜증이 난 목소리로 돌아본 카미엘은 마르엔의 간절한 눈빛에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후,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아니, 공자님이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아서 말씀드리기 힘드네요.”
“화 안 났으니 말씀하십시오.”
“정말입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아가씨라는 생각을 한 카미엘은 그녀의 말을 순순히 들어주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저를 데려가주세요. 이곳은 사람이 많이 죽어 있기가 거북스럽네요.”
“아니, 행수라는 사람이 배를 비우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상단 사람들은 카미엘에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냈다.
아무래도 이런 성격은 모시고 다니기에 불편한 것이 사실일 것이다.
깊은 한숨을 토해낸 카미엘은 그녀에게 경고했다.
“저의 함대라고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남자들이 몇 달 동안 뒹굴던 곳이라 쾌쾌한 냄새도 진동할 것인데. 괜찮겠습니까? 카이사르에 도착하려면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그녀가 불편한 것은 카미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자라면 아무나 보고 휘파람을 부는 부하들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아서 껄끄러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 리가 없는 마르엔은 환하게 웃으며 기쁨을 표했다.
“정말이죠? 말 바꾸기 없어요!”
앞으로 난항이 예상되는 가운데 카미엘은 그녀의 옷가지를 챙겨 사령함으로 몸을 날렸다.
“어머! 하늘을 나시네요? 신기해라!”
“…….”
카미엘은 오래도록 입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