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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1권 (2화)
Prologue 3 어느 바드의 이야기 (2)


시끄러웠다.
고성의 대화, 왁자지껄한 분위기. 하지만 왠지 정이 있는 이런 분위기가 좋았다. 바드 에뜨랑은 피곤에 젖은 육신을 거품 가득한 흑맥주 한 잔으로 달랬다.
그러자 펍의 주인인 미트가 잽싸게 맥주잔 하나를 더 가져다 탁자에 올려놓았다.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손님들을 말리긴 했지만 미트도 내심 자신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좋았다. 아무리 지쳤어도 이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닌가. 더욱이 이번에는 이야깃거리가 넘치는 상황이 아니던가.
디리리링―
다운 스트로크.
만돌린의 현을 순차적으로 튕겨 내리자 울림통에서 맑은 음이 울려 나왔다.
삽시간에 주변은 침묵으로 변했다.
관객은 아는 것이다, 이제 시작할 때라는 사실을.
천천히 고개를 들던 에뜨랑의 입에서 탄식이 흘렀다.
“자네들은 꿈이 있나?”
분명 자조적인 색체가 가득한 분위기다.
마이너의 현이 울리는 음감과 메말라 갈라지듯 허탈한 탄식처럼 내뱉는 음색 등, 분명 부정적인 의미의 질문이었다.
자칫 감정이 상할 수 있는 질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정 상한 표정이 없다. 오히려 기대감만 가득한 눈길들이 에뜨랑을 재촉하고 있었다.
“휴우…….”
에뜨랑의 입에서 다시 탄식이 흘렀다.
하긴 저들도 잘 아는 것이다, 자신의 반어적인 화법을. 이곳을 찾은 세월도 벌써 손가락을 세 번은 꼽아야 할 정도니 당연한 것이다.
지금은 자신의 덩치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미트가 아직은 아버지 밑에서 사환 노릇을 하고 있을 때였으니, 그만큼 시간이 흐른 것이다.
지금은 맥주에 젖어 흐릿한 눈동자들이지만, 저들 대부분은 예전에 초롱초롱한 눈빛을 간직한 아이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펍의 나무창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아이들.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아이들이다.
예전에도 자신이 마을에 왔다는 소문이 퍼지면 어느새 아이들이 펍 주변에 몰려들어 창문으로 흘러나오는 이야기와 노래를 듣곤 했다.

지금도 새로운 아이들이 창가에 몰려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허허. 이보게, 롤. 자네 이름이 아마 롤이지?”
“아! 제 이름을 기억하시는군요.”
뜻밖의 질문에 어리둥절했지만 롤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어릴 적부터 우상이었던 에뜨랑이 자신을 기억하고 불러 주니 기분이 좋은 것이다.
“저기 창가에 고개를 내민 아이가 자네 아이인가?”
“어라! 저놈이?”
“하하하!”
“과연 롤의 새끼야. 지 애비 닮아 이야기하고 노래라면 아예 죽고 못살아. 하하하!”
“아니야, 핀. 저놈은 지 애비보다 더하다고. 우리 아들놈이 아끼던 장난감이 저놈에게 있어서 의아한 마음에 물어보니 이야기 값으로 주었다는 거야, 글쎄.”
“와하하하!”
왁자지껄한 와중에 큰 웃음소리가 터졌다.
수염투성이의 롤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듯 말을 한 자에게 주먹질을 하며 같이 웃고 있었다.
“이보게, 롤. 그리고 자네들 말이야.”
“말씀하세요, 에뜨랑 님.”
“자네들 중에도 어려서 롤처럼 저 창가에서 내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을 거네. 그러니 오늘은 아이들을 이 자리로 불러들이면 어떻겠나?”
“예?”
“자네들 앞에 앉히고 들으면 좋지 않겠느냐는 말일세. 자네들이 어려서 그토록 부러워했던 것을 자식들에게 해 주란 말이야. 이왕이면 먹을 것도 사 주고 말이야.”
“아……!”
수염을 민 지 며칠 지나 추레한 얼굴에 잔주름이 가득했지만 에뜨랑의 얼굴은 자애로운 할아버지처럼 만면에 가득 미소를 담고 있었다.
“좋아, 오늘 아이들이 먹는 과자는 내가 내지.”
“우와!”
미트가 호기롭게 소리치자 밖에서 더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미트의 아내 넬이 만드는 과자는 마을에서 상당한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더 큰 의미를 안겨 준 것은 팝 안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었다.
전장의 훈장처럼 아이들에게는 어른들만 출입하는 펍에 들어가는 것이 자랑거리였다. 더구나 에뜨랑의 이야기와 노래를 눈앞에서 들을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과, 거기에 아버지와 함께라니.
아이들은 뜻밖에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자다가 꿀에 바른 버터 빵이 잘 구운 칠면조 다리와 함께 떨어진 것이리라.
“자네들도 이미 짐작했다시피, 오늘은 정말 신나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네.”
잠시의 소란스러움이 잦아들고 아이들이 각기 아버지의 품에 앉고 주방에서 먹을거리가 나와 몇 개를 주어먹었을 무렵, 맥주잔을 비운 에뜨랑의 입이 열렸다.
“신나지만 무섭고, 때론 슬픈, 또 애틋하고 자랑스러운…… 그리고 위대한 사람의 이야기. 무엇보다 나도 모르게 바라게 되는 꿈에 대한 이야기라네.”
“꿈이요?”
“그래, 핀. 네 아버지가 너처럼 어릴 때 이 영감처럼 바드가 되려는 꿈을 꾸었지. 아마 네 할아버지가 막지 않았다면 지금은 어느 이름 모를 곳을 떠돌며 이야기를 하며 노래하고 있었을 거야. 물론 네 아버지는 이 마을의 유명한 이야기꾼으로서 그 꿈을 이루었단다. 너처럼 멋진 이야기꾼도 낳았고 말이야.”
“아…….”
핀의 작은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그리고 주변의 친구들을 둘러보는 아이의 시선에는 한껏 만족함이 자랑스러움으로 묻어 나왔다.
“그래, 꿈에 대한 이야기지. 너와 같은 아이가 꿈을 꾸었을 때 얼마나 위대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꿈. 그런 꿈 이야기 말이야.”
에뜨랑은 핀과 눈을 맞추곤 이어 아비의 무릎에, 혹은 의자나 탁자에 앉은 아이들과 하나씩 눈을 맞추었다.
“이 이야기는 저 멀리 바다를 건너고 큰 대양을 넘어 존재한다던 아모라스 대륙의 이야기라네.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의 대륙, 말로만 듣던 식민대륙의 실상을 보기 위해 난 배를 탔지.”
“아……!”
에뜨랑이 10여 년간 펍을 찾지 않은 비밀이 밝혀진 것이다.
미트뿐만 아니라 롤이나 다른 장정들도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죽기 전에 한 번은 가 보고 싶었어. 그래서 배를 탄 거야. 길어도 이삼 년이면 될 것 같았는데, 돌아오니 10년이 부쩍 지나 버렸더군. 겨우 펍에 드나들며 어른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던 여기 롤과 그 친구인 자네들이 어느새 꿈 많은 아이들의 아비가 되었고, 자라난 수염 속에 연륜을 감출 만한 시간이 흐른 거야.”
“하하…….”
여기저기서 머쓱한 듯한 롤과 그 또래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10년.
앳된 청년을 능숙한 장년으로 만들기 충분한 시간이다.
에뜨랑은 그것을 아쉬워하는 것이고, 웃음소리도 그것을 인정하는 의미였다.
“아모라스 대륙에 도착한 첫날, 난 어느 외진 곳의 영지…… 그래, 영지라 불러야 하겠지. 그래, 영지야, 영지. 도착하자마자 난 유명한 영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 왠지 모를 이야깃거리가 될 것 같더군. 그건 바드의 직감 같은 거였어. 그래서 그동안 배에서 노래를 불러 주며 벌어들인 모든 골드를 써서 포탈을 탔지. 후후, 너무 놀라지 말게. 원래 바드라는 존재가 그런 것이야. 이야깃거리만 있다면 어딘들 못 가겠는가.”
“하하하…….”
“다행히 포탈은 안정적으로 작동했어. 사실 식민대륙의 포탈을 믿기엔 마음이 안 놓이더라고.”
“그래도 실버도 아닌 골드를 주셔야 했을 텐데, 값을 해야겠지요.”
“허허, 그렇지. 자그마치 10골드였다네.”
“우와!”
10골드라는 말에 모두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로서는 상상치도 못할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후후, 골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네.”
“에뜨랑 아저씨, 그럼 뭐가 중요하단 말이에요?”
서비스로 약간의 과일 안주와 맥주 한 잔을 에뜨랑의 탁자로 올려놓던 미트의 처, 넬이 투덜거렸다. 남자들이란 다 똑같다는 그녀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쓴웃음을 배어 물었다.
“미트 부인이 젊을 적에 그 상냥함은 어디 가고 이젠 완연한 중년 부인이 다 되었군. 당연한 이야기지. 부인들이 아무리 모으려 해도 철없는 남자들은 항상 저질러 대지. 문제는 정말 문제일 거야. 하지만 미트 부인, 그 10골드를 내고 포털을 탔기에 오늘 이렇게 생생한 이야깃거리가 생긴 거라네.”
“어머! 아저씨는 참. 제가 뭐라고 그랬나요? 다만 아저씨도 이젠 노후를 생각해서 골드를 모으셔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허허. 고맙네, 미트 부인. 이젠 이야기를 이어 가야겠어. 그렇지 않다간 아이들이 지루해할 거야, 아마. 허허허.”
서둘러 넬과의 불편한 대화를 끝내고 싶은 에뜨랑은 아이들을 핑계로 말을 돌리며 만돌린의 현을 하나씩 뜯었다.
마치 하프를 뜯듯이 만돌린의 현 하나하나를 뜯을 때마다 맑고 투명한 소리가 신비로운 꿈의 세계로 이끌 듯 펍 안에 울려 퍼졌다. 그에 따라 마법이라도 걸린 듯 모두의 눈은 몽롱하게 변하고 있었다.

모라는 하이에나.
시체를 먹고 사는
전장(戰場)의 들개다.

모라는 잡초.
오롯이 뿌리 내린
전쟁터의 이름 모를 잡초다.

모라는 불꽃.
피를 살라 먹고 피어오른
망자(亡者)의 붉은 불꽃이다.

모라에게는 왕국이 없다네.
그들은 떠돌이이기 때문이지.
뚜렷한 직업도 없다네.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닥치는 대로 마다하지 않는다네.

모라인은 시체를 터는 사람들이라네.
그들의 일과는 전장을 찾는 일에서부터 시작되고 수입의 대부분은 시체로부터 나온다네.
그렇기에 전투를 마친 전장에는 항상 그들이 있다네. 그들은 죽은 시신을 뒤져 옷가지나 무기 등을 수거해서 팔거나 숨겨진 돈이나 귀중품을 턴다네.
그들이 모라, 곧 아모라스 말로 들개라 불리는 것은 망자의 시신을 털어 살아가는 것을 폄하하는 의미라네.

모라는 밑바닥이라네.
하지만 바닥을 기어도 꿈은 있다네.
바닥에 살아도 나름의 소중한 꿈이 있다네.
그래서 모라는 들개가 아니라네.
그들도 꿈을 꾸는 사람이라네.

그 밑바닥에서 꿈꾸는 아이가 어스라네.
어스…….



Chapter 1 피터의 아이들 (1)


“에에, 오늘은 수입이 별로겠는데?”
“꾀부리지 말고 부지런히 뒤져! 알겠어?”
왕초 레토가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리며 을러댔다. 이럴 때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다. 피터 아저씨가 없을 때면 레토는 폭군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레토보다 두세 살은 아래다 보니 열여섯 살의 레토의 주먹이면 자칫 어디가 부러지든 며칠은 고생을 해야 했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피터 아저씨나 전장의 시체들보다는 왕초 레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