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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1권 (3화)
Chapter 1 피터의 아이들 (2)
아이들은 레토를 피해 서둘러 시신들을 찾아 움직였다.
하지만 에리스의 말대로 어젯밤에 벌어진 전투는 별로 치열하지를 못했다.
당연히 시신들도 적었고, 그나마 갑옷이나 무기는커녕 쓸 만한 옷가지도 진즉 사라지고 없었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먼저 보는 것이 임자이기 때문이다.
상황만 허락하면 쓰러진 자의 쓸 만한 방호구나 무기들은 챙기는 자가 임자라는 말이다.
심지어는 부상자를 돌보기보다 방호구를 챙기는 병사들도 전장에서는 그리 보기 힘든 장면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전장에서 시체를 뒤져 연명하는 모라들은 치열한 전쟁을 좋아한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전장에는 그만큼 시신에 손이 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 시신들을 털다 보면 값나가는 갑옷에 무기뿐만 아니라 숨겨 둔 돈과 귀중품도 간혹 찾을 수 있다. 전장에 귀중품을 숨겨 나오는 이들이 상당하기 때문에. 그런 만큼 전투가 치열할수록 확실한 수입을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어젯밤처럼 대충 서로의 간을 보는 전투 뒤에는 쓸 만한 옷가지나 얻으면 그나마 밥벌이를 한 것이리라.
이이들은 거의 반나절 동안 시체를 뒤지며 전장을 누볐다.
간혹 다른 모라들과 만났지만, 그저 모르는 척하고 서로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부딪쳐 봐야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간혹 값나가는 것이라도 나타나면 칼부림이 나고는 했다. 그렇기에 다른 모라들이 모라 짓을 하는 곳은 피해 주는 것이 상례였다.
“왕초! 여기 움직이는 시체야!”
에리스가 레토를 찾았다.
아직 살아 있는 부상병을 트리톤이 발견한 것이다.
부상병도 아이들을 의식했는지 신음이 더 커졌다.
“으으으…….”
아이들은 부상병을 ‘움직이는 시체’라 불렀다.
철수하던 아군이 발견하지 못해 남겨진 부상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번거롭고 데려가 봤자 치료하기도 힘들기에 버림받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아군에게서조차 버림받은 치명상 내지는 중상을 입은 병사, 조만간 죽음밖에 남지 않은 부상병.
그들이 바로 움직이는 시체였다.
“어때?”
“가망 없겠는데? 길면 반나절이야.”
에리스는 가차 없이 반나절을 선고했다. 치명상을 입었기에 반나절이면 죽는다는 의미였다.
에리스의 선고는 때로 의사들보다 더 정확했다. 눈썰미도 그렇지만, 그만큼 많은 경우를 봐왔기 때문이다.
근래 들어 에리스가 선고한 기한을 넘긴 부상병은 찾기 힘들었다.
다가오던 레토가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럼 왜 불러? 그냥 도와줘!”
“피터 아저씨가 알면 어떡하라고?”
“도와주라고, 자식아! 힘들게 버텨 봤자 지!”
퉁명스러운 레토의 말에 에리스는 난처한 표정으로 트리톤과 부상병을 돌아봤다.
전장에서 전문적으로 시체를 터는 모라에게는 원칙이 있다.
전투 직후에 전장을 뒤지다 보면 심심찮게 부상자들을 만나게 된다. 치열했던 전투일수록, 전투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전장일수록 부상자들은 더 많이 나온다.
그때마다 모라들은 대부분 그들의 죽음을 도와준다.
죽음으로 더 이상 고통당하지 않도록 도와준다는 의미였다.
어차피 데려가도 치료할 방도는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다. 약재라 해 봤자 숲에서 구할 수 있는 지혈 약초 정도면 과분했고, 상처를 깨끗이 씻거나 싸매는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런 정도로 치명상을 입고 방치된 그들을 구할 수는 없다.
아군조차도 버리고 떠난 이들. 어차피 죽을 거라면 고통이나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 모라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행인 것이다.
그렇기에 모라인들은 그들을 ‘움직이는 시체’라 불렀고, 남은 호흡을 끊어 주는 일을 ‘도와준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보호자인 피터는 다른 모라들과 달리 아이들에게 돕지 말라고 가르쳤다.
아직 피터의 아이들이 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터는 치료해 줄 수 없으면 그냥 지나치라고 가르쳤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모라의 원로가 피터를 크게 나무란 적도 있었다. 모라인의 법도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아직까지는 피터의 아이들이 칼질하기에도 어리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중이었다.
“트리톤, 도와줘!”
에리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대거보다는 작지만 폭이 넓은 단검을 말없이 뒤춤에서 뽑아 든 트리톤은 신음을 흘리는 부상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것인지 떨리는 손을 들어 올리는 부상병의 심장에 대거를 박아 넣었다.
열네 살 트리톤에게는 힘에 부칠 만한 일이지만, 한두 번 해 본 일이 아닌 것처럼 능숙하게 병사의 죽음을 도와주었다. 그러곤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투로 시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트리톤은 그런 아이였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움직이는 아이. 모르긴 해도 피터의 아이들 중 가장 강한 것은 왕초 레토보다 트리톤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느새 아이들은 다시 자신들의 일에 열중해 갔다.
퍽!
“아야!”
“이 바보 자식아! 그렇게 해서 찾을 수 있겠냐?”
로카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인 보데는 울상을 지었다.
뒤늦게 피터 아저씨의 오두막에 들어왔지만 보데는 사실 로카보다 두 살이나 많았다.
열두 살짜리 로카보다 열네 살 보데가 당연히 덩치도 크다. 하지만 겁이 많은 보데는 항상 로카에게 당하는 편이었다.
그만큼 로카는 영악하고 또 재빨랐다.
“이 바보야, 여길 뒤져야 한다고 했잖아!”
찌익!
로카는 끝부분에 낫처럼 날카로운 칼날이 달린 갈고리로 시신의 사타구니를 찍어 당겼다. 그에 바지가 갈라지면서 시체의 고환이 덜렁 튀어나왔다.
갈고리에 찍혀 갈라진 속살은 돼지의 넓적다리 부위와 별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로카는 스스럼없이 찢어진 사타구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보데나 지켜보던 아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간밤의 전투에서 죽은 시체라 당연히 아직은 몸도 굳지 않은 상태였다. 차라리 식어 굳은 몸이라면 모르겠지만, 약간은 서늘한 느낌의 시신, 그것도 그곳에 손을 넣고 주물거리는 일은 아무리 모라라고 하지만 어른들에게도 꺼려지는 행위였다.
그런데 열두 살짜리 로카가 태연히 그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천연스럽게 시체를 더듬던 로카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는지 이내 시체를 발로 차며 일어섰다.
“새끼! 죽으면서 남길 게 그리 없냐? 에이 씨! 가자, 어스!”
“…….”
로카는 짜증을 내며 어스를 재촉했다.
하지만 어스는 묵묵히 시체를 바르게 눕히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매만져 주었다.
이상한 놈이었다.
항상 이랬다. 어스란 놈은 눈에 띄는 시체를 하나도 그냥 버려두는 경우가 없었다.
“가자니까?”
로카의 짜증석인 말에도 어스는 제 일만 할 뿐이다.
“넌 항상 그렇게 쓸데없는 짓…….”
그때, 로카의 눈이 반짝였다. 어스가 시체의 옆구리에서 뭔가를 빼낸 것이다.
이내 혁대를 뺏어 든 로카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이것 보라니까?”
“우와아!”
주변의 아이들에게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낡은 혁대가 주머니일 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혁대의 중간 부분에 동전과 은전들이 촘촘히 끼어져 있는데, 그중에는 금전도 두 개나 보였다.
로카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게 얼마야?”
“우와!”
보데가 놀라 탄성을 지르다 로카의 눈짓에 찔끔 놀라 뒤로 물러섰다.
로카의 손이 재빠르게 혁대에서 동전을 빼냈다.
퍽!
“아얏!”
정신없이 동전을 빼내던 로카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돌아보는 로카의 얼굴은 이내 환하게 바뀌었다.
“와, 왕초…….”
“이런 것이 나왔으면 즉각 가져와야지, 자식아!”
“헤헤, 당연히 가져가야지요. 여기 있어요. 오랜만에 한 건 했는데요?”
반짝이는 은화였다.
은화를 발견한 레토는 서둘러 혁대를 받아 챙겼다. 콧구멍이 실룩거리는 것이, 기분이 최고조에 오른 모양이었다.
약간의 경멸을 담아 흘겨보던 로카는 레토와 눈이 마주치자 금세 표정을 바꾸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보데, 저 자식이 그냥 지나치지 뭐예요? 하마터면 왕거니를 놓칠 뻔했어요.”
“보데, 이 자식!”
“자, 잘못했어요, 왕초.”
보데의 커다란 두 눈이 금방 눈물로 가득 찼다. 평소 같았으면 발길질이 날아올 것이 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만에 얻은 수익에 기분이 좋아진 레토는 평소와 달리 그냥 넘어가려는 모양이었다.
“잘했어, 로카. 역시 하루라도 모라 노릇을 더 한 것이 표시가 나는구나.”
“헤헤. 왕초 보고 배운 거죠, 뭐.”
“그래, 잘했어. 그런데 로카.”
“네, 왕초.”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로카의 표정을 살피던 레토는 약간은 심각하게 두 눈을 부라리며 노려봤다.
“너, 삥땅치는 것은 누구에게 배웠냐?”
“와, 왕초…….”
“내놔!”
“왕초…….”
“너, 이 자식! 맞고 내놓을래?”
레토의 큰 소리에 찔끔한 로카는 울상이 되어 주섬주섬 품에서 큼지막하고 누런 동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순간, 레토의 눈이 휘둥그레 벌어졌다.
금화, 금화였던 것이다.
그것도 5골드짜리, 100g이나 나가는 큼지막한 금화였다.
“너, 너, 이 자식!”
“잘못했어요, 왕초! 내놓으려 했어요! 골드는 가져 봤자 나는 쓸 수도 없다고요!”
“쉿! 조용해, 이 자식아!”
레토는 로카를 어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모라들이 듣는다면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피터 아저씨의 아이들은 대부분 10대 초반으로, 다른 어린 모라들에 비해서도 평균 대여섯 살 정도는 어리다. 대부분이 어른들로 이루어진 모라인도 상당했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그들의 귀에 금화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서는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더욱이 5골드라면.
레토의 인상이 심각하게 변하고 있었다.
결코 이대로 넘어갈 수 없는 것이, 로카가 어리지만 보통 영악한 아이가 아닌 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레토는 로카의 멱살을 쥐고 들어 올렸다.
“지금부터 입을 열면 죽여 버릴 줄 알아! 알겠어?”
“……!”
로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순순히 내놓으면 오늘 큰 건을 했으니 용서해 주마. 또 네게는 서커스도 보여 주고 특식도 줄 거야. 어때?”
“어, 없어요, 왕초…….”
“이 자식이 정말! 에리스, 이 새끼 잡아!”
레토는 작심한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덩치가 큰 에리스가 엉겁결에 로카를 안아 들자 로카는 그 품에 푹 안겨 버렸다.
“와, 왕초…….”
“이 새끼가 누굴 감히 속이려고…….”
로카의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지만 레토는 그만둘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에리스의 그물망 속에서 낡은 가죽 장갑 하나를 꺼내더니, 로카의 입에 틀어박고 있었다.
겁에 질린 로카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몸부림을 쳤지만, 에리스의 품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헙! 읍, 읍…….”
“새끼, 오늘 왕거니를 얻어서 기분이 좋았다만, 너 같은 놈을 그냥 내버려 두면 질서가 없어져. 이 고블린 같은 새끼야!”
퍽!
“허억!”
단 한 방이지만 명치에 박힌 주먹이다.
로카의 몸이 꺾일 듯 접히면서 에리스의 품에서 풀려나 바닥에 고꾸라졌고, 이내 힘겹게 구토를 해댔다.
레토는 그런 로카의 얼굴을 발로 밟았다.
“지금부터 옷을 벗겨 나오는 동전이 있다면 1쿠퍼에 한 대씩이다. 알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