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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1권 (5화)
Chapter 1 피터의 아이들 (4)


어스는 어떤 시늉도 없이 언덕배기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언덕을 넘는 것은 위험하다. 언덕 너머는 숲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해가 지면 피 냄새를 맡은 몬스터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 아직은 시간이 있지만, 그리 머뭇거릴 틈이 없는 것이다.
“야, 이 자식아! 2골드 줄게!”
“…….”
“알았어! 그래, 반씩 나눠! 그러니 어서 내려와!”
몬스터들이 나타나 어스를 잡아먹어 버리면 제일 좋겠지만, 문제는 로카 자신이었다. 명치와 아랫배가 결려 제대로 달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스는 개의치 않고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로카는 왠지 어스 놈이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안 내려오면 나 먼저 갈 테다, 어스!”
여전히 어스는 언덕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이 시간에 어린 어스를 따라 숲 가까이 갈 수는 없었다. 결국 로카는 과감하게 몸을 돌렸다.
이미 절반을 나누자고 했으니 설마 일러바칠 리야 없을 것이다.
“이 새끼, 제발 몬스터에게 물려 죽어 버려라. 빌어먹을 자식, 네놈이 죽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
미련없이 몸을 돌린 로카는 두려움을 떨치려는 듯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힐긋 언덕을 돌아봤지만, 붉게 물든 석양밖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서둘러야 했다.
그나마 그물망이 비어 무겁지는 않았지만, 명치가 결리고 아랫배가 너무 아파 뛸 수가 없었다.
잠시 잊고 있던 레토를 생각하자 다시 이가 갈리는 로카였다.
“리자드맨 같은 새끼, 라미아 새끼!”



Chapter 2 쫓기는 피터 (1)


“으으…… 무울…….”
어스가 언덕 위에서 발견한 것은 움직이는 시체였다.
피터 아저씨의 오두막으로 돌아가던 중에 하늘과 언덕 사이에 무언가 꾸물거리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족히 오십은 넘은 것 같은 중늙은이는 곳곳이 찢어진 짙은 회색 로브를 걸쳤는데, 온통 검붉은 피에 젖어 있었다. 또한 로브는 특이하게 팔 부분에 세 개의 사선이 그려져 있었다.
상태는 심각했다.
무엇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상태였다. 지난밤에 부상을 당한 것이라면 거의 하루 동안 방치된 상태였으니 살아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아직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인 것이다.
어스는 물주머니를 끌러 입가에 가져다 대어 주었다.
“무, 물…….”
“천천히 드세요.”
대부분의 물은 삼키지도 못하고 입 밖으로 다시 흘러내렸다. 하지만 중늙은이는 잠시나마 기력을 회복하는 모양이었다.
“누, 누구……?”
“모라인 어스예요.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말을 하면서 어스는 중늙은이의 몸을 뒤졌다.
어스가 보기에 중늙은이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심장에 단검이 찔린 상태에서 이토록 오래 살아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지만, 치료한다고 살아날 수 있을 만한 부상은 아니었다.
모라는 시체 덕에 사는 사람이다.
비록 어스가 어리긴 해도 눈썰미는 보통을 넘었다.
어느 때부터인지 시체들의 상처만 보면 치명상을 바로 알 수 있던 것이다.
중늙은이의 상처는 치명상도 즉사의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살아 있다는 점은 그의 능력이 그만큼 탁월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고 중늙은이가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신관이 나선다고 해도 불가능한 상처를 입은 상태에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더욱이 자신의 힘으로 중늙은이를 옮길 수도 없고, 해거름에 돌아가 누군가를 데려올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숲과 가까운 곳이 아니던가.
어스는 이미 중늙은이를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낮의 경우처럼 이럴 때는 부상자들을 죽여주기도 한다. 피터 아저씨는 말렸지만, 고통에 지쳐 죽도록 버려두는 것보다 그것이 더 큰 도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선행은 얇은 흙이나 덮어 주는 것이다.
여하튼 어스는 중늙은이의 몸을 뒤져 몇 가지를 찾아냈다.
꽤 듬직한 주머니와 낡은 가죽 목걸이 하나, 작은 병이 하나였다.
중늙은이는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미안해요. 신관을 불러와도 할아버지는 살 수 없어요. 대신 흙이나 덮어 줄게요. 그리고 이건 내가 가질게요. 내일 다시 와서 몬스터들이 뜯어 먹지 않았으면 깊이 묻어 주겠어요.”
“으으…….”
중늙은이는 다시 혼수상태에 빠진 모양인지 신음만 흘렸다.
어스는 그물망에서 일반적인 대거보다는 좀 작지만 폭이 넒은 단검을 꺼내 분주하게 땅을 팠다.
아홉 살짜리 사내아이가 힘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하지만 10분 정도가 지나자 언덕 부분의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파내는 것이 힘이 들기에 모서리를 떨어 낸 것이다.
어스는 중늙은이를 굴려 모서리 부분에 밀어 넣었다.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중늙은이는 무사히 그 작은 구덩이에 엎어졌다.
해는 이미 넘어갔고 반대편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스는 중늙은이의 몸을 다시 돌려 눕혔다.
로카나 다른 아이들이 미친 짓이라며 빈정대는 이유였다.
죽은 시체가 꺾여 있든 엎어져 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리고 죽은 시체의 옷도 벗겨 가는 모라가 찢어진 옷매무새를 손봐 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어스는 항상 자신이 턴 시체의 옷매무새를 만지고 바로 눕혀 주었다.
그래야 왠지 마음이 편했던 것이다.
그 덕에 남들은 놓칠 만한 수익을 얻는 경우도 꽤 있었다.
오늘의 일도 그런 선행의 결과였다고 생각하는 어스였다.
중늙은이의 시체를 바로 돌리던 어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을 발견했다. 섬뜩한 마음에 뒤로 물러서던 어스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문득 자신의 손에 잡힌 주머니와 가죽 목걸이가 보였다.
정신을 차린 어스는 머리를 흔들었다. 바닥에 깨진 병이 보였다.
언제 깨진 것일까?
분명 무언가 든 것처럼 묵직했는데, 이제 보니 빈병이었던 모양이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병이지만 팔아도 몇 쿠퍼는 받을 수 있었을 것인데, 내심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선지 입맛이 매우 쓰게 느껴졌다. 삼키는 침조차.

중늙은이는 눈을 뜬 채 죽어 있었다.
어느새 많이 어두워졌기에 어스는 서둘러 중늙은이의 눈을 감겨 주고 언덕배기의 흙을 허물어 그 위에 덮었다.
굴러 떨어지듯 언덕을 내려온 어스는 있는 힘껏 내달렸다.
쌍둥이 달, 리브가 달려가는 길 앞으로 어느새 한참을 떠오르고 있었다.

* * *

“헉헉…… 젠장, 이게 뭔 꼴인가?”
피터는 내달리고 있었다.
며칠 전, 어스가 가져다준 블링크 페이퍼가 없었다면 꼼짝없이 흑마법사들의 제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당분간 먹고살 골드도 충분하겠다, 애초에 일거리를 맡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낭트 군의 연대장 말을 거절할 명분이 없지 않는가.
원래 모라인의 직업은 용병이 대부분이다.
부상을 입어 더 이상 전투에 나설 수 없는 사람들이 전장을 따라다니며 죽은 시체를 털어 먹고사는 게 바로 모라인이다. 한데 전쟁고아나 떠돌이들이 끼면서 그 수가 늘어난 것이다.
모라인은 철저하기가 용병보다 더했다.
전투력도 없으면서 군대를 따라다니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욱 철저하고 노력하는 수밖에는 없던 것이다.
모라인은 용병들처럼 고용한 편에 충성할 줄도 알고 책임감도 높았으며, 또한 점령군 편에 복종할 줄도 알았다. 거기에 모라들이 수거해 온 무기나 방어구 등은 피아를 가리지 않고 필요한 것들이었다.
피와 죽음이 오가는 전투 중에도 모라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던 비결이면서 동시에 전투력을 제외하고는 용병들보다 모라의 효용가치가 더 높다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군대도 모라들을 인정해 주는 편이었다.
그리고 간혹 전투가 아닌 다른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워낙 오래 전투 현장을 따라다니다 보니 지형에 대해 웬만한 장교들보다 더 밝았기에 점령지의 모라들은 때로 차출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어제 낭트 왕국 부대의 연대장이 식량을 배달할 일꾼들을 뽑는 자리에 피터도 있었다.
모라로서 직접 지명에 거절할 명분도 없어 피터와 세 명의 모라는 배낭을 메고 전투 현장 주변을 누벼야 했다. 그들이 맡은 영역은 한 개 대대 영역으로,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병사들에게 식량을 조달하는 일이었다.
큰 전투도 없고 몬스터들이 나타나는 깊은 숲만 조심하면 되는, 어찌 생각하면 행운의 일감이었다. 더욱이 간간이 숲가에서 발견한 시체들을 뒤지면 일당 정도는 챙길 수 있었기에 피터는 그럭저럭 만족했다.
그런데 새벽녘에 만난 장교들이 문제였다.
이웃 대대와의 경계 면에서 장교 셋이 작은 언덕배기에 앉아 있고, 주변으로는 병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한데 식량을 나누어 주고 돌아서다 문득 장교들이 앉은 뒤로 작은 동굴이 보였다.
낭트 군의 15연대 장교들은 웬만하면 안면이 있었다.
장교들의 안면이 처음 보는 자들이라 인사치레로 물어본 것인데, 그 순간 뒷목을 가격당하고 쓰러졌다.
그런 뒤, 정신을 차려 보니 암적색의 빛이 괴기스러운 지하였고, 첫눈에 보인 것은 누군가가 사람의 가슴에 손가락을 박아 넣어 심장을 뽑아내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뽑아 든 심장에서 피를 짜내는 마법사들과 그 피를 흡수해 오광성의 암적색 마기를 뿜어내며 일렁이는 물체, 그곳에서는 소환 마법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네크로맨서, 저주받은 네크로맨서들이 분명했다. 아마도 마계의 마수들을 소환하려는 의식 같았다.
피터는 어느 정도 시야가 회복되자 심장을 뽑힌 상태에서 피를 흘리며 몸서리치는 시체들과 그 앞에 묶인 채 순서를 기다리며 가슴을 드러낸 산송장 같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이렇게 죽으려고 전장을 뒤지며 다닌 것이 아니었다.
그때 생각난 것이 바로 어스가 건네준 주머니였다.
그 주머니에는 백 골드가 넘는 금화와 보석이 들어 있었고, 찢으면 2, 30미터 내에 무작위로 이동하는 블링크 페이퍼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두 번 생각할 틈도 없었다.
페이퍼를 찢자 빛이 감싸더니 이내 피터의 몸이 동굴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피터가 다시 나타난 곳은 장교들이 빤히 지켜보고 있던 동굴의 전방이었다.
그 앞에서 경계를 서던 두 명이 갑자기 나타난 피터의 모습에 기겁하며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습관적으로 몸이 반응하며 한 명의 면상을 들이받았다.
콧등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허물어지는 놈의 검을 낚아채며 그제야 검을 뽑으려던 반대편 놈의 목을 날려 버렸다.
문득 피를 뿜어내며 쓰러지는 경계병의 손에 들린 석궁이 눈에 들어왔다.
장전된 상태.
몸을 굴리며 석궁을 잡고 뒤를 향해 원 샷.
피터를 발견하고 뛰어오던 장교 한 놈의 이마에 그대로 파고드는 화살과 놀란 놈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벌어지는 것이 스톱 모션처럼 시야에 들어왔다.
그때, 벌러덩 자빠지는 장교 놈 뒤로 뛰어오는 다른 장교들이 보였다.
두 방, 세 방 연달아 석궁을 날렸지만, 상대는 장교였다. 한 놈이야 너무 어이없이 당했지만, 원래 쉽사리 당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워낙 창졸간에 기습적으로 날린 화살이라서인지 한 발은 장교 하나의 어깨를 관통했다.
삼 연발 후 시위를 다시 당길 틈은 없었다.
피터는 앞에서 달려드는 장교 놈을 향해 석궁을 집어 던지며 품에 손을 넣었다.
달려들던 놈이 휘두르는 검을 보면서 간발의 차로 다시 한 장의 페이퍼를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