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드림 1권 (6화)
Chapter 2 쫓기는 피터 (2)


팔면 50골드는 넉넉히 받을 블링크 페이퍼였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마구였다.
아까운 마음이야 간절했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 어쩌겠는가.
다시 피터가 나타난 곳은 동굴의 후방이었다.
잠시 방향을 잡지 못해 어리둥절해할 때,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한데 놈이 검을 피해 내고 석궁을 쏜 모양이다. 귓전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스쳐 갔다. 정신없이 몸을 구르면서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두르자 나뭇가지와 다른 느낌이 들면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처음 당한 경계병들과는 달리 민첩한 놈이었지만, 피터가 막무가내로 휘두른 검에 다리 하나가 잘린 것이다.
비명을 지르는 놈의 입에 검을 틀어박았다.
이어 석궁을 뺏어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뛰었다.
숲 사이로 길을 꺾어 들자 눈에 익은 작은 공터와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이 보였다.
자신이 내려온 길이었다.
절반도 지나기 전에 누군가가 공터 입구로 접어드는 기색이 느껴졌다.
달리는 상태에서 몸을 돌려 석궁을 쐈다.
끝까지 검을 휘두르던 그 장교 놈이었다.
놈이 멈칫하며 옆으로 피하는 사이, 피터는 오솔길로 뛰었다.
그때, 오솔길 앞에도 누군가 나타났다.
경계병 둘. 피터는 석궁을 쏘면서 지체 없이 달려갔다.
화살이 한 놈의 목젖을 꿰뚫는 모습과 함께 그 곁에 깜짝 놀라는 한 놈이 보였다.
그사이 뒷골에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피터는 미친 듯이 왼쪽으로 몸을 굴렸다. 검이 간발의 차로 오른쪽 귓전을 스치며 지나갔다.
어깨에 화살이 박힌 장교 놈이 어느새 따라붙은 것이다.
꼼짝없이 포위된 형상이었다.
장교 놈은 자리에 멈춰 서서 이를 악물고 화살을 뽑아냈다.
피에 젖은 장교용 아머 위로 꿀럭이며 핏물이 솟구쳤다.
그 뒤로 다른 장교 놈과 병사들이 천천히 조여 오는 것이 보였다.
잠시도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피터는 오솔길 쪽의 경계병을 향해 석궁을 던지며 몸을 굴렸다.
석궁을 겨누던 경계병이 몸을 피해 옆으로 움직일 때, 한 바퀴 구르며 다가선 피터의 손바닥이 경계병의 턱을 쳐올렸다.
요행이었다. 경계병도 결코 약하지는 않았지만 피터의 허를 찌르는 공격에는 속수무책인지 목이 빠질 듯 뒤로 젖혀지며 땅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모르긴 해도 턱이 깨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피터가 화살에 목이 뚫려 쓰러진 경계병의 검을 들고 일어섰을 때, 오솔길을 막으려 달려드는 장교 놈이 보였다.
피터가 뒤로 물러서는 순간, 오솔길을 막아선 장교 놈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었다.
결국 가장 약해 보이는 쪽은 부상당한 장교였다.
장교라면 곧 기사. 기사와 부딪치려면 피터가 낼 수 있는 최고의 힘을 다 쥐어짜야 했다.
피터는 두 손으로 검을 꼬나들고 상대방을 노려봤다.
상대는 피터를 얕보았는지 상체를 그대로 드러낸 채 두 주먹만을 들어 올려 피터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 순간, 피터는 비로소 상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상대는 디란 왕국의 마법 아카데미 출신인 전투 마법사가 분명했다. 두 주먹을 쥔 상태에서 비스듬히 모로선 자세. 바로 디란의 전투 마법사 특유의 자세인 것이다.
그렇다면 동굴 속에서 마수를 소환하던 네크로맨서들은 디란 왕국의 흑마법사가 분명했다.
낭트 왕국의 진영(陣營)에 숨어들어 마수들을 소환하려다 피터가 동굴에 관심을 가지자 제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예전부터 디란 왕국이 흑마법사들의 소굴이라던 소문이 있었는데, 과연 그 소문이 진실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운이 지지리도 없었다.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후회도, 자책도, 화도 났다.
피터는 이를 앙다물었다. 어찌 되었든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디란 왕국의 전투 마법사를 상대로 생존을 자신할 수는 없더라도 해 보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그냥 죽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전투 마법사란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전투 마법만 전문적으로 익힌 유형과 마검사처럼 마법을 이용한 검술이나 전투 기술을 익힌 유형이었다.
지금 피터의 눈앞에 있는 상대는 후자의 경우였다. 마법사의 로브나 마법 갑옷 헤르시온을 걸치지 않고 장교용 아머만 걸친 것으로 보아 전투 기술을 익혔음을 알 수 있었다.
피터는 장교의 날숨에 검을 휘둘렀다. 들숨에 비해 날숨은 그만큼의 호흡이 예비 동작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는 슬쩍 검을 곁으로 흘리면서 벼락처럼 블랙 포그 핸드(Black Fog Hand)로 피터를 잡으려 했다. 블랙 포그 핸드는 데스 핸드(Death Hand)처럼 닿는 것을 그 즉시 사멸시키지는 못하지만, 그대로 굳혀 버리는 마법이다.
과연 디란 왕국의 전투 마법사였다. 블랙 포그 핸드는 그들이 사용하는 주 무기였기 때문이다.
피터는 다시 몸을 굴리면서 검을 옆으로 그었다.
따앙!
그 순간, 강한 충격이 손바닥에 전해지면서 검을 놓치고 말았다.
머뭇거릴 틈도 없이 블랙 포그 핸드가 땅을 헤집었다. 죽지 않으려면 머뭇거릴 틈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 문득 피터의 손에 턱이 깨지며 넘어지던 경계병이 놓친 석궁이 잡혔다.
그런 뒤, 피터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의 행동뿐이었다.
원 샷!

눈앞에 오솔길이 보였다.
전투 마법사가 어찌 되었는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그저 죽어라 뛸 뿐이었다.
뒤쫓는 자들의 발걸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간밤에 식량을 나누어 줬던 병사들이 생각났다. 무작정 오솔길로 달려가다 그들이 있던 곳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일단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 모여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숲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려왔다.
추적해 오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비명 소리와 싸우는 자들의 외침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이후로 피터는 벌써 몇 시간째 쫓기고 있었다.

* * *

“헉헉, 헉헉…… 네놈들 뜻대로 되지 않을…….”
“순순히 내놓는다면 네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흥! 목숨이 두려우면 애초에 만지지도 않았다. 헉헉…….”
칼립소 대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호통을 쳤다. 비록 당할지라도 그것만큼은 빼앗겨선 안 되기 때문이다.
칼립소는 이를 갈며 피터를 추적해 왔다.
맹세코 놈은 모라가 아니었다. 아니, 모라일 수가 없었다. 모라라면 결코 이처럼 재빠를 수도 없고 전투력이 뛰어날 수도 없는 것이다.
전투력이 없어 시체나 터는 놈들이 모라가 아니던가. 그런 놈이 어찌 그토록 뛰어난 전투력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경계병 둘을 단숨에 거꾸러뜨린 것도 놀랍지만, 설마 전투 마법사로 악명을 날리던 란랑드를 석궁 따위로 해치울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은 정말 생각조차 못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검이 날아오는데도 태연하게 블링크 페이퍼를 찢는 담력은 자신이라도 쉽지 않은 행동이었다.
몸을 구르면서도 멈추는 순간에 정확하게 석궁을 발사하는 솜씨, 게다가 중급의 전투 마법사 맥크리어와 일대일 대전에서 결국 이긴 것은, 직접 눈으로 봤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놈의 석궁 솜씨는 실로 귀신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기사라면 절대 바닥을 구르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놈은 낭트의 정보요원일 가능성이 높았다.
생각해 보니 처음 식량이라고 들고 나타났을 때, 절뚝이던 다리도 멀쩡했다. 다리를 저는 것처럼 꾸미고 탐지하며 돌아다니던 낭트 정보부 놈이 분명한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너무 쉽게 동굴 현장으로 들여보냈다.
후회가 된다. 차라리 단숨에 죽일 것을.
어차피 필요한 제물은 모두 준비된 상태였다. 미련없이 멱을 땄다면 지금의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두서없는 상념이 밀려든다.
절묘한 변장이었다.
모라인은 시체를 털어 먹고사는 인간 말종들이 아니던가. 그래서 모라, 곧 들개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이 땅에서 가장 바닥을 기는 천한 존재들인 것이다.
낭트 왕국의 정보부면 최소한 준귀족 출신들인데 설마 모라로 변장할 줄 누가 생각이나 해 봤겠는가. 아니면 블링크 페이퍼를 지닌 모라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문제는 놈이 동굴 현장을 적나라하게 확인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모라스 대륙뿐만 아니라 테헤란 대륙마저 디란 왕국에 등을 돌릴 수 있는 엄청난 파급 효과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칼립소가 피터를 잡아 죽여야 하는 이유였다. 어떻게든 놈이 정보부에 보고를 올리기 전에 처리해야만 하는 것이다.
불과 한 시간 정도 놈을 놓친 것에 불과했다.
드디어 놈을 추적해 치명상을 입혔으니 천천히 놈들의 연락책을 추격하여 박멸할 계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치명상을 입혔다는 잠시의 방심이 놈이 다시 도주할 틈을 주었고, 결국 그 짧은 시간이 이들까지 불러들인 것이다.
실로 귀신같은 자들.
낭트 왕국에서 기른 자들은 결코 아니었다. 틀림없이 놈의 연락을 중간에서 가로챈 아크란 제국에서 온 자들이거나 영웅 크레시의 추종자들일 것이다.
테헤란 대륙의 아크란 제국이나 영웅 크레시의 추종자들은 언제나 그것을 추적해 왔기 때문이다. 제국은 증거를 소멸시키기 위해서였고, 영웅 크레시의 추종자들은 그 증거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가져오면서 그토록 조심했던 부분이다. 흔적을 쫓는 그들을 피해 그토록 경계했던 부분이다.
눈앞이 흐려지며 분노한 부친의 얼굴이 그려졌다.
순순히 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록 조각이라도 그것은 디란 왕국 이전에 가문의 특급 비밀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소멸시킬지라도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자신이나 부친은 물론이고, 가문 자체의 존망(存亡)도 보장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에는 이들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
한데 이 자리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갑작스레 나타난 놈들은 너무도 집요했다.

“내놔라!”
“내가 쉽게 줄 것 같으냐?”
“아직까지 버틸 힘이 남았더란 말이냐? 처리해라!”
우두머리의 말에 기사 복장의 사내가 나섰다.
이미 겪어 본 바 사내는 무서웠다. 헤르시온을 착용하지 않고도 자신에게 허점 하나 보이지 않고 이렇게 중상을 입힌 자였다.
자신의 기억에 이토록 강한 기사는 몇 명이 없었다.
너무 많이 흘린 피 때문인지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다.
조금이라도 힘이 남았을 때 틈을 만들어야 했다. 리멤버 다이스(Remember Dice)는 누구에게도 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으아아!”
펑!
블랙 포그 핸드로 기사의 오른팔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버스트(Burst)를 상대의 발밑에 터뜨렸다.
딜레이 타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이다. 하지만 압축 폭발[Compression Burst]도 아니고, 일반적인 버스트로는 상대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딛고 있던 발밑이 터질 때, 기사의 몸이 그림자처럼 위치를 이동하면서 검이 뻗어 나왔다.
“일렉트릭 스파크(Electric Spark)!”
스파크가 검을 타고 기사에게 흘러드는 것이 선연했다.
움찔하며 움츠러드는 기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올 때, 다크 블로(Dark Blow)의 검은 바람으로 기사를 덮쳤다. 구동어조차 필요없는 칼립소 대위의 주특기였다.
츠츠츠츠츠!
드디어 당한 만큼 놈의 명을 끊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신속히 처리하고 도주해야 했다. 하지만 웬만한 기사들이면 이미 죽었을 다크 블로의 검은 바람을 뚫고 빛나는 검 하나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선명한 청색 블레이드가 칼립소의 왼쪽 가슴을 훑었다.
소드 마스터의 전유물인 오러 블레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