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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1권 (10화)
Chapter 4 리멤버 다이스 (3)


우지직!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피터가 뭔가로 입구를 막은 것이 분명했다.
좁은 통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닫혀 있는 문이 하나 보였다. 아마도 창고에 가까운 어디쯤일 것 같았다.
통로는 칠흑같이 어두워야 마땅했지만 다행히 리멤버 다이스에서 나오는 암적색의 빛으로 인해 그런대로 사물을 식별할 수 있었다.
문을 열자 작은 방이 나왔는데, 한쪽 벽으로는 플라스크와 비커, 그리고 책과 이상한 물건들로 가득 찬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구석에는 작은 침대도 있었는데, 마치 마법사들의 연구실 같았다.
등불을 밝히자 어스는 답답함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암적색의 빛이 기분을 나쁘게 만들면서 가슴까지 답답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침대에 주저앉은 어스는 갑자기 들이닥친 현실을 이해하려 했지만,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레토가 로카의 돈이 담긴 통을 변소에서 빼낼 때, 어스는 그 곁에 있었다. 놀의 동굴에서 저녁 재료를 가져오다 우연히 본 것이다.
레토는 위협했지만 어스는 아예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레토는 아이들을 불러모아 인심을 쓰며 서커스를 보러 갔다.
로카에게 말을 해 줘야 할 것 같았지만, 어스는 말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어스가 보기에는 욕심 많은 레토나 평소에 거짓말로 아이들의 것을 빼앗는 로카나 다 똑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로카의 돈이 그렇게 쓰이는 것은 싫었다.
그래서 따라가다가 슬며시 뒤로 빠져 버렸다.
피터가 오면 먹을 음식이라도 준비해 놓을 생각으로 오두막에 들어서려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신음 소리 같은 것이 들렸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계단의 손잡이에 피가 묻어 있었다.
예전에도 큰 상처를 입고 돌아오곤 했던 피터가 생각난 어스는 신음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고, 창고 옆에서 주저앉은 낭트 장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장교는 이미 오른팔은 어깨에서부터 떨어져 나갔고 왼팔 역시 팔뚝 부분이 없었다.
피를 지혈하지 못한 상태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자살과도 같은 행위였다. 어스는 서둘러 어깨와 팔을 싸매 지혈부터 했다.
능숙한 어스의 솜씨에 장교는 놀라는 모양이었지만,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 빠지면서 횡설수설했다.
하지만 말속에 누군가 쫓아온다는 내용이 있어서 어스는 그를 바로 옆에 있는 놀의 동굴로 데려갔다. 어차피 그곳만큼 안전한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혼미한 중에도 장교는 어스에게 품속의 주머니를 꺼내게 했고, 그 안에 담긴 정사면체를 자신의 심장 부위에 올리게 했다.
그런데 심장 부위의 옷을 헤치던 어스는 깜짝 놀랐다.
장교는 가슴에는 길게 상처가 나 있었고, 이미 심장도 멈춘 상태였다.
어스가 아는 상식으로는 진즉 죽었어야 했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장교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계속 뭔가를 말하려 했다.
심장에 그것을 올려 주자 장교는 비로소 안심을 하며 잠이라도 자는 듯 눈을 감았다.
그때부터 그의 몸에서 신기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 물건에서 뭔가가 흘러나와 심장으로 들고나더니 심장 부위의 상처가 차츰 줄어드는 것이었다.
신기하게 상처들이 아물고 있던 것이다.
어스는 기현상을 보다 문득 누군가 추격해 온다는 말이 생각났다. 하여 서둘러 나와서 동굴 뒤의 비탈길에 가짜 흔적을 만들었다. 간혹 가다가 손에 묻은 장교의 피를 나뭇가지에 묻히며 한동안 이리저리 달려갔다가 온 것이다.
동굴로 돌아왔을 때, 분명히 멈췄던 장교의 심장은 다시 뛰고 있었고, 잘린 팔뚝도 기괴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어린 어스였지만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기현상이었다.
그런데도 장교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고, 안색은 검푸르게 죽어가는 모습처럼 보였다.
어스가 장교를 흔들어 깨웠다.
겨우 눈을 뜬 장교는 꼼짝도 못했고 말도 안 나오는지 그저 눈동자를 굴려 어스와 왼쪽 아래만 바라봤다.
분명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 뜻을 알기는 어려웠다. 다시 장교가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어스는 느껴지는 바가 있어 심장의 물건을 떼어냈다.
그러자 작살을 맞은 물고기처럼 장교의 몸이 퍼덕였다. 깜짝 놀라 다시 올려 주려 했지만 장교의 인상은 좀 전과 달리 확실히 펴진 모습이었다.
망설이던 어스는 피터가 생각났다.
지금쯤이면 피터가 돌아올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피터 아저씨라면 이 장교를 구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교의 안색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어스는 피터를 부르러 나가다 로카를 만났다.
로카의 표정과 태도, 말까지 뭔가 이상했다.
더욱이 피터 아저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에 입구에 묻어 있던 피가 생각나면서 정신없이 오두막집으로 달려왔다.

‘아이들은 누가 죽였을까? 피터 아저씨는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장교는 대체 누구고, 왜 오두막까지 왔을까?’
막연하게 장교가 그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피터와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인물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어스는 생각했다.
“이것이 뭘까?”
아무리 살펴봐도 어스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스는 피터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결국은 이것을 어떻게 지키느냐의 문제였는데, 달리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간혹 레토는 아이들이 숨긴 것을 뒤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숨기면 어떨까도 생각했지만, 피터는 항상 지니고 다니라 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어떻게 리멤버 다이스를 지킬지 고민하던 어스는 은화를 삼키던 로카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리멤버 다이스는 금화보다도 몇 배는 더 컸고, 정사각형이니 목구멍에 넘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 뱃속에 있는 동안은 안심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어스는 결국 리멤버 다이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역시 어린 어스의 작은 목구멍으로 넘기기에 리멤버 다이스는 너무 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삼킬 수 있는 크기가 있기 때문이다.
힘들고 아팠지만, 뜻밖에도 그것이 넘어가고 있었다.
목이 너무 아파 어스의 눈에서 눈물이 절로 나왔다. 그럼에도 어스는 억지로 삼켰다.
어스는 느끼지 못했지만, 숨이 막히지 않은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갈수록 고통이 심해졌다. 모서리에 목이 찢어진 모양이다.
목을 부여잡고 한참 동안 꼼짝도 못한 채 울던 어스는 차츰 고통이 목에서 가슴으로 번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지독한 극통이었다.
심장이 뛸수록 용광로에 빠진 것처럼 뜨거워지는 심장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피가 느껴졌고, 폭발 직전의 용암의 기포처럼 심장이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결코 어린 어스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으려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어스는 심장이 터진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면서 쓰러져 버렸다.

* * *

어스는 한 달 만에 겨우 지하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리멤버 다이스를 삼키고 기절했던 어스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깨어났다. 등불이 꺼진 것을 보니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다.
다시 며칠일지 모르는 시간을 어둠 속에서 머무르던 어스는 결국 통로로 나갔다.
배가 너무 고픈데다 무엇보다 가져왔던 물주머니의 물이 모두 떨어져 갈증을 견딜 수 없던 것이다. 그런데 식탁 아래의 카펫을 무언가가 누르고 있어서 아무리 문을 열려고 해도 움직이지가 않았다.
피터가 상다리를 꺾어 비스듬히 눌러 두며 빠져나올 틈을 만들어 놓았지만 오두막에 불이 나면서 탁자마저 타 버렸고, 그 위에 지붕이 무너지면서 출구가 막혀 버린 것이다.
그랬기에 어린 어스의 힘으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다시 침대에 누운 어스는 꼼짝없이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굶어 죽거나 그전에 목이 타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후로도 계속 굶주렸지만 어스는 멀쩡했다. 비록 배가 고파 죽을 지경에다가 목이 타서 죽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움직이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어스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의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분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탈출 직전에는 책의 글씨까지 분별해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어린 어스가 생각해도 놀랍고 이상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어스는 이윽고 침대가 붙은 벽에서 창고로 통한 길을 찾아 지하를 탈출하게 되었다.
막힌 장소였는데도 바람이 느껴져 벽을 뜯었더니 창고로 통한 길이 나온 것이다.

피터의 오두막은 불에 타서 폭삭 주저앉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15연대 진영을 찾은 어스는 황당한 일을 당했다.
불과 며칠이라 생각했는데, 그사이 진영이 텅 비어 있었다. 겨우겨우 병든 노인 셋을 만난 어스는 더욱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꽤 오랜 시간 지하에 있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자그마치 한 달도 전에 오두막이 불탔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피터 아저씨와 아이들도 사라져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한 달 전 그날, 레토는 입에 칼을 물고 집시의 마차에서 발견되었고, 마르카는 불탄 오두막 앞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지만, 나머지 아이들은 모라인 원로들까지 나섰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보데도 어느 날 땅으로 꺼진 듯 사라져 버렸다며 노인들은 진저리를 쳤다. 그 무렵, 낭트 군 진영에 마계의 마물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마물들의 습격으로 15연대는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고, 결국 8연대에 흡수되어 중앙 전선으로 이동했다.
당연히 모라인 대부분도 15연대를 따라갔다. 마물이 나타난 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진영이 있던 곳에 남겨진 사람들은 죽음을 앞둔 병든 자나 늙은이 몇몇에 불과했고, 그나마 몇은 며칠이 안 되어 죽어 나간 상황이었다. 병도 병이지만 스스로 죽기를 작정했던 탓이다.
며칠 동안 어스는 병든 노인들의 심부름을 하며 함께 지냈다. 하지만 사흘째 되던 날, 한 노인이 죽더니 며칠이 안 되어 남은 두 노인도 영원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어스는 노인들의 집에 불을 놓고 진영을 떠났다. 일단 15연대를 따라간 모라들을 찾기로 한 것이다.
그들이라면 최소한 피터와 나머지 아이들의 소재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먼 길을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스는 그럭저럭 길을 찾아갔고, 도중에 죽어가는 한 여자도 구할 수 있었다.
집시들이 떠난 자리에 작은 마차와 함께 버려진 여자였는데, 발견 당시 고열에 시달려 거의 죽은 시체와 같았다. 어디에서 입은 상처인지 목에서는 피고름이 흘러나오면서 호흡도 어려운 상태였다.
고온다습한 날씨 탓에 왼쪽 뺨에서부터 목까지 이어진 자상은 치료를 했음에도 곪은 것 같았다.
피터가 가르쳐 준 대로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 보니 목뼈가 드러날 정도로 상처가 썩어 있었다. 이미 살아 있는 시체와 다름없었지만, 어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여느 모라인들처럼 도와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닷새가 지났을 때 여자의 열이 내렸고, 다시 보름이 지났을 때 여자는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다만 성대를 다쳐서인지 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여자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어스는 그녀와 함께 중부전선으로 향했다.
여자로 인해 많은 시간을 허비했지만 동행하면서 어스는 많은 부분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일단 마차가 있어 편했고, 나이 든 여자가 있으니 여관에도 들어갈 수 있고, 먹을 것을 살 수도 있었다.
결국 어스는 근 세 달 만에 중부전선에 도착했다.
그러나 네 달 만에 만난 모라인 무리에도 피터와 아이들은 없었고, 어떤 소식도 들을 수가 없었다.
어스는 다시 피터의 오두막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피터나 아이들이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오두막으로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심을 굳힌 어스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