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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1권 (11화)
Chapter 5 새로운 시작 (1)
두 달 만에 피터의 오두막과 사흘거리에 있는 국경 도시 타르 성에 도착한 어스. 그리고 그곳 시장 골목에서 어스는 구걸하고 있던 에리스를 발견했다.
피터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비슷한 또래의 다른 모라인 중에서도 가장 덩치가 컸던 에리스다.
하지만 반년 만에 만난 에리스의 모습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살이란 살은 다 빠져서 가죽과 뼈밖에 남지 않은 몸매에 퀭한 두 눈과 홀쭉한 볼, 도드라진 광대뼈는 오랫동안 같이 살았던 어스도 모르고 지나칠 정도였다.
더군다나 제대로 치료도 못했는지 머리의 반은 땟물이 가득한 천으로 칭칭 동여맸고, 오른 팔뚝의 뼈도 흉물스럽게 드러난 상태에서 피고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스는 구걸해 온 음식을 가져다 먹이는 보데를 발견한 뒤에야 그가 에리스인 줄 알 수 있었다.
에리스는 어스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먹는 것이나 싸는 것도 구분치 못하는 상태였다.
머리의 반이 깨지는 부상에 치료조차 변변치 못했으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용할 지경이었다.
보데조차도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느닷없는 레토의 죽음에 에리스와 아이들은 피터를 찾아 오두막으로 달려갔다.
당시 보데는 레토의 시신을 지키며 집시의 마차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오두막이 불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마르카의 시신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던 보데는 원로들의 도움을 받아 레토와 마르카의 시신을 묻을 수 있었다.
방황하던 보데는 놀의 동굴 안에서 상처 입고 죽어가던 에리스를 찾았다. 이후, 에리스를 치유하면서 놀의 동굴에 머물렀다.
피터는 놀의 동굴에 식량을 저장하고 있었기에 두 아이가 살아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식량이 떨어지기까지 두 달여를 그렇게 보낸 보데가 다시 진영을 찾았을 때는 사람 하나 찾을 수 없는 텅 빈 건물들뿐이었다.
보데가 놀의 동굴에 들어가던 그날, 마물들의 습격이 있었고, 이미 15연대 지역을 비롯한 근방은 디란 왕국의 땅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식량도 다 떨어졌기에 놀의 동굴에 더 이상 머무를 수도 없던 보데는 국경을 넘어 근방에서 제일 번화한 타르 성으로 갔다.
한편, 에리스는 워낙 건강했기에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머리의 상처와 부상을 제때에 치유하지 못해 반신불수가 되었고, 유아기와 같은 퇴행도 나타나며 심지어 걷는 것조차 제대로 못하고 종일 울기만 했다. 그런 에리스를 돌보는 것은 누구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전시에 고아가 무슨 일이나 할 수 있겠는가. 살기 위해서는 구걸이 아니라면 도둑질을 해야 했다.
보데는 타르의 시장 한쪽에 자리를 잡고 구걸을 했다.
국경 도시다 보니 수많은 전쟁고아와 떠돌이들이 시장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동안 많이 맞기도 했고 쫓겨 다니기도 했지만, 워낙 형편이 안 좋은 에리스 덕에 그나마 구걸을 할 수 있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보데는 어린 어스를 끌어안고 통곡을 터뜨렸다.
이후, 어스는 보데, 에리스와 함께 놀의 동굴로 돌아왔다.
서커스를 보던 날부터 6개월이 지난 어느 화창한 날이었다. 이때부터 어스와 여자, 보데와 에리스까지 네 명이 한 가족을 이루어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2개월이 지난 지금, 에리스가 어스를 알아보고 있었다.
“어, 어스…….”
“정신이 들어, 에리스?”
“헤…… 어스다! 보데, 어스……!”
에리스는 어눌하지만 그나마 의사를 표현했다.
쉼없이 흘리던 침도 멈췄고, 몸도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많이 회복된 상태였다. 두 달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발전이었다.
새삼 이곳으로 돌아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어스였다.
하지만 에리스는 여전히 피터와 아이들에 대한 사건은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여자의 이름이 베누스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여자를 본 에리스가 고함을 질렀기 때문이다.
비로소 여자를 알아본 보데의 말에 의하면 그날 레토가 죽을 때 같이 있던 여자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로카로부터 들었던 기억이 났다. 레토가 반했다는 바로 그 여자였던 것이다.
비로소 어느 정도 상황을 정리한 어스는 놀의 동굴에서 그렇게 살기로 했다. 피터나 아이들이 살아 있다면 틀림없이 놀의 동굴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돈도 있고, 마차도 있었다.
마물이 나타났다는 소문으로 인해 이곳을 찾는 사람도 없었고, 몬스터들조차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간혹 먹을 것을 사 오는 것이 문제였지만, 베누스와 함께하면 어렵지 않게 먹을 것을 사 올 수도 있었다.
말은 어스가 하고 베누스는 보호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몇 번 남자들이 흑심을 품고 덤벼들었지만, 베누스의 상처를 보고는 기겁을 하고 물러났다.
이후로 베누스는 얼굴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게 시간은 쉼없이 흘러갔다.
어스는 그렇게 피터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며 오늘과 같은 내일을 기원하고 있었다.
* * *
“뭐 하는 거야, 어스?”
“보데, 조용히 가서 에리스를 데려와.”
갑자기 마차를 챙기는 어스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보데였다.
“왜 그러는데?”
“누군가 진영을 뒤지고 있는 것 같아.”
“떠돌이들이 들어온 거야?”
“아니, 마법사들 같았어.”
“히익! 마법사?”
보데의 눈이 커질 대로 커졌다.
마법사는 장교들도 꼼짝 못하는 지체 높은 사람들이었다. 기사나 장교들도 마법사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본 뒤로 보데에게 가장 높은 존재는 마법사였다.
“마법사님들이 왜?
“글쎄, 여하튼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아. 그러니 가서 에리스를 데려와.”
“아, 알았어.”
“방목장 쪽으로 와. 알았지?”
“응, 알았어!”
보데가 뛰어가는 것을 본 어스도 서둘렀다.
진영을 뒤지던 마법사들이 언제 방목장 쪽으로 다가올지 몰랐다.
혹시 있을지 모를 몬스터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낮에는 말을 15연대 방목장에 풀어두었는데, 집시 출신인 베누스는 낮이면 그곳에 가곤 했다.
베누스는 말갈기를 손질하다 반갑게 어스를 맞았다.
“마법사들이 진영을 뒤지고 있어요. 도망가야 해요.”
“아아……!”
“왜요? 도망쳐야 한다니까요?”
베누스는 서둘러 마차를 연결하던 어스의 손을 잡았다. 어스의 계획은 마차를 타고 도망가는 것이었지만, 사실 마차의 흔적은 추격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어스는 사려 깊게 베누스의 손짓을 주시했다.
놀의 동굴에서만도 거의 십 개월을 같이 생활하다 보니 어느 정도는 뜻이 통했던 것이다.
“마차로 도망치면 흔적이 남는다고요?”
“음……!”
베누스는 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냥 도망치다가는 잡힌다고요.”
“음……!”
“동굴 주변으로는 우리가 남긴 흔적이 너무 많아요.”
베누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숲을 가리켰다.
“깊은 숲에는 몬스터가 나타날 수 있는데, 에리스까지 데리고 갈 수 있을까요?”
“……!”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에리스는 어디에 있든지 표시가 났다. 몬스터 때문에 깊은 숲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고 숲 입구에 숨어야 하는데, 에리스가 있다면 문제인 것이다.
그 순간, 베누스는 어스가 자신보다 사려가 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나이와 달리 어스는 누구보다 깊은 관찰과 통찰력을 지녔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하여 베누스는 앞으로 어스의 말은 무조건 따르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곧장 말에 안장을 지우고 마차를 연결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어스는 한 장소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요. 숨을 곳이 있어요.”
베누스를 바라보는 어스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어스는 창고로 들어가 짐들을 치우고 바닥을 열었다.
보데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어스의 독촉에 서둘러 지하로 내려갔고, 이어 에리스와 베누스도 내려갔다.
베누스가 어스의 손을 잡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흔적을 지워야 했기 때문이다. 빙그레 웃어 주면서 베누스의 손을 떼 입구를 닫은 어스는 다시 짐들을 밀어서 출구를 막고 바닥에 건초를 흩어 놓았다.
창고에서 나온 어스가 방목장으로 가려고 사방을 살피는데, 그때 창고 뒤편의 동굴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곳이다! 샅샅이 뒤져라!”
“충!”
창고로 돌아가자니 소리가 날 것 같고 앞으로 나가자니 화장실 외에는 엄폐할 곳도 없는 개방된 곳이었다.
그 순간, 문득 똥 푸는 구멍이 생각났다.
크지는 않지만 어스의 작은 몸이 들어가기에는 모자라지 않았다.
어스가 내달리자 그 작은 몸이 번개가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구멍을 향해 빨려들었다.
우드드.
쿵!
구멍에 들어간 직후, 창고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화급하게 들려오는 음성에는 분노가 어려 있었다.
“뭐냐?”
“소리가 들린 듯해서…….”
“저기 화장실도 찾아봐!”
“충!”
“분명히 최근까지 누군가 이곳에서 거했던 흔적이 있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충!”
들리는 음성만으로도 꽤 많은 사람들이 온 것 같았다.
우연히 진영에 버려진 물건들을 주우러 가다가 지나는 마법사의 대화를 듣고 피한 것인데, 하늘의 돌보심 같아 신께 감사를 올리는 어스였다.
누군가 화장실에 살피는 것 같더니, 단숨에 부서져 버렸다. 어떻게 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엄청난 힘에 화장실이 폭발하면서 나무 파편이 어스의 등에 박혀들었다.
어스는 입을 틀어막으며 신음을 삼켰고, 놀란 쥐들이 소스라치며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바란 중위님, 우리가 찾는 것이 대체 뭡니까?”
“어스라는 아이가 지녔을 것이라 생각되는 물건이다.”
“하지만 그날 우리는 모든 아이들을…….”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니 어스라는 아이가 그 물건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다.”
“저는 아직도 그 아이는 영…….”
“아트 소위, 말조심해라! 카르와인 후작가의 양자시다.”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칼립소 대위님께서 깨어나지 못하시는 것도 그렇고요.”
“대위님을 구출한 곳이 여기였다. 바로 그분이 구한 것이고…….”
어스는 두 장교가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분명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리멤버 다이스…….’
그렇다면 칼립소 대위라는 사람이 그 장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두 장교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창고가 무너졌다고는 하지만, 10미터가 넘는 거리인데 너무도 선명한 소리였다.
“하지만 갑자기 이딴 곳으로 보내는 것이 엿 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겨우 어린아이 하나가 가진 물건에…….”
“아트 소위, 쓸데없는 소리 마라! 우리는 그저 명령대로 따르면 돼!”
“알겠습니다. 그런데 동굴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군요.”
중위의 호통에 찔끔한 아트 소위는 말을 돌렸다.
자신의 상관이 어떤 사람인 줄 알기 때문이다.
바란 중위, 그는 뼛속까지 철저한 군인의 표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