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드림 1권 (12화)
Chapter 5 새로운 시작 (2)


“아무래도 떠돌이들이 아닐까요?”
“글쎄,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스라는 아이가 칼립소 대위님을 만난 것은 사실이다.”
“누구든 동굴에서 살았다면 어스라는 아이의 행방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그렇기에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 아트 소위, 일단 놈들이 국경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국경 수비대에 수비 강화를 요청하게.”
“옛, 알겠습니다.”
아트 소위는 작은 상자를 꺼내 그 위에 수정구를 올렸다.
그것은 디란 왕국의 전투 마법사들이 가지고 다니는 마법 통신기로, 마나의 소모가 작아 다른 왕국에서 매우 탐내는 최신 기술 중 하나였다.
그사이, 흩어졌던 전투 마법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중위님, 말씀하신 것은 찾을 수 없습니다. 동굴뿐 아니라 주변에는 릴 디텍션(Real Detection : 진품 탐지)에 반응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그들이 물건을 탈취해 갔다는 말인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바란 중위는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떨쳤다.
“동굴은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도록 해라!”
“충!”
“아트 소위, 그쪽 구멍도 철저히 막아!”
“옛, 알겠습니다!”
“들어라! 우리가 찾는 것은 물건만이 아니라 열 살 정도의 사내아이도 있다! 그러니 이동 중에도 탐지를 철저히 하라!”
“충!”
이어 땅을 울리는 폭발음이 들렸다.
동굴을 허물어뜨리는 소리 같았다.
어스는 바짝 긴장을 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때, 갑자기 불덩이 하나가 구멍 속으로 날아들었다.
펑!
4서클 마법, 플레임 버스트(Flame Burst : 화염 폭발)였다.

* * *

“여기야. 여기가 디란 시티라고. 하하하!”
보데가 간만에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긍정적인 보데였지만 한동안 힘든 여행으로 지쳐 웃음을 잃었는데, 목적지에 도착하자 마음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하긴 다친 어스를 위한다고 얼마 전까지 마차를 몬 사람이 보데였다. 더군다나 2개월이면 족할 길을 3개월이나 걸려 도착했으니 누구라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간만에 터진 보데의 수다는 한동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만큼 디란 시티는 보데가 상상했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엄청난 규모였던 것이다.
디란 왕국의 왕도인 디란 시티는 동서로 8킬로미터, 남북이 5킬로미터나 되는 인구 3백만의 거대 도시였다.
끝이 보이지 않도록 길게 이어진 20미터가 넘는 외벽에 30미터는 족히 될 만한 화강암 내벽까지. 영웅 크레시의 독립전쟁 때부터 110년이 넘도록 전쟁을 치러 온 왕국의 왕성이자 제일도시다운 위용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과연 아모라스 대륙 최대의 도시 중 하나다웠다.
디란 시티의 동문으로 들어간 어스 일행은 동문 시장 근처의 여관에 숙소를 잡기로 했다.
마차가 들어서기도 전에 여관 점원이 뛰어나오더니 고삐를 받아 들었다. 왕도의 여관답게 신속하고 깍듯한 예우였다.
“일단 여기를 숙소로 정하는 게 좋겠어. 보데, 베누스와 방을 잡아.”
“오케이. 가요, 베누스.”
마차에서 뛰어내린 보데는 어린 어스의 말에도 툴툴거리지 않고 신이 나서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겁이 많은 것을 빼면 무엇을 하든 잘하는 보데였다.
특히 수셈이 빨라 물건을 사고팔거나 흥정하는 일에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보데였다. 거기에 베누스가 곁에 있어만 주면 모든 것이 잘 풀렸다.
과연 보데는 5일간 큰 방 하나와 세 끼 식사, 욕실 사용료까지 모두 5실버 50쿠퍼에 계약했다.
큰 방 하나에 70쿠퍼고 한 끼 식사에 5쿠퍼니 하루만 머물러도 1실버 30쿠퍼인데, 욕실 사용료까지 해서 1실버 10쿠퍼에 계약했으니 탁월한 상재가 아니겠는가.
그런 까닭에 여행 중 어스는 가능한 보데를 의지했고, 보데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적성을 찾고 있었다.

“크아아아…….”
보데는 자신의 얼굴을 다 가리는 커다란 맥주잔을 두 손으로 들고 한참이나 들이켜더니, 길게 트림을 토해 내곤 입가의 거품을 손바닥으로 씻어 냈다.
그러자 흡족한 미소가 얼굴 가득 차올랐다.
예전에는 누리기 힘든 호강이기도 했다.
오후에 시장을 한 번 둘러보고 저녁 식사를 깨끗이 비웠다. 그런 뒤 간만의 따뜻한 목욕까지 마친 일행들은 나른한 피로감을 달래려 맥주 한 잔을 들고 방에 둘러앉았다.
“끄아아아…….”
보데를 따라 에리스도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트림을 했다.
맥주의 상당량은 입가로 흘러내렸지만, 어스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예전의 건강한 에리스를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모라인 생활을 하면 일찍 배우는 것이 술이다. 과거 에리스는 14살에도 불구하고 알아주는 주당이었다.
“어스, 우리 앞으로 뭘 하고 살지?”
“보데 생각은 어때?”
“나야 어스가 하자는 대로 하지 뭐.”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이 있잖아.”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사실 나는 지금도 이렇게 지내는 것이 겁나거든. 우리는 모라잖아.”
말 그대로 보데는 겁이 났다.
어스가 무슨 돈으로 여태 생활비를 대 왔는지는 고사하고, 여행 중에 사용된 경비만 해도 자신이 생각하기에 너무 큰돈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 여관을 잡은 것도 그랬다.
보데가 생각하기에 5실버는 정말 엄청난 금액이었다.
내색을 안 해서 그렇지, 예전에 집시 여자의 젖가슴을 좀 만지고 25쿠퍼나 준 일은 보데에게 가장 가슴 아픈 낭비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럼 베누스의 생각은 어때요?”
얼굴의 상처만 없다면 천사처럼 아름다울 것이 분명한 베누스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 동생처럼 어린 어스지만 말이나 행동은 누구보다 신중하고 사려가 깊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대답을 듣고자 함이 아니라 가족으로서의 예우였던 것이다.
“그럼 우리 장사를 한 번 해 보면 어때요?”
“장사? 물건들 사고파는 것 말이야?”
어스의 제안에 보데가 반색을 했다.
“응. 어차피 먹고살려면 뭔가는 해야지 않겠어?”
“하지만 우리가 뭔 돈이 있냐? 난 정말 여기서 쓰는 돈도 아깝다고 정말.”
결국 보데는 내심을 말하고 말았다.
5실버 50쿠퍼로 밀을 사면 몇 개월은 먹고산다. 하지만 단 5일 만에 날아가는 돈이 아니던가.
“작게 장사할 정도는 있어. 다만 에리스가 걱정이지.”
“정말? 어, 얼마나 있는데?”
반색을 하는 보데. 그런데 그때, 베누스가 어스의 손을 잡았다.
“왜요? 할 이야기가 있어요?”
“음…….”
베누스는 손과 입술을 사용하며 뭔가를 이야기했다. 어스는 신통하게도 그 뜻을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헤헤, 앞으로 살아가려면 뭐라도 해야지요.”
“우우…….”
“도와준다니 고마워요. 하지만 베누스는 사람들을 안 만나잖아요?”
“우우…….”
“베누스가 돌보겠다고요? 하지만 에리스는…….”
베누스는 에리스를 자신이 돌보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에리스는 아직 정신이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덩치가 베누스보다 더 큰 사내아이를 어찌 돌본단 말인가.
그럼에도 베누스는 계속 자신의 뜻을 전하려 했다.
“그렇다면 집을 얻어야 하는데, 그 정도 돈이 될지 모르겠어요. 나는 오늘 시장에서 본 물건들을 사서 왔던 길로 돌아가며 다시 팔면 꽤 이윤이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졌거든요.”
“오라, 다시 올라오면서 물건을 사서 여기서 다시 팔고!”
“그렇지. 보데 생각은 어때?”
“하하하, 역시 우리 어스가 최고야! 나도 그런 것이라면 할 수 있겠는데.”
“베누스의 마차도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그러려면 사실 에리스가 가장 걱정이에요. 계속해서 돌아다니면 에리스가 힘들 테니 말이에요.”
“우우…….”
“얼마가 있냐고요? 지금 현금으로는 250골드 정도 있어요. 사실 아저씨 돈이지만 지금은 쓰고 나중에 갚아 드리면 되겠지 싶어서요.”
“피터 아저씨?”
“응.”
피터 이야기가 나오자 아이들이 순간적으로 침울해 졌다.
피터는 굶주려 죽어가던 자신들을 구해 준 은인인 동시에 지키고 보호해 주며 가르쳤던 보호자요, 선생이며, 아버지와 같던 사람이었다.
베누스는 침울해진 아이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었다.
“아아…….”
“그 정도면 충분하겠다고요?”
어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잘은 몰라도 베누스가 저리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고삐는 보데가 잡았지만, 디란 시티까지 오는 데 그 길을 이끈 이는 베누스였다.
성대를 다쳐 소리를 못 내서 그렇지, 어스는 베누스가 여러 분야에 해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베누스는 19살이 되도록 전 아모라스를 돌아다닌 집시로, 상당히 큰 집시 무리의 일원이었다.
집시의 지혜로움은 아모라스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지혜는 조상부터 내려온 구전 지식이다. 많은 지식들이 그녀의 종족이 도적을 가장한 정규군에 약탈당할 때까지 그 부모로부터 전수된 것이다.
이후 전쟁상인에게 팔려 간 종족들은 서커스를 하고 몸을 파는 지경에 처했지만, 그래도 베누스는 자기 마차도 소유한, 잘나가는 무희였다.
그런 그녀였기에 각국의 왕도와 물건 시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집시들 역시 교역도 하고 매매를 통해 필요한 것을 충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일 당장 근처에 집을 알아보자고요. 하하, 그렇게만 되면 괜찮겠는데요?”
어스는 해맑게 웃으며 베누스를 바라보았다.
베누스는 이제 열한 살이 되어 가는 어스를 마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한 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신중함과 배려심이었다.
“하하하, 하여튼 난 이해가 안 돼.”
“뭐가 말이야?”
“대체 어스, 넌 베누스의 말을 어떻게 알아듣는데?”
“알아듣다니? 베누스가 이야기하니 알아듣지.”
“그게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이야. 난 베누스가 하는 이야기를 하나도 못 알아듣겠더라. 정말 신기한 일이야.”
그것은 베누스 본인이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자신이 말을 하는 것도 아니라 제스처와 괴성만 지르는데도 어스는 복잡한 의미까지 알아들었던 것이다.
어스는 보데를 멀건이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난 왜 보데가 베누스의 말을 듣지 못하는지 그것이 이해가 안 되는데?”

* * *

어스 일행은 날이 밝자마자 여관 주인의 주선으로 가게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안으로는 작은 정원도 딸린 집이었다.
전에 살던 집주인이 사고를 당해서 저렴하게 나왔다는 집은 150골드라는 매우 저렴한 가격에 얻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집이지만 동굴 시절보다는 훨씬 나았다.
항상 네 명이 같이 지내느라 여자인 베누스가 힘들었는데, 베누스에게도 자신만의 방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어스와 보데, 에리스는 남는 방이 있어도 같이 방을 썼다. 모라 시절부터 몸에 익은 그들의 습관이었다.
며칠간 집수리를 마친 뒤, 어스는 보데에게 작은 돈을 주고 시장을 구경하게 했다.
베누스는 집 곳곳을 쓸고 닦는 청소에 여념이 없었고, 어스는 에리스와 함께 쫓겨나 어딘가 갔다가 저녁 무렵에야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