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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1권 (13화)
Chapter 5 새로운 시작 (3)
그렇게 보름 즈음 흘렀을 때, 어스가 모두를 불러 모았다.
“보데, 넌 뭐가 가장 사고 싶은 거야?”
“글쎄, 난 뭐든지 다 사고 싶던데.”
“보데!”
“히히, 알았어. 사실 난 생활 도구를 좀 사고 싶어.”
뭔가 꿍꿍이가 있는지 보데는 쑥스럽게 웃었다.
“생활 도구?”
“사실은 보석같이 값나가는 것을 거래했으면 좋겠지만, 돈도 없고 아무래도 우리가 거래하기에는 힘이 들 것 같아. 하지만 생활 도구는 어차피 누구나 사용하는 것이니 파는 데 무리가 없을 거 같거든.”
“괜찮을 것 같은데? 하지만 시골에는 돈이 없으니 파는 것보다는 물물교환을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히히, 나도 생각했지. 오면서 지났던 양 치는 마을이 많이 있었잖아. 그 사람들에게 양모와 바꾸면 어떨까 싶어. 양모를 가져오면 베누스가 옷을 지을 수도 있잖아. 시장에 보니 옷을 만드는 곳도 여러 군데 있었어. 그곳에 넘겨도 되고 말이야.”
보데는 나름 돈의 흐름을 읽는 이재가 있었다.
하지만 베누스는 양모와 바꾸는 것에 허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양모가 거래된다면 대규모로 이루어지지 소규모 거래는 아닐 것이고, 그런 거래는 이미 상권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새롭게 파고드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베누스도 옷을 지을 줄 안다.
전에 베누스는 어스의 옷을 지어 입혔던 적도 있다.
하지만 옷은 며칠 만에 뚝딱 나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한 벌에 몇 달은 걸린다. 또한 많은 양모를 소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어린 어스나 보데가 상행을 나서기에는 거리부터 너무 멀다는 사실이 걸렸다.
그런 까닭에 보데의 계획은 처음부터 진행하기 힘든 문제가 있었다. 수셈에 밝다고는 하지만 보데는 16살 사내 아이였고, 그만큼 보는 시야가 좁은 것이다.
‘하지만…….’
베누스는 어스를 향했다.
마침 베누스를 바라보던 어스는 빙그레 웃었다.
아이가 웃는 모습이라기보다는 보호자가 짓는 미소 같았다.
하지만 베누스는 그 미소가 그저 어색하지만은 않았다. 실제로 지금까지 자신들의 보호자는 우습게도 어린 어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데, 옷을 몇 벌만 팔 것이 아니고 그걸 모두 양모로 바꿔 오면 어디다 싣지?”
“우리 마차에…… 아하, 그리고 보니 실어 오는 것도 문제네?”
나름 문제점을 깨달았는지 보데는 인상을 찌푸렸다.
“부피가 큰 양모보다는 좀 더 작은 것은 없을까?”
“그래, 그러면 되겠어! 꿀 같은 것을 바꾸면 아마도 디란 시티에서 잘 팔릴 거야. 시장에서도 꽤 비싸게 팔리더라고.”
“베누스는 어때요?”
“……!”
잊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묻는 어스였다.
그 마음이 고마워 베누스는 환한 미소로 답해 주었다.
확실히 어리지만 문제를 간파하고 해결하는 통찰력이 자신들 중에 가장 뛰어난 어스였다.
“그리고 생활 도구에다 옷 같은 생활용품도 사 가면 어떨까 싶어. 생활 도구는 한 번 사면 오래 사용하지만, 옷이나 모자 같은 것은 때가 되면 바꿔야 하잖아.”
“옷? 모자? 하지만 옷은 다들 만들어 입잖아.”
“응. 전에 보니까 베누스가 내 옷 만들 때, 세 달이 넘게 걸리더라고. 가족들의 옷을 만들려면 일 년 내내 옷을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가 물건과 교환하면 오히려 좋아할 거 같아.”
“좋아, 그러면 되겠어. 하하하!”
“우우…….”
하지만 아이들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하하. 염려 마요, 베누스. 우리는 큰길로만 갔다가 마론 영지에서 돌아올 거예요.”
마론 영지라면 한 달 정도 걸리는 곳으로, 디란 왕국에서 가장 넓은 신작로가 깔려 있고, 치안이 가장 좋은 길이었다. 좌우로 마을들도 많고, 무엇보다 낭트 왕국과의 전쟁 때문에 많은 전쟁물자가 왕래하다 보니 몬스터나 도적들은 찾아보기 힘든 지역이었다.
비로소 베누스는 지금까지 해 온 걱정을 덜어낼 수 있었다.
사실 그녀는 어스가 장사를 한다는 말을 했을 때부터 걱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에리스가 너무 조용하잖아?”
보데의 말마따나 다른 때라면 끼어들고 소란을 피웠을 에리스가 너무 조용했다.
새삼 바라본 에리스는 뭔지 모를 변화가 보이고 있었다.
어스는 여전한 미소로 빙그레 웃었다.
“신관님께서 축복해 주셨어.”
“시, 신관님이?”
“응. 며칠 전에 에리스를 데리고 신전을 찾아갔거든. 그때 대신관님 같은 분이 나오시더니 에리스에게 축복을 해 주셨어.”
“에이, 대신관님이 우리 같은 사람에게 무슨 축복을 해 주시나.”
“정말이야. 그렇지, 에리스?”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던 에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어색했다.
에리스의 표정에는 어색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에리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신전에서 축복을 받으려면 많은 헌금을…….”
“하하, 신관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축복해 주셨어. 그래서 나올 때 1실버나 헌금하고 나왔어.”
보데의 표정에는 덜컥 염려가 찾아들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어스의 말에 보데는 염려를 놓고 맘껏 웃었다.
골드도 아니고 1실버라면 축복받은 것치고는 저렴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누스는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조차 챙길 수 없을 정도로 온전치 못한 에리스.
겁 많고 말도 많지만 짜기는 왕소금 같은 보데.
그리고 나이는 20살이나 되고도 남 앞에 나서려면 너무 무섭기만 한 연약한 자신.
그런 세 사람을 챙기며 함께 살아가는 중심에 가장 어린 어스가 있었다.
보호받아야 할 아이가 오히려 보호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베누스는 어스의 말을 들으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베누스, 다음에는 같이 가요. 베누스의 예쁜 얼굴도 고치고, 목도 치료할 수 있을 거예요.”
“……!”
베누스는 그저 웃어 주었다.
예전에는 예쁜 얼굴이라 말을 들을 때면 죽기만큼 싫었지만, 얼굴을 다친 후에는 그것이 또 다른 상처가 되었다. 하지만 어스의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얼굴은 아니더라도 목은 고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우……!”
“하하, 걱정 마요. 앞으로 돈을 벌어 헌금하면 되지요. 하하하!”
신관의 축복을 받으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베누스의 말을 알아듣고 돈을 벌어 헌금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어스, 너는 어려서 세상을 너무 몰라.”
보데는 어스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보데가 보기에도 어스는 너무 세상물정을 너무 몰랐다.
분명 베누스가 느끼기에도 그랬다.
하지만 오히려 보데가 어설프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이 베누스의 상념이었다.
베누스는 그저 소리없이 웃을 뿐이었다.
Chapter 6 상행, 그리고 이상한 현상 (1)
“자, 와서 구경해 보세요! 돈 걱정 마시고 오세요!”
첫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상행에 조짐이 드러났다.
아모라스 대륙은 문화대륙 테헤란과는 달리 개척 당시부터 농노제가 없었고 이동의 자유도 허락되어 있었다. 문화대륙 테헤란에서 의도적으로 농노들이나 하위 계층에 자유권을 주며 아모라스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더구나 초기 아모라스 사람들은 몬스터들과 싸우며 토지를 개척하다 보니 조금이나마 살기 좋고 토지를 경작하기 좋은 지역을 찾아 이동 생활을 했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 이동을 했고, 그것은 전통이 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영지가 있다면 언제든 더 나은 영지를 찾아 떠나곤 하는 것이 아모라스 인의 기질이었다.
그만큼 아모라스 사람들은 개척 정신이 강하다는 의미였고, 다른 의미로는 뿌리 의식이 부족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실지로 아모라스에서 집시가 아닌 떠돌이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간혹 마을 단위로 이동하는 무리도 있을 정도였다.
예전에 악질적인 영주가 다스리는 영지는 아예 텅 비어 버리는 공동화 현상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어느 영지든 세금은 있다. 정착을 하면 누구든 세금을 낸다. 이는 주민세라기보다는 보호세의 관념이었고, 영주 역시도 영지 내의 주민들을 관리하기는 하지만 그리 큰 애착을 갖지 않는 것이 관습과도 같은 전통이었다.
그것은 임명제 영주라는 아모라스의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사실 이런 아모라스의 개척 정신과 이동의 자유는 오랜 기간 테헤란의 약탈에도 불구하고 아모라스가 견딜 수 있던 근본이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토지를 경작하며 안착하는 부류가 늘어났다. 이동할 수는 있어도 큰 파탄만 아니라면 터전을 두고 떠나는 사람이 점차 줄어든 것이다.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토착 주민들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였다.
어스가 상행의 타깃으로 잡은 것은 그런 마을이었다.
일차 목표는 영지 내에 가까운 성읍까지 며칠은 걸리는 마을들이었다.
하지만 상업이 그리 발달하지 못한 대부분의 영지에서 성읍에 나가도 필요한 물품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마을들은 예외없이 자급자족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어스의 새로운 상행이 인기를 끌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처음에는 구경삼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차에 가득한 물건들이 생활에 꼭 필요한 생활도구나 용품들이다 보니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최초의 관심은 모자에서부터 발생했다.
아모라스에서 모자는 누구나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특히 디란 왕국은 햇볕이 뜨겁고 일사량이 많기 때문에 항시 모자를 쓰고 산다.
하지만 모자는 천이나 가죽을 가공해야 하기 때문에 만드는 것이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갔다.
더욱이 멋지고 맵시 나는 모자를 갖는 것은 최고의 관심사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여러 형태의 모자가 보이자 관심을 가진 것이다.
거기다 모자와 토산품을 물물교환하자고 하니 관심을 넘어 순식간에 모자는 동이 나 버렸다.
이후로 옷이나 그릇 등의 생활용품들이 바닥났고, 프라이팬이나 물동이, 농기구 등이 팔려 나갔다.
더구나 아직은 어려 보이는 보데와 어린 어스가 물건을 판다고 하자 조금은 동정적으로 물건을 바꾸어 주는 현상도 없지 않았다.
“하하, 이 정도면 금세 부자 되겠는데?”
“보데가 워낙 장사를 잘하니 그렇지 뭐.”
확실히 보데는 장사를 잘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물건을 정확하게 짚어 내고 물건을 권하니, 대부분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헤헤, 어스도 그렇게 생각하니? 헤헤, 나 이것 정말 재밌다. 어스, 우리 정말 부자 되자. 그래서 아이들도 찾고 배부르게 먹고. 하하하!”
“응. 하하하!”
열한 살짜리 아이와 열여섯 살짜리 아이 둘이 이 험한 세상에서 마차를 몰며 장사를 한다는 것이 쉬이 믿어질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둘은 누구보다 더 훌륭하게 장사를 하고 있었다.
대규모 상단들이 외면하는 틈새시장을 노려 소비자를 찾아가는 상행은 지금 당시만 해도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방식이었다. 더군다나 물물교환을 바탕으로 생활용품과 도구들을 판매하니, 농민들뿐만 아니라 머무는 중간의 여관들도 어스와 보데의 마차를 즐겨 맞이했다.
더군다나 그 주인공이 어린애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물건값을 깎지도 않고, 하나라도 더 주려는 모습도 보였다.
아무리 각박해도 시골 인심은 살아 있는 것이다.
“에그, 놀라라! 어스, 저게 뭐지?”
보데가 고삐를 잡아채며 갑자기 마차를 멈추었다.
보데가 가리키는 곳에서는 꼬무락거리는 짐승 한 마리가 보였다.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검은 강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