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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1권 (16화)
Chapter 6 상행, 그리고 이상한 현상 (4)
“그런데 이, 이건……!”
한데 놀과 그렘린 무리가 서로 싸웠던 모양이다.
약간의 매캐한 냄새가 난다 싶었는데, 시커멓게 타 죽은 몬스터들도 몇 보였고, 아직도 타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어, 어스…….”
어스의 눈에는 아직도 파란 광망이 어려 있었다.
또다시 어스가 그 이상한 능력을 보인 모양이었다.
막상 어스를 찾았지만 보데는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왠지 두려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어스의 모습이 생경스러운 보데였다.
하지만 이내 보데는 어스를 품에 안고 말았다.
“보데…… 나, 나…… 왜 이러지……?”
어스의 타오르는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보데는 그저 어스를 가슴에 안아 주는 수밖에 없었다.
원래가 키가 컸던 보데는 요 근래 잘 먹다 보니 부쩍 컸고 비쩍 말랐던 몸에도 살이 제법 붙은 상태였다. 비록 나이는 다섯 살 차이지만 아이 때는 한두 살 차이도 큰 법이다.
작은 성인만 한 보데에게 어스는 가슴에도 닿지 않은 작은 아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보데는 어스의 얼굴이 맞닿은 부분이 불로 지지는 것 같은 뜨거움을 느껴야 했다.
그 열기가 고통스러울 정도였음에도 보데는 어스를 그대로 안고 있었다. 뜨겁다 못해 마치 살이 익는 것 같았지만, 지금 어스를 안아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마음 여린 보데가 어스에게 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어스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새벽에 비명을 들은 것 같아 나와 보니 숲이었고, 이후 여자가 죽고 그렘린과 뒹굴던 아이도 생각났다. 하지만 갓난아이가 그렘린의 날카로운 이빨에 물어 뜯기려던 이후로의 기억은 명확하지 않았다.
희미하게 연결되는 기억은 눈이 뜨거워지면서 가슴에 또다시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고, 이어 푸른 불길에 타 버린 몬스터들이었다.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문득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여관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소리였다.
디란 시티로 뻗은 대로가 마을을 관통한다. 대부분 대로를 따라 생겨난 마을의 특성이다.
그러다 보니 마을 주변에는 몬스터가 없었다. 떠돌이 놀이 마을 주변을 배회하기는 했지만, 그렘린은 거의 보기가 힘든 몬스터였다.
둘 모드 죽은 사체를 먹는 청소부 몬스터지만 놀은 마을 주변을 배회하고, 그렘린은 전쟁터 같은 곳에서 중형 몬스터들이 먹고 남은 사체들을 주로 처리하기에 맞부딪칠 일이 없는 몬스터인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흘러든 떠돌이 그렘린 무리가 마을 입구에서 노숙하던 가족을 습격한 모양이다. 아이를 출산한 여자의 피 냄새를 맡고 며칠을 쫓아온 것이 분명했다.
불침번을 서던 사람이 깜박 졸면서 불을 꺼뜨렸고, 기회를 잡은 그렘린 무리가 기습을 하면서 피 냄새가 퍼져 나가자 마을 주변을 배회하던 놀들이 모여들었을 것이라는 게 여관 주인의 추측이었다.
다행히 사내아이는 살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자와 갓난아이도 살아났다.
여자는 그렇더라도 갓난아이는 분명히 머리통이 그렘린의 흉물스런 이빨에 물어뜯기는 것을 본 것 같았는데, 다행히 죽지 않은 것이다.
Chapter 7 피터의 점포 (1)
어스와 보데는 사흘을 여관에 머물렀다.
어스는 깨어나자마자 여관 창고에 누워 있던 여자와 아이를 자신의 방에 들였고, 의사를 불러 치료비를 지불했다.
정신을 차린 여자와 아이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식에 식탐을 낼 정도로 집착했다.
다행히 여자는 산고와 오랜 여행, 그리고 많은 피를 흘려서 기절했던 것뿐이고, 갓난아이 역시 오랜만에 잘 먹은 엄마의 젖이 나오면서 별 탈 없이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있었다.
사내 아이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살점이 갈라졌지만 근육은 그리 많이 다치지 않은 모양인지 여관 주인이 내놓은 최하급 포션에도 팔을 치료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물론 어스가 포션값을 치렀다.
사흘 동안 어스는 고민에 빠져 있었지만, 그새 보데는 그들과 사귀고 있었다.
여자는 이오. 21살이었다.
사내아이는 유리. 이오의 동생으로 8살이며, 갓난아이는 코마라 했다.
이오는 문화대륙 테헤란에서 건너온 남부의 잘사는 집 출신이었는데, 영지에 분란이 일어나면서 집과 가족을 잃고 도망쳐 나왔다고 했다.
죽은 남자들은 며칠 전 출산으로 정신을 잃은 자신과 동생을 도와준 떠돌이들이었고, 일거리를 찾아 디란 시티로 가는 길이라 했다.
이오와 유리는 갈 곳도 없고 의탁할 곳도 없었다.
그에 어스는 자신들의 집으로 같이 가자고 권했다.
짠돌이 보데도 별다른 반대 없이 받아들이는 기색이었다. 정이 많은 보데는 이미 코마나 유리와 정이 듬뿍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회복된 이오가 움직이기를 원했기에 사흘째 되던 날 여관을 출발했다. 아마도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 것 같았다.
지금 마차 안쪽의 물건들 틈 사이에는 아직도 온전치 않은 이오와 유리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앉아 있었다.
그렘린의 이빨에는 독소가 있기 때문에 마치 학질에 걸린 것 같은 고열과 추위를 느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나타난 현상이었다.
어스는 또다시 나타난 현상을 두고 고민했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얻은 해답은 리멤버 다이스였다.
머리가 깨져 죽어가던 노인을 살린 사건에서 나타났다는 현상은 형태나 방법에 있어 차이는 나더라도 리멤버 다이스를 심장에 올려놓았을 때 나타난 현상과 비슷했다.
무엇보다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전에 심장에서 느껴진 통증도 과거 리멤버 다이스를 삼켰을 때 받은 통증과 유사했던 것이다.
그동안 어스는 리멤버 다이스를 잊고 지냈다.
그러고 보니 로카가 삼킨 동전은 다시 나왔는데, 자신은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엄밀한 의미에서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살펴보지도 못한 어스였다. 지하에 갇힌 한 달 동안 먹은 것도 없어 나온 것도 없었고, 이후로는 그렇게 망각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약간의 배고픔과 갈증 외에는 큰 고통도 없던 것이 생각난 것이다.
또 화장실이 온통 터져 나가 쥐들까지도 전멸을 당한 폭발에도 멀쩡했고, 베누스가 살아난 것도 이상했고, 산적들 사건이나 노인을 치료한 것, 결정적으로 몬스터 사건은 희미하게나마 자신이 뭔가를 했다는 기억이 남아 있었다.
문제는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두 명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절망을 느낀 것도, 분노를 느낀 것도 사실이지만, 의도하지 않은 살인이었다. 피터는 이이들에게 살인이나 죽음을 엄히 가르쳤다. 그것을 모라 노릇을 하던 아이들이 실지로 배웠다고는 믿기 힘들지만, 최소한 어스에게는 부담이 되고 있었다.
아니, 부담 정도가 아니라 역겨움을 느끼는 상태였다. 왠지 모르지만 어스는 살인이나 죽음에 대한 역겨움이 있었다.
지금도 희희낙락하는 보데로서는 이해 못할 부분이었다.
어쩌면 보데의 생각처럼 나타난 현상은 장점이 분명했다. 산적에게 끌려갈 뻔했고 전 재산을 다 빼앗길 뻔했으며, 노인들이나 여자와 아이도 죽을 뻔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살아났고, 그 이면에는 이 이상한 현상이 있었다.
지난 사흘, 어스는 과연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그 또래에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체계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에게 나타난 현상이 리멤버 다이스의 효능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고, 이를 풀기 위해서는 리멤버 다이스에 대해 알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다만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으니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피터는 리멤버 다이스에 대하여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결국은 어서 속히 피터를 만나는 것만이 해결책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터가 그리운 어스였다.
* * *
집으로 돌아오자 소동이 났다.
지금까지 세 차례 상행을 떠났던 어스는 월초에 떠나 어김없이 22일 전후면 도착했는데, 이번 상행은 27일이나 걸렸기 때문이다.
베누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어스를 끌어안았고, 에리스는 뭘 아는 것인지 보데를 두들기며 고함을 질러댔다.
한동안 소동이 지나간 후, 비로소 소개가 이루어졌다.
“여기는 이오, 애기는 코마예요. 얘는 이오의 동생 유리고, 여덟 살이래요.”
“우우…….”
“진심으로 반갑고 환영한대요.”
베누스는 따뜻한 마음을 미소에 담아 맞이했다.
어스가 베누스의 말을 대신 전달해 주었고, 베누스는 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오가 주인님을 뵈어요.”
“……!”
순간, 베누스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오가 그녀를 주인으로 대한 것이다.
사실 길을 오면서도 어스나 보데를 대하는 태도도 남달랐다. 하지만 몸이 온전치 못해서 그러는 줄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어려워서 그랬던 모양이다.
“아아……!”
“이러지 마세요. 베누스는 당신을 가족으로 맞이한대요.”
“……!”
이오와 베누스의 눈이 동시에 한껏 커졌다.
이오는 그저 당분간 먹고살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따라온 길이었다.
사실 그렘린의 습격에 죽은 사내들도 출산한 자신을 성노예처럼 부리려 했고, 유리는 디란 시티에 오면 팔아치우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랬기에 호시탐탐 도망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이오였다.
그저 시녀로라도 유리와 함께 살 수만 있으면 하던 바람이었는데 설마 가족이라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이오는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베누스도 이오의 눈치를 살피면서 어스를 돌아봤다. 베누스는 어스의 허락이 있으면 같이 살 수도 있다고 한 것인데, 어스는 베누스가 가족으로 맞이한다고 표현했던 것이다.
베누스로서는 자신에게 위신이라는 것을 세워 주는 어린 어스가 더욱 커 보이는 순간이었다.
어스는 빙그레 웃으며 이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그러니 어서 일어나세요. 베누스는 이런 것을 싫어해요.”
“하, 하지만 저희 같은 사람들을 어찌…….”
“하하, 우리는 원래 모라들이었는데요 뭘.”
“모, 모라……?”
“자, 어서 일어나세요.”
이오는 어중간한 자세로 일어났다.
비로소 이오는 이 가족의 구조가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어느 상가의 소공자로만 생각했던 어스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었다. 이오도 베누스의 눈에 어린 의미를 읽을 수 있던 것이다.
모두가 진심으로 세 사람을 환영했다.
특히 에리스는 코마를 정말 좋아했다.
이후로 이오와 유리, 그리고 갓난아이 코마는 어스의 집에서 함께 가족처럼 살았다.
한편, 어스는 이오에게 말 못할 비밀이 있음을 알았다. 이야기해 줘서가 아니라 그 태도에서 느껴졌던 것이다.
이오가 유리를 대하는 태도는 조심스러운 바가 있었다. 어떨 때는 자신의 아들인 코마보다 더 챙기는 이오였다.
또 예절이나 학문에 밝았다.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체계적인 학문을 배운 것처럼 이오는 박학다식하고 논리적인 말을 하곤 했다.
덕분에 어스와 보데는 이오에게 글이나 예절 등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