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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1권 (17화)
Chapter 7 피터의 점포 (2)
일거리가 있으면 시간은 분주하게 지나간다.
요즘 어스네 식구들은 한 달이 하루처럼 지나갔다. 월초에 상행을 떠난 마차가 22일 전후로 도착하면 사나흘 동안 판매가 이루어진다. 이때, 주문받은 것이나 필요한 물품들을 마련하면서 다음 상행을 준비하다 보면 어느새 한 달이 훌쩍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때, 가족들 간에 업무 분담은 확실했다.
베누스는 집안 전체를 돌보고 살림을 하며 아이들을 돌봤다.
이오는 점포에서 판매를 담당했고, 상행과 필요한 물품 구입은 보데와 어스가 함께했다.
유리는 때론 이오를 도왔고, 아니면 베누스와 함께 집에서 코마를 돌보거나 에리스와 놀았다.
사실 이때가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매일 밤 모여 앉은 가족들은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먹고살 양식이 있고, 작지만 점포와 일자리도 있으며,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 있으니, 그것이 행복이 아니겠는가.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이오였다.
점포의 물건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상행 준비를 마치면 어김없이 이오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공부를 시켰다. 쓰기, 읽기와 수셈, 매너와 같은 예절, 그리고 수사학이라 불리는 이상한 말재주 훈련이었다.
그중에 식탁에 앉을 때마다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식탁 예절은 어스와 유리가 가장 기겁을 하는 예절이었고, 수사학은 보데가 가장 야단맞는 과목이었다.
대부분 닷새 정도의 이 기간은 아이들이 풀이 죽는 기간이었고, 상행을 출발할 때마다 유리는 처연한 눈빛으로 어스와 보데를 바라보곤 했다.
어느 날, 어스는 점포를 피터의 점포라 부르게 하고, 마차 한 대에 불과하지만 피터 상단이라 이름을 지었다.
피터란 이름이 아주 흔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스는 혹시라도 피터가 자신들을 찾지 않을까 하는 억지스런 마음으로 피터 상단이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비록 억지스런 이름일지는 모르지만 어스나 보데는 그 이름이 좋았고, 다른 가족들도 기뻐해 주었다.
근래 새끼 놀 티라는 상당히 자라 베누스의 품을 벗어났다.
그런데 이 녀석의 말썽이라는 것이 상당히 고단수였다. 베누스의 영리한 애마인 에크와 보크가 놈의 장난기에 기겁을 할 정도였던 것이다.
아직은 놀의 고유 문양이 완연하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티라는 놀의 귀족이라는 갈색 놀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대부분의 놀은 오크만큼 영리하지는 않다. 하지만 자신들만의 고유 언어가 있었고, 집단 체제를 유지하는 몬스터였다. 특히 갈색 놀의 지능은 홉 고블린 이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놀의 종류에는 점박이 놀, 줄무늬 놀, 갈색 놀이 있는데, 그중에 덩치가 큰 점박이 놀은 전투 놀이고, 줄무늬 놀은 보통 먹이를 사냥하고 조직을 꾸리는 일꾼이었다.
그에 비해 갈색 놀은 지배 계층으로, 제사장이나 족장의 지위에 오르며, 간혹 깊은 숲 속의 무리에서는 주술사 놀도 발견된다고 한다.
다만 갈색 놀은 철저한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르기에 개체수가 적었다.
적당한 때에 세력 다툼을 벌여 패한 측은 철저히 제거되어 한 부족에 갈색 놀은 암놈 하나에 딸린 식구만 인정된다고 한다.
또한 갈색 놀은 일반 놀과 달리 몸집이 작지만 상대적으로 그 힘은 매우 강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실지로 아직은 50센티미터에 불과한 티라였지만, 다툴 때 보면 보데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갈색 놀이 성장하면 하얀 털에 검은 발톱, 뾰족한 귀, 발목의 갈색 줄무늬가 들어간 신체적인 특징이 나타난다더니, 처음에 검었던 티라의 털은 클수록 하얗게 변하고 있었고, 귀도 점차 뾰족해졌으며, 무엇보다 팔목과 발목에 희미하지만 누르스름한 줄무늬가 나타나고 있었다.
* * *
끼히힝! 푸릉! 푸릉!
“그만해, 인마! 에크가 싫다고 하잖아!”
보크에 이어 에크도 놈이 귀찮아 죽을 지경인가 보다. 연신 고개를 좌우로 젓고 콧바람을 불어도 에크의 머리에 달라붙은 놈은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보데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놈이었다.
오히려 보데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할 테면 해 보라는 의미였다.
“저 자식이 정말! 어휴, 그때 죽도록 내버려 둘 것을…….”
보데는 아예 놈을 외면하기로 작정을 했다.
조그만 놈이 힘도 힘이지만 보통 꾀보가 아닌 것이다.
놈은 어느새 두 살을 맞은 티라였다.
티라는 애교쟁이면서 동시에 심술쟁이였다.
가족들 누구에게든 귀엽고 앙증맞게 애교를 부렸다. 오죽하면 몬스터에게 당할 뻔했던 이오나 유리조차도 놈만 보면 예뻐서 입을 맞추고 잠시만 안 보여도 챙기겠는가.
하지만 유독 보데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보기만 하면 티격태격했고, 몬스터답게 에크와 보크는 아예 무시하는 기질이 있었다.
하지만 코마에게만 가면 마치 수호신처럼 변하는 티라였다.
이오가 점포에 나가 있으면서 베누스가 코마를 돌보자 티라가 질투할까 싶었는데, 오히려 티라는 코마의 보호자 역을 자처했다.
어떤 땐 잠든 코마 곁에서 밤을 새워 가며 모기를 쫓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 상행에는 코마를 떠나 티라가 따라나섰다.
요 근래 티라가 짜증이 늘었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보데에게 덤벼들고, 혹시라도 안면이 없는 손님들이 보이면 으르릉대며 화를 내곤 했다.
베누스는 그것을 아무래도 짝짓기 때와 비슷하다고 봤다.
이오의 말에 의하면 놀은 대개 25년 정도 사는데, 베누스의 말처럼 보통 두 살 정도가 되면 짝짓기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티라에게는 아직 2차 성징인 갈색 무늬도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보통 놀보다 한참은 작은 상태였기에 짝짓기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번 상행에 놈을 데려가기로 결정했고, 어스가 부르니 티라는 그대로 따라나섰다.
그런데 보데하고 싸우지 않으면 에크나 보크를 괴롭히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다.
이번 상행은 릴 산맥 쪽으로 난 대로였다.
디란 시티로 이어진 대로는 모두 네 개로, 베울 산맥 오른편을 지나는 대로와 리볼 강을 따르는 대로, 릴 산맥을 관통하는 대로와 디란 평야를 가로지르는 대로가 있었다.
어스는 보통 네 개의 대로를 순차적으로 상행에 나섰다.
한 곳으로만 계속 나갔더니 나중에는 판매량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4개월에 한 번씩 찾게 되면서 어느 곳이든 찾아갈 때마다 환영 일색이었고, 판매량도 적정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근래 피터 상단 같은 보따리 상인들이 생겨나고는 있었지만, 아직까지 어스의 마차처럼 물건이 많거나 구색을 갖춘 마차는 없었다.
어쨌든 선점의 효과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났다. 설령 다른 마차들이 들어와도 어스의 마차가 들어올 때가 되면 대부분 불편해도 참았다가 살 정도였다.
오늘도 보데는 한동안 여관 주인에게 자주 좀 찾으라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여 보데는 한바탕 여관 주인과 농을 치다 어스의 눈총을 받고서야 출발했다.
해가 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사실 디란 시티를 중심으로 뻗은 네 개의 대로 중에 릴 산맥으로 이어진 이 길이 가장 험난하고 위험했다. 길이 험한데다 산맥을 관통하다 보니 종종 대낮에도 몬스터의 위험에 노출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 길은 상인들이 거의 찾지 않았다.
과거, 릴 산맥 너머의 동쪽이 히아데스 왕국일 때, 이 길은 동부에서 서부로 넘어오는 가장 많은 상단들이 이동하던 상로였다고 한다.
하지만 20여 년 전, 데이모스 제국과의 전쟁에서 히아데스 왕국이 패해 제국령으로 귀속된 이후로부터는 상단들의 발길이 끊어져 지금은 떠돌이나 용병들이 겨우 찾는 길이 되고 말았다.
과거 상업이 융성할 때는 산맥을 관통하는 대로에 있던 마을들도 풍요를 누렸지만, 지금은 물자도 부족하고 경작지도 부족해 굶주리는 마을들이 많았다.
그것이 바로 어스가 이 길을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사실 이 길은 일 년 전에 처음 다녀갔다.
이후 어스는 한 번도 이 길을 빠진 적이 없었고, 이번 상행에는 세 대의 마차에 식량을 싣고 가는 길이었다.
거기에는 한 가지 사건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1년 전, 처음 이곳을 찾은 어스는 이곳에서만 나는 석청 한 병을 얻어 갔는데, 그것이 생각지 못한 금액으로 판매되었다.
알고 보니 그것이 릴 산맥의 꽃이라 불리는, 일명 클리프 허니(Cliff Honey)라는 최상품 석청이었다.
절벽꿀벌이라는 특이한 벌이 모은 이 석청은 매우 특별한 향취가 있었다. 그리고 오래된 소문에 따르면, 칠십대 노인 부부가 이 꿀을 먹고 잠자리를 가지자 아이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강장에 큰 도움이 되는 명약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구하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일설에는 하늘을 나는 그리핀이 가장 좋아하여 접근을 막기 위해 절벽꿀벌들은 절벽의 홈에 부채 모양의 집을 짓는다고 했다.
더구나 릴 산맥의 깊은 오지에서만 나오는 꿀이다 보니 몬스터의 위협을 뚫어야 했고, 절벽도 올라야 했으며, 독침의 위협도 이겨 내야 얻을 수 있이니 그 희소가치야 일러 무엇 하겠는가.
작은 병 하나가 동일한 은덩이만큼의 가격으로도 구하기 어려운, 한마디로 부르는 것이 가격인 상품이었다.
실지로 지난번 가져갔던 300그램 정도의 병은 왕족과 고위 귀족들이 가격을 묻지도 않고 가져가 버렸다. 그들이 놓고 간 금액은 석청 일곱 병에 자그마치 350골드였다. 그러니 겁이 많기로는 천하에 적수가 없는 보데도 선선히 따라나선 것이다.
하지만 어스가 이 길을 찾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언젠가 히아데스 왕국의 이튼 영지로 가기 위해 준비한다는 의미였고, 굶주린 산골 마을 사람들이 왠지 측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진심은 어디서든지 통한다.
결국 어스와 릴 산맥의 산사람들은 그렇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어세 오게, 보데. 어서 오너라, 어스야.”
“안녕하셨습니까, 족장님.”
자경대원들을 이끌고 내려온 페트라 족장이 반갑게 맞았다.
아랫마을에서 어스의 마차가 릴 산맥에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마중 나온 길이었다.
산맥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대낮에도 몬스터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하. 족장님, 우리 어스가 또 마차를 끌고 왔습니다.”
“허허, 또?”
이미 연락을 받았지만 설마 또다시 식량을 싣고 올 줄은 생각지도 못한 페트라였다.
“고맙네, 보데.”
“어, 내가 아니라 어스라니까요?”
“그래그래. 고맙구나, 어스.”
“아니에요. 보데가 다 한 일이예요.”
페트라 족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살 만큼 산 중늙은이인 페트라가 진심으로 감격한 것이다. 페트라의 눈에 비친 두 아이는 마차 하나로 릴 산맥을 헤매기에는 너무 어렸다.
아무리 장사치라지만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안전한 곳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텐데, 아이들은 겁도 없이 릴 산맥 깊숙이 들어왔고, 이처럼 항상 서로를 위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지난번에는 마차 가득 양식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이 얼마나 유용했는지 마을 아이들이 굶주리지 않고 이번 춘궁기를 넘길 수 있던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또다시 양식을 싣고 왔다 하니, 어찌 감격하지 않겠는가.
릴 산맥 안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에 미련이 없거나 사고를 치고 도망치거나 피해 온 사람들이다. 산속에 살다 보니 어느 정도 심성도 누그러지고 다듬어졌다지만, 거칠기로 따지자면 누구도 따를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런 그들을 좌지우지하는 족장 페트라가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