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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1권 (18화)
Chapter 7 피터의 점포 (3)


“아버지, 해거름이 머지않았는데…….”
“그래그래. 자, 자, 어서 가세.”
산중이라 해도 빨리 지고 몬스터들의 활동도 일찍 시작되니 서둘러야 했다.
말이 떨어지자 페트라 족장의 아들인 자경대장 데니가 마차의 고삐를 쥐고 선두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어 양식을 실은 마차가 따르고, 그 좌우로 자경대원들이 따라 달려갔다.
어스의 품에 안긴 티라는 이상하다는 듯이 달리는 사람들을 힐끔거리며 살피고 있었다.

“이, 이게 뭔가?”
페트라 족장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오면서 들리는 짐승 소리에 이상하다 여겼지만, 설마 이런 것일 줄이야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보데는 오늘은 그냥 쉬고 내일 보자는 데도 부득불 마차 한 대를 족장에게 풀어 놓았다.
그런데 그 속에서 나온 것이 가축이었다.
돼지 두 마리에 염소 두 마리, 거위 다섯 마리, 닭 열 마리, 그리고 마차의 반을 채운 밀이었다.
“헤헤, 여기 말 두 마리도 우리 어스가 주는 겁니다. 우리 어스가 암수 두 마리를 구하라 해서……. 그리고 이리들 오십시오.”
문득 보데는 어스의 눈빛을 느끼고는 말끝을 흐렸다.
하기 싫었지만 보데는 결국 자세를 갖추고는 최대한 정중한 태도로 족장을 다른 마차로 안내했다.
거북한 예복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지만 자세는 나왔다. 이오로부터 받은 교육의 성과였다.
그리고 어스의 마차에서 내린 것은 창과 검, 방패와 같은 방호구들이었다.
“만세!”
“하하하, 만세!”
한참이나 어리벙벙해 있던 자경대원들이 갑자기 만세를 불러댔다.
갑자기 터진 만세 소리에 족장의 집에서 식사를 준비하던 아낙네들과 마차를 구경하러 모여들었던 동네 주민들도 덩달아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고마우이, 정말 고마우이.”
“제게 고마워하실 것 없습니다. 우리 어스가 마을에 필요한 것이 무얼까 생각하라고 해서 준비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마을을 지키려면 무기가 필요할 것 같더군요. 하하하!”
어느 순간에 사람이 변한 것 같은 보데였다.
아무리 보아도 아직은 연소한 보데와 어스였다.
문득 페트라 족장은 이들의 주인이 누굴까 궁금했다.
“정말로 고맙네, 보데. 자네 주인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해 주게. 부탁이네.”
“예? 주인이라니요?”
“자네 상단의 주인 말일세.”
“어라? 이상한 말을 하시는군요. 상단 주인은 따로 없습니다.”
“뭐라고? 그러면 자네가 주인이라는 말인가?”
페트라 족장은 크게 놀랐다.
벌써 네 번째 만남이지만 설마 보데가 주인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간혹 경망스러운 모습도 보였지만 지금처럼 의젓한 것이, 능히 주인 노릇을 할만 했다.
“하하, 저더러 주인이라니요? 굳이 주인을 따지자면 우리 어스지요. 그러니 어스에게 직접 인사를 하십시오.”
“……!”
억지로 경어를 사용하려니 혓바닥이 경기를 일으켰지만, 보데는 애써 말을 맺었다.
그런데 마차를 둘러선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어스, 내가 뭘 잘못 말한 것 있냐?”
“휴우…….”
결코 눈치가 없는 보데가 아니다.
하지만 그로서도 전혀 양보를 안 하는 것이 있는데, 언제부턴가 보데는 항상 어스를 앞세웠다.
그것은 형이나 가족으로서의 태도를 넘어서는 모습이었다.
결국 어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정색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놀라실 것 없어요. 우리 피터 상단은 주인이 없습니다. 주인이신 피터 아저씨가 행방불명되셨기 때문에요.”
“하, 하지만…….”
“저는 그냥 어스예요. 족장님이나 다른 분들도 그렇게 여겨 주세요.”
어스는 조금 딱딱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족장님이나 마을분들에게 가져온 것은 절대 과한 것이 아니에요. 지난번에 주셨던 석청이 그만큼 비싸게 팔렸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어스, 우리도 석청 가격은 안…… 다네.”
그랬다. 석청 가격은 자신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도 석청을 팔러 가끔 산을 내려가기 때문이다.
물론 클리프 허니를 얻으려면 엄청난 공을 들여야 한다.
몬스터 천국인 릴 산맥에서 야숙이란 죽기를 각오한 모험이다. 페트라 마을 같은 경우도 하루 정도는 야숙을 하며 산을 타야 겨우 석청이 나오는 계곡에 도착하는 것이다.
게다가 몬스터들의 소굴인 밀림을 타야 했고, 그나마 계곡에 도달해도 여전히 그리핀의 위협과 깎아지른 듯 보이는 절벽, 그리고 성난 절벽꿀벌의 독침이 기다렸다.
그렇기에 석청 채집은 일 년에 한 번 정도 굶주림을 면하기 위한 방책으로 시행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귀한 것이 릴 산맥의 석청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석청 한 병에 1골드 정도면 잘 팔린 것이었다. 산맥 아래 마을에서는 불과 5실버에 불과했다.
들인 공에 비해 너무 형편없는 가격이지만, 그나마 그 금액도 아쉬운 처지였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석청 채집을 해 온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스가 그 공을 인정해 주고 있었다.
그만큼 어스가 가져온 물건은 석청 네 병으로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것들이었다.

반면에 어스의 입장은 페트라와 달랐다.
물론 산맥 아래 여관에서도 석청은 있었고, 가격도 저렴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벌꿀을 섞은 가짜 석청이거나 절벽꿀벌이 아닌 다른 벌의 석청이었다.
페트라 마을에서 클리프 허니의 맛을 직접 본 어스였기에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진짜 석청은 오직 페트라 마을과 아랫마을에서만 나왔다.
그 아래 마을들도 지난번에 석청을 내놨지만, 어스는 그것을 받기만 했지 팔지는 않았다. 그것은 클리프 허니가 아닌 일반 석청이었던 것이다.
어스는 페트라 마을과 아랫마을에서 나온 진짜 석청, 클리프 허니 일곱 병을 보데를 통해 은밀히 귀족가에 내놨고 350골드를 받았다.
매입자들은 석청을 병당 50골드 정도로 보았던 것이다.
왕도에서 작은 집 한 채 가격이 100에서 200골드라 했을 때, 50골드라면 실로 엄청난 가격이었다.
하지만 블링크 페이퍼 한 장도 100골드는 넘어야 구입할 수 있다. 그조차 구하기 힘들지만.
그렇게 볼 때, 쾌락을 위해 살아가는 일부 귀족들의 입맛에 그 금액은 결코 높은 것이 아니었다.
어스는 이번에 석청을 가져가면 가격이 더 오를 것이라 예상했다. 소문을 들은 더 많은 귀족들이 나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스는 페트라가 받을 수 있는 정도 내에서 수익을 나누려 했다.
“여기 10골드가 있습니다. 일단 받으세요.”
“이, 이게 뭔가? 10골드라니……?”
“일단 받으시고 보데의 말을 들어주세요.”
페트라 족장은 마치 홉 고블린에게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엉겁결에 주머니를 받아 들었지만 덜컥 겁부터 나는 페트라였다.
‘세상에! 10골드라니?’
페트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보데.”
“오케이. 족장님, 우리 피터 상단과 계약을 해 주십시오.”
“계약…… 이라니?”
이건 또 무슨 홉 고블린이 주술 외우는 소리인가?
어스 대신에 나선 보데는 첫마디에 계약을 요구했다. 석청을 오직 피터 상단과만 거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무리 오래 살아온 페트라로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가장 꿀이 많을 때 한 번만 채집해서 넘겨주면 매년 오늘 이상의 금액을 치르겠다는 약속이었다.
너무 파격적인 내용이라 페트라는 미처 대답할 수가 없었다.
“듣기로 석청은 이삼 일은 야영을 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석청을 얻으러 갈 때는 충분히 준비하고 채집을 해 주십시오.”
무기와 방호구를 준비한 것도 마을 방어와 더불어 석청 채집을 갈 때를 위한 준비용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10골드는 혹시 양식이 부족하면 마차를 끌고 아랫마을로 내려가서 구하라는 의미였다. 결국 페트라 족장은 모든 것이 자신들을 위한 배려라 생각했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받아들였다.
그날 밤, 어스는 족장에게 몇 가지 부탁을 더 했고, 족장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어스는 이틀을 더 마을에 머물면서 필요한 것들을 파악했다.
다음 날, 마을 한편에 가축들을 위한 축사가 지어졌다. 그리고 어스가 떠나는 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계란과 오리 알을 주워 들곤 감격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막상 어스는 떠날 수가 없었다. 말썽쟁이 티라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루를 더 페트라 마을에서 머문 어스는 결국 티라 없이 출발해야 했다.
염려가 되긴 했지만 몬스터의 본성을 생각할 때 어쩔 수 없다 판단하고는 족장과 마을 사람들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늦은 아침에 출발했다.

보데는 마을을 빠져나오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그리 싸웠는데 어찌 정이 없겠는가.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이야기할 것이 벌써부터 걱정인 보데였다.
그런데 낙담하며 산맥을 거의 빠져나올 무렵, 어스와 보데는 그야말로 황당한 광경을 목도했다.
수십 마리의 수컷 놀 무리를 거느린 티라의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자기보다 배는 더 큰 수컷들에게 무언가 한바탕 해댄 티라는 멋진 포즈로 뛰어올라 보크의 머리 위에 의젓하게 자리를 잡았다.
보크 역시 이제는 만성이 된 모양인지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고, 마차 뒤에서는 한참이나 놀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저 자식, 저거 뭐냐?”
보데의 어이없어하는, 그러면서도 심통난 목소리였다. 울 때는 언제고 다시 보게 되니 억울한 모양이다.
수컷 놀들의 울음소리가 멀어질 즈음, 티라는 어스의 품으로 뛰어들더니 뒷발로 슥― 보데를 밀었다.
만약 티라의 다리가 짧지 않았다면 보데는 엉겁결에 의자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이 자식아! 떨어지잖아!”
키이…….
티라는 모르는 척 어스의 품을 파고들었다.
“에이, 저 자식 없을 때 빨리 출발하자니까, 왜 하루를 늦춰 가지고. 어휴, 어쩌다 내가 놀 새끼하고 이럴까?”
키이키이…….
티라는 고개를 들곤 키득거리며 웃었고, 이후로도 한동안 둘의 다툼은 끊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티라의 손과 발목에는 선명한 줄무늬가 나타나 있었다.
갈색으로 보기에는 더 노랗게 보이는.

* * *

짧다면 짧은 7년이지만 상점은 번성을 거듭했다.
이젠 디란 시티의 동문 시장에서 피터 상단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피터 상단이 유명한 이유는 마차를 이용한 이동 장사라는 특이한 상술도 있지만, 점원 대부분이 십대이며 고아나 유랑민 출신이 많다는 점에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녀석들이 피터 상단에만 들어가면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몫을 감당하는 놈으로 성장하는 것이었다.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마차 가득 물건을 싣고 떠났다가 돌아올 때면 그 이상으로 많은 물건들을 싣고 왔는데, 그 물건들이 하나같이 각 지역의 특산물이며 그중에 상등품이 많아 인기가 높았다.
그때마다 피터의 상점에는 물건을 구매하려는 상인들과 각 가문의 집사들로 북적거렸다. 특히 최고의 인기 품목인 릴 산맥의 석청이 나올 무렵이면 고위 귀족 가문의 집사들이 한 병이라도 구하기 위해 피터 상단에 줄을 놓을 정도였다.
그런데다 피터 상단은 언제부턴가 저택으로 물건을 운반해 주는, 소위 ‘운반 서비스’를 시도하면서 각 귀족 가문에 상당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이제 귀족들의 저택이 있는 왕궁 근처에는 필요한 물품들을 정기적으로 납품하는 피터 상단의 마차를 보는 것이 어렵지 않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