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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1권 (20화)
Chapter 8 리볼 강 문제 (2)
“원, 아무래도 오늘 이 자리에 늦은 벌을 받는 모양입니다. 하하, 추후 벌주를 한잔 받겠습니다. 아, 닉스 님의 미모는 갈수록 더 빛나시는군요. 그간 더욱 아름다워 지셨습니다.”
“호호호. 늙은 여인에게 너무 과한 찬사십니다, 자작님. 하지만 이 늙은 여인이 듣기에는 선고장이신 호돈 자작님보다 더 달콤하고 부드럽게 다가오는군요.”
“하하하, 아무래도 오늘 보데니우스 이 사람이 큰일을 치려나 봅니다. 이토록 귀한 분들을 한자리에 모으다니 말입니다.”
“하하하, 자작님께서 말밑천이 다 떨어지신 모양입니다. 괜스레 이 사람에게 말을 돌리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 자, 일단 릴 산맥의 석청으로 만든 차 한 잔을 올립니다.”
보데는 능숙하게 말을 받았다.
스물두 살의 보데는 멋진 신사의 매너 그대로였다.
“오, 이게 그 귀한 릴 산맥의 석청이구려. 허허허. 내 오늘 꿀값을 얼마나 치러야 할지 두렵기만 하구려, 보데니우스 집사.”
“그러게 말입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저 사람이 찾아오면 가슴부터 떨립니다. 하하하.”
“어라, 호돈 자작님도 그렇다는 말씀이십니까? 허허허, 이 사람도 그렇답니다.”
“아니, 정말 왜들 이러십니까? 어린 사람을 너무 놀리지 마시고 차부터 드시지요. 돌아가실 때 작지만 성의로 꿀단지 하나를 준비해 뒀습니다. 하하하.”
“이런! 그 귀한 릴 산맥 석청을 한 단지나?”
“이거, 정말 그냥 자리에서 일어날까요? 무서워서 오금이 저리니 원.”
호돈 자작의 엄살에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릴 산맥의 석청은 고위 귀족들도 평생 몇 번이나 맛을 볼까 말까 한 상품으로, 특히 피터 상단의 클리프 허니는 진품으로 알려진 상품 중의 상품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그 정도를 못 구할 리는 없다.
자작의 엄살은 기대감을 반영한 접대성 멘트인 것이다.
* * *
“어, 어스, 그게 정말이니?”
“지금쯤 보데가 잘 처리하고 있을 겁니다, 플라스마 님.”
“보데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런 큰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까?”
“어차피 그들도 그것이 필요할 테니 무리가 없을 겁니다.”
“……!”
플라스마 신관은 묵묵히 어스를 바라보았다.
밤이 되어 직접 신전으로 찾아온 어스가 내놓은 제안은 상식을 깨는 내용이었다.
그중에 하나인 다리 놓는 방안만으로도 검토해 볼 타당성이 충분했기에 플라스마는 크게 만족했다. 이 정도면 중앙신전에 있는 친구들에게서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어진 어스의 제안은 기함을 금치 못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성취만 된다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은 제안이었다. 디란 대신전은 일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테고, 중앙신전마저도 반색을 할 만했다.
그러나 제안은 제안인 것이다.
일단 그 방안을 시도해 보려면 워낙 큰 금액이 필요한 터라 우선은 필요 자금을 마련할 방안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형세니 어찌 황당하지 않겠는가.
생각할수록 실현 가능성이 없는 제안인 것이다.
차라리 이전에 불가능하다 포기했던 다리를 놓는 일이라 해도 이리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디란 왕국이나 대신전뿐 아니라 중앙신전에서도 한때 다리를 놓는 일을 시도했고,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마탑의 도움까지 받아 시도한 일이니 큰 책망은 받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어스가 내놓은 리볼 강에 다리를 놓는 방법은 상식을 뒤덮은 파격으로, 필요 자금도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리만 놓는 일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방안이 어스에 의해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어스의 제안은 기함할 내용이었다. 다리뿐만 아니라 연결된 도로까지 하나로 묶어 처리할 방안을 마련해 온 것이다.
디란 시티로부터 중앙신전까지 일직선으로 통하는 대로의 건설.
내용만으로는 찬사를 받을 만했다.
하지만 이 방안은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이 아니었다. 자금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큰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도로가 놓이려면 귀족들과 수용할 땅 문제를 풀어야 하고, 다리와 연결된 제국과의 군사적인 문제도 처리해야 했다. 또 공사를 감당할 만한 노동력 문제까지 해결해야 그나마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로도 나타날 문제가 얼마인지 플라스마 신관으로서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일을 담당하는 주체를 세워야 하는데, 그 모든 문제를 풀어낼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디란의 국왕이라 해도 이 일에 대해서는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플라스마 신관은 염려가 들었다. 이미 문제는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리를 놓는 방법은 기발했다.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스는 보데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모아서 제안한 일을 진행시키고 있다 했다.
다리만 놓는 것으로 제안을 하면 되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어차피 그들도 황당한 제안에 돌아설 것이다.
하지만 어스나 보데가 받을 상처가 조심스러웠다.
일단은 어스에게 상황을 인식시킬 필요성을 느낀 플라스마는 우선 문제인 천문학적으로 들어가야 할 자금을 놓고 입을 열었다.
플라스마는 자신의 고민으로 어스가 다치는 것을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연히 플라스마의 말은 친근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어스, 그 천문학적인 금액을 무엇으로 감당하지?”
“오히려 그 이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상만으로 돈을 내놓을 사람은 없지 않겠니?”
“리볼 강에 다리가 놓인다면 일단 데이모스 제국으로의 직통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부류가 가장 큰 이익을 얻겠습니까?”
“글쎄, 이 문제가 중앙신전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신전이야 당연하겠고, 아마도 상인들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일단은 상인들이고, 다음으로는 그곳을 지나는 영지, 그리고 왕국과 주민들순이 될 것입니다. 그중에 상인은 가장 큰 이득을 얻게 됩니다.”
충분히 타당성이 있는 말이었다.
문득 플라스마는 어떤 방법이 보일 것도 같다는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상인들이 그 엄청난 자금을 쉽게 내놓을까?”
“저는 누구든지 먼저 내놓으려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줄 수는 없지요.”
“누구나 먼저 내놓겠다고 한다고?”
“가령 다리 이용료를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면 어떻겠습니까?”
“아!”
8년 전, 타타르 국경을 넘어 디란 왕국으로 들어올 때를 생각하는 플라스마였다. 그 폭리의 현장을 직접 경험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국경 통행료는 10쿠퍼 선이다. 하지만 디란 왕국으로 들어오거나 타타르 왕국으로 나가려면 1실버를 국경 통행료로 징수 당했다. 타타르는 자그마치 10배의 폭리를 취하고 있던 것이다.
만일 북부에 다리가 놓이고 국경 통행료 외에도 다리 이용료를 2실버나 받는다고 해도 누구나 이용할 것이 분명했다. 일단 시간과 경비 면에서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스마는 점차 어스의 생각에 젖어들었다.
“후후, 그럼 누구를 염두에 두고 있느냐?”
“하하, 호돈 자작이면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오호, 호돈이라? 펠리컨 상단은 욕심이 많아서 안 될 것이고, 몬테 상단은 전쟁 물자를 주로 취급하니 열외? 하지만 펠리컨 후작이나 몬테 백작이 서운타 안 할까?”
“그렇기에 저희가 드러나서는 안 되지요. 공식적으로는 신전에서 추진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허허, 그것은 쉽지 않겠는데?”
“설마하니 제가 귀족들에게 당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허허허허. 그래, 그럴 수야 없지. 하지만 굳이 호돈 자작을 선택한 이유는 뭐지? 그 정도 재력으로는 다리만 놓는 것도 모험이라 생각할 텐데?”
“후후, 그래서 닉스 부인이 필요한 것이지요.”
“닉스 부인도 끼웠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다리는 팬텀 영지에 놓겠구나. 허허허, 그것참. 기발하다, 기발해!”
“하하, 닉스 부인만 불렀겠어요? 마론 백작과 베어헌트 단장도 참여하고 있을걸요?”
“뭣이!”
순간, 플라스마 신관의 입이 벌어져서 닫히지 못했다.
비로소 플라스마는 어스의 계획이 완전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계획의 윤곽이 어스름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우와는 달리 어스는 이미 모든 문제를 내다보고 계획을 세워 추진하고 있던 것이다.
마론 백작.
현재 그는 디란 왕국의 제7군단장으로, 매우 신중한 성격의 다시없을 군인이다.
하지만 그는 낭트 왕국과의 전쟁에서 국왕의 작전을 거부하면서 징계를 받아 북부의 리볼 강가와 릴 산맥의 경계를 맡은 7군단으로 좌천되었다.
말이 군단장이지, 몬스터 몰이가 주 업무였다.
물론 당시 국왕이 세운 작전은 마론 백작의 예견대로 실패했다.
이후로 디란 왕국은 낭트 왕국을 변변히 이겨 본 적이 없다. 너무 큰 패배로 중부의 곡창지대와 요새들을 낭트 왕국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오직 유일한 승전이 8년 전, 디란 왕국의 제1군단장이며 총사령관인 카르와인 후작의 사남이 목숨을 걸고 추진한 작전이 성공하여 낭트 왕국의 남부 지역을 손에 넣은 것뿐이었다.
이후, 지금까지 국왕은 백작을 부르지 않고 버려두었다.
소위 찍힌 것이리라.
여하튼 마론 백작이라면 두 손을 걷어붙이고서라도 이 사업을 지원할 것이 틀림없었다. 만일 어스의 제안이 성공한다면 마론 백작은 정적인 카르와인 후작을 넘어서 왕도로 개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베어헌트 단장이 누군가.
아모라스 서부 삼국인 디란, 폴로, 타타르의 전설과도 같은 용병단장이 아니던가. 그의 휘하에는 전투 용병뿐만이 아니라 정보 길드와 노무 용병까지, 수많은 용병 길드들이 충성을 바치고 있는 실권자였다.
더욱이 그는 데이모스 제국의 서남부 사령관인 에드워드 공작과는 혈맹을 맺은 의형제였다. 만일 그가 이 사업에 동참만 한다면 일의 반은 성사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더구나 닉스 부인이라면 팬텀 후작의 정부라 알려져 있는 디란 시티 지하 금융의 큰 손이 아니던가.
그녀는 호돈 자작의 부족한 자금력을 충분히 커버해 주고도 남았다.
실로 개별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모아 놓고 나니 완벽한 구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허허허허, 우리 어스가 내 8년 고민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구나. 허허허허, 그렇다면 남은 것은 네가 제안한 방법이 얼마나 효용이 있을 것인가 시험해 보는 것인가?”
“아닙니다. 그거야 분명히 효용이 있을 겁니다. 플라스마님은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더란 말이냐?”
플라스마는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스의 미소를 보자 왠지 불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너, 서, 설마……?”
Chapter 9 사람들 (1)
콰르르릉!
용틀임 소리와 함께 거센 물살이 사방에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었다.
리볼 강이 왜 하데스의 강이라 불리는지를 대변해 주는 장면이었다.
아모라스 대륙은 중앙에 릴 산맥과 베울 산맥이 있어 중앙이 높고 동서가 낮은 지형을 이룬다.
특히 두 산맥과 바로 붙어 있는 디란 왕국은 동고서저의 전형적인 지형이고, 그중 북부 지역은 북고남저의 지형과 맞물려 경사도가 상당히 가팔랐다.
당연히 이 지역의 리볼 강은 가파른 지형에 오랜 시간을 흐른 강물이 암반 바닥을 깎아서 사방에 계단식 절벽을 이루었고, 바윗덩이가 쌓인 무더기들이 거센 물보라를 일으키며 근근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스는 처음 보는 장엄한 광경에 한동안 넋을 잃었다. 10미터 아래 강물에서 나는 용틀임 소리와 소용돌이치며 내려가는 황톳빛 흙탕물을 보니 절로 경탄이 터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