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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1권 (22화)
Chapter 9 사람들 (3)


“피, 피터…… 상단의 어스라고 합니다.”
“어스? 피터 상단이라면 디란 시티의 동문 시장에서 마차로 장사한다던 그 상단을 말하느냐?”
다행히 마론 백작은 피터 상단을 알고 있었다. 국경 외곽을 정기적으로 도는 피터 상단에 대한 소문은 의외로 이런 변경에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더구나 피터 상단은 디란 시티의 귀족 가문들에 전문적으로 물자를 공급하면서 규모에 비해 상당히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어스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반색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 피터 상단의 가족입니다.”
“가족? 참 좋은 말이지. 그래,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 것이냐?”
“……!”
마론 백작은 기사들과 함께 강변을 시찰하던 중에 연을 발견하고는 쫓아온 모양이었다. 어스는 심장이 두방망이질하며 요동쳤지만, 이대로 끌려갔다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죽을 것 같아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마음을 다잡자 오히려 상대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생긴 것보다는 더 온화한 말투였다. 다만 주변의 기사들이 손가락 하나라도 잘못 움직이면 베어 버릴 것 같은 흉흉한 눈빛으로 쏘아보는 것이 문제였다.
어스는 기사들의 위협 속에서도 차근차근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줄다리를 놓으려는 실험을 위해 연을 날렸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각하.”
“각하라……. 후후, 교각을 세울 수 없으니 줄로 고가교를 만든다는 너의 발상은 아주 신선하구나. 하지만 1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어떻게 줄로 연결시킨다는 말이냐?”
백작은 어스의 이야기에 관심을 주었다.
“처음에는 마법의 힘을 빌리려 했습니다.”
“마법? 아무리 마법으로 줄을 움직여도 1킬로미터는 불가능한 것일 텐데……. 그렇지 않나, 롱 대위?”
“그렇습니다. 레바테이트(Levitate) 마법은 두말할 것도 없고, 플로팅(Floating) 마법을 사용해도 불과 50미터가 한계입니다.”
“마법사가 직접 움직일 수도 있지 않나?”
“플라이(Fly) 마법이 비록 플로팅 마법보다는 낮은 3서클의 마법이지만, 실지로 공중에서 자신의 마음대로 이동하려면 5클래스 마스터는 되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1킬로미터가 넘는 강을 건너려면 그래도 6클래스 이상은 되어야 가능하고, 차라리 마도사 급에선 텔레포트를 사용하려 할 겁니다.”
“그래? 플라이 마법으로 방향까지 맘대로 조종하려면 마나의 소모가 극심하겠지. 그럼 불가능이라고 봐야 하나?”
“굳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이스파한 님도 계시지 않으니…….”
“각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두 사람이 말 위에서 나누던 대화에 어스가 끼어들었다.
군인들에게, 특히 기사들에게 있어 분명히 결례였지만, 두 사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어스에게로 향했다.
“마법사가 없이도 줄을 연결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연을 날렸던 것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먼저 연에 가느다란 줄을 연결시켜 날리고, 차츰 굵은 줄을 연결시켜 보내면 나중에는 굵은 동아줄로 튼튼하게 이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마론 백작의 눈에 색다른 의미가 담기고 있었다. 줄로 다리를 만드는 발상도 그랬지만, 줄을 연결시키는 방법까지 문제를 풀어 가는 발상이 아주 신선했던 것이다.
갑자기 백작은 말에서 뛰어내렸다.
“롱 대위, 오늘은 여기서 묵을 테니 준비하게.”
“충!”
부관답게 롱 대위는 아무런 이견도 내색하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명히 어스를 대하는 말투부터 달라진 백작이었다.
“자네는 나와 좀 더 이야기를 해야겠어. 음, 자네도 이리 앉게.”
“감사합니다, 각하.”
“후후, 상단의 점원들이 모두 자네와 같은가?”
“……?”
“아니야, 아냐. 그래, 연을 통해 줄을 연결시키겠다는 자네의 의도는 괜찮은 것 같아. 아니, 매우 좋은 발상이야. 하지만 저 먼 거리를 나무 판자까지 올린 줄로 연결한다면 그 무게만도 엄청날 텐데, 잘 버틸 수 있을까?”
“밧줄이야 인장력이 강한 것으로 쓰면 됩니다.”
“아니, 밧줄보다 양쪽에 밧줄을 매달 기초 말일세.”
“아무리 보강해도 나무 말뚝으로 세우는 기초 정도로는 버틸 수가 없겠지요. 하지만 리볼 강 주변은 단단한 암반입니다. 쇠말뚝으로 데릭 가이드처럼 박고 그 위로 밧줄을 당겨 바닥에 고정시킨다면 충분히 견딜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 바닥이 인장강력을 받도록 만든다는 말이지? 하지만 줄로 만든 다리로는 아무리 강하게 당겨도 강 중앙에서는 출렁거리고 흔들릴 텐데, 지나갈 수 있을까? 더군다나 인장력이 강한 밧줄을 쓴다면 더더욱 흔들리지 않을까?”
“……!”
어스로서도 그것은 미처 생각 못했다.
밧줄은 아무리 당겨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더구나 1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라면 조그만 바람에도 출렁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람들을 투석기처럼 날려 버릴 수도 있었다.
“허허허, 뭘 그리 고민하나? 하나가 흔들리면 두 개로 분산시키면 되지. 두 개나 세 개면 그만큼 적게 움직일 거 아닌가?”
“……!”
“이왕 다리를 만들려 했으면 더 크게 만든다고 뭐가 문제겠는가. 아무리 크게 만들어도 도개교만큼 자금이 필요할까?”
과연 그랬다.
어스는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백작 각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허허허, 이제 어떡할지 방법이 나왔나?”
“예, 나왔습니다! 몇 개가 되었든 좌우로 겹쳐 다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통행할 수 있는 다리는 가운데로 정하고, 좌우의 다리는 중심을 잡아 주는 형태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오, 그렇지! 아예 좌우의 다리로 무게중심을 잡자는 말이군. 그것도 괜찮겠어! 이봐, 롱 대위. 줄을 좀 구해오게 하고, 이 앞에 강의 모형 좀 만들라고 해!”
“충!”
“……!”
황당한 일이지만 밤이 늦도록 어스와 마론 백작, 그리고 기사들은 마법 등까지 밝혀 놓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 겨우 하룻밤이었지만 정말 놀라운 실험들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밤에 어스는 새로운 계획을 구상할 수 있었다. 최소한 왕국 전체가 뒤흔들릴 계획이기도 했다.
그렇게 원하던 결과를 충분히 얻으며 플라스마에게 전해 줄 선물이 완성되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어스와 백작은 함께 이른 식사를 나누었다. 어스가 일찍 떠나야 함을 아는 백작의 배려였다.
그 자리에서 어스는 백작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백작은 크게 놀랐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다. 대신에 백작은 기꺼이 어스를 돕기로 했다.
그리고 먼동이 밝아올 무렵, 백작은 롱 대위와 다섯 명의 수행자만 데리고 어스와 함께 디란 시티로 향했다.
“그러니까, 자네가 플라스마 님이 말했던 병든 형을 데리고 대신전에서 시위했다던 바로 그 어스란 말이지? 허허허허!”
평범한 배지 모양의 실을 건네며 마론 백작은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 * *

“정말…… 대단하군! 과연 하데스의 강이야!”
모두의 입에서 한결같은 경탄이 터져 나왔다.
흥에 겨운 호돈 자작이 약간은 과장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럼 우리는 하데스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군요.”
“허허, 그렇군. 아마도 자네는 국왕께도 불려갈 게야.”
“어이쿠, 달갑지 않습니다. 보데리우스 집사가 만든 판에 백작님 같은 분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감격입니다. 어찌 감히 그런……. 차라리 베어헌트 단장님이 적격이 아니시겠는지요.”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호돈 자작님. 이 사람이야말로 식솔들에게 일자리를 준 것만으로도 감읍할 따름입니다. 본인은 빼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다들이 빠지시면 이 사람더러 어찌하라고…….”
“그것이 보데리우스 집사뿐만 아니라 대신전의 당부이기도 한 걸 어쩌겠는가? 그 바탕에 호돈 자작을 세우기 위함인데, 그리 물러서면 어찌하누…….”
“그것참…….”
호돈 자작은 머리를 긁적였다.
보데리우스와의 회동에서 이번 사업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자작은 확실한 돈 냄새를 맡았다.
누구든 실행하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는 사업이었다. 이미 모든 것이 갖추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투자자도 반색을 한 상태고 일꾼 문제뿐만 아니라 군사 문제까지 거반 해결이 된 상태이니, 오히려 그 자리에서 떨려 날 것을 염려해야 될 상황이었던 것이다.
펠리컨 상단이나 몬테 상단과 같은 거대 상단을 제치고 파트너로 선정된 상황이었다.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단숨에 왕국 유수의 상단들 위에 설 수 있는 기회였다. 더군다나 그 일의 대표권을 자신과 같은 중소 상단에 맡긴다니…… 황홀할 지경이었고,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더욱이 대신전까지 전폭적인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찝찝한 것이 있었다.
보데리우스 집사가 중간에서 빠진 것이다. 실지로는 이 모든 사업을 구상하고 결성시킨 장본인이면서 모든 공을 자신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비록 40대 후반이지만 아직도 자신은 젊다고 생각했고, 이런 행운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상단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호돈 자작이었다.
문제는 너무 큰 행운에 있었다.
차라리 누군가 앞장서고 자신은 작더라도 이 사업에 참여 지분만 얻는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굴러가는 바퀴였다.
이왕 갈 거라면 기분 좋게 가야 하는 것이다.
“약속은 약속이니 지켜져야겠지요. 다만 백작님이나 단장님 같은 분이 계신데 공을 혼자 독차지하는 것 같아 쑥스럽습니다.”
“허허허. 호돈 자작, 우리도 이 일로 받는 보상이 실로 엄청나네. 그러니 너무 괘념치 마시게.”
“그렇습니다, 자작님. 사실 마론 백작님께서 지분을 포기하신 것처럼 본인도 포기하고 싶지만, 딸린 식솔들이 너무 많아 포기 못하는 것이 민망할 따름입니다.”
“호호, 그러시면 안 되지요. 사실 백작님이야 이권에 개입하셨다는 뒷말을 듣기 싫어 그러셨다지만, 단장님까지 그러시면 이 늙은 여인네가 너무 욕심이 많다고 욕을 하시는 겁니다.”
“아니, 그것이 무슨 소리요? 부인께서는 이 사업의 천문학적인 자금을 대셨지 않소?”
“호호. 백작님, 여인네가 너무 수완이 밝다고 책하시지나 마십시오. 그러시면 이 늙은 여인네가 가만있지 않을 겝니다. 호호호.”
“어이쿠! 이보시오, 베어헌트 단장. 나 좀 말려 주시오. 내 잘못하다가는 국왕 전하께 쫓겨나서 겨우 잡은 일거리에서도 쫓겨나겠소.”
“아이쿠! 백작님, 저야말로 살려 주십시오. 천하에 그 아름다움이 둘째라면 서러울 닉스 부인께서 스스로 늙은 여자라 자신을 비하하며 백작님을 쫓아내시는데, 저까지 말려들까 두렵습니다.”
“허허허. 이거, 우리 두 사람이 이리 모자랄 줄이야…….”
“허허허, 닉스 부인 앞에서 못난 거야 어쩌겠습니까?”
10년 이내의 차이만큼이나 동일한 시대를 살아온 세월이었다.
젊은 시절 닉스 부인은 디란 왕국뿐만 아니라 서부 3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이디로 이름을 날렸다. 두 사람은 그 시절을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늙은 여자라 칭하는 닉스 부인을 세워 주고 있는 것이다.
“아이, 두 분은 참……!”
살짝 흘기는 닉스 부인의 눈매는 아직도 바라보는 남자들의 심장을 녹일 만큼 고혹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베어헌트 단장이 정색을 했다.
“그런데 닉스 부인.”
“말씀하세요, 단장님.”
“보데리우스 집사가 말한 어스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