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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1권 (23화)
Chapter 9 사람들 (4)


순간,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로 변했다.
보데리우스는 몇 가지 제안을 하면서 입안자가 자신이 아닌 어스라는 것을 암시했다.
그러나 베어헌트 단장이 아는 정보에 의하면 어스라는 인물은 보데리우스가 일하는 피터 상단의 일원으로, 아직은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그런 소년이 어떻게 이런 큰 사업을 입안했으며, 자신을 어찌 알고 이 일에 추천했다는 것인지 궁금한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 피터의 점포를 자주 찾는 닉스 부인 역시도 어스에 대해서는 대답할 말이 궁색했다.
닉스 부인도 몇 번 마주친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드릴 말씀이 없군요. 혹시 동명이인이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보데리우스 집사가 그리 가까운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면 그 소년이 틀림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호돈 자작님이시라면…….”
“아…… 송구하지만 저 역시 잘 모릅니다. 다만 피터의 점포에서 어스란 친구가 꽤 영향력이 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이제 겨우 열일곱에 불과한데……?”
“세 분에 비해 이 사람의 경륜이 짧은지는 모르겠지만, 피터의 점포는 간혹 그 소년 위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분이 문제가 아니라 그 소년의 능력이오. 이런 계획을 누가 세울 수 있겠소.”
“음…… 이거, 하는 수 없이 이 사람이 나서야겠군.”
“백작님?”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백작은 회합이 있기 전날 있던 어스와의 만남을 밝혔다.
그리고 그날 밤에 제7군단 중부 진영에서 그들은 보데와 함께한 어스를 만날 수 있었다.
많은 이야기가 있었고, 다음 날 웃으며 서로 헤어졌다. 그들은 이제 한 배를 탄 동료로서 서로를 믿기로 했다.
아직은 완전치는 않지만, 이득과는 별개로 그들에게는 새로운 꿈이 싹트고 있던 것이다.

* * *

길만 내놓겠는가.
영지의 반이라도 내줄 수 있었다.
다리만 놓을 수 있다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단언하지만 망상이다.
릴 산맥에서 흘러내린 엄청난 수량은 일반적인 강의 상류로서는 상상도 못할 강폭과 급류를 만들어 놓았다. 가장 큰 문제는 다리를 지탱할 축인 교각을 놓을 방도가 전무하다는 사실에 있다.
물론 교각만 놓고 보면 동북부에서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릴 산맥과 붙은 동북부 지역은 거대한 늪지 지형이라 접근성이 용이하지 않았고, 더구나 몬스터들이 문제였다.
쉽지는 않지만 늪지를 통과해 제국으로 넘어가는 안내꾼들도 있었다. 몬스터만 아니라면 굳이 다리를 놓지 않아도 되는 지역인 것이다.
사실 다리는 그가 어려서부터 수없이 꿈꿨던 이상이었다.
영지는 왕국에서 제일 컸지만, 절반 이상이 쓸모없는 땅이었다. 남부의 일부 외에는 북부는 아예 암반 지대고 동부로는 하등의 쓸모가 없는 광활한 늪지.
그 땅을 살리는 길은 오직 하나, 다리였다.
다리만 놓을 수 있다면 데이모스 제국과의 직통로가 열리는 것이고, 이는 곧 영지가 왕국과 제국 간의 교역 중심지가 된다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젊은 시절에 불가능하다는 주변의 여론도 무시하며 강행했던 적도 있었고, 수많은 전문가를 끌어들이기도 했으며, 그것이 답답해 스스로 제국까지 건너가 공부도 했다.
하지만 결론은 불가능이었다.
리볼 강 상류는 원천적으로 다리를 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 미치광이들이 오랜 역린을 건드렸다.
눈앞의 미치광이들을 당장에라도 쫓아내고 싶었다. 닉스 부인만 아니라면, 함께 온 자들이 마론 백작 일행이 아니었다면, 베어헌트 단장이란 자만 없었으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이기에 차마 내치지는 못했다고 자위했다.
그리고 이처럼 멀쩡하게 생긴 미친놈의 설명을 듣고 있는 것이다.

“다리로 얻게 될 기본적인 이득은 이렇습니다.”
‘글쎄, 그것은 네놈보다 내가 더 잘 알고…….’
“하지만 이 부분과 이 부분만 개선해도 기하급수로 수익은 늘어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 발생할 수익 창출은 무한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계산은 너보다 내가 훨씬 더 많이…….’
“결국 길은 이렇게 연결되면 가장 적당할 것 같습니다.”
‘연구는 제법 한 것 같지만, 거기선 언덕을 밀어야…….’
“역시 마차의 통행이 잦을 것으로 예상되고, 장차 왕국과 제국의 주된 교역로가 될 것이기에 최소한 폭은 28미터를 잡아 봤습니다.”
‘좀스런 놈! 생긴 것과 달리 28미터가 뭔가, 28미터가!’
공작은 갑자기 찻물을 뿜어냈다.
비스듬히 기댄 자세로 내심 욕설을 퍼붓는 와중에 나오는 하품을 가리려 찻물을 들이켜다가 너무 놀라 가릴 틈도 없어 뿜어내 버린 것이다.
깜짝 놀라 일어서다 보니 협탁까지 넘어뜨렸다. 하지만 공작의 관심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2, 28미터? 2.8미터가 아니라 28미터라고 하셨나?”
“그렇습니다, 전하. 최소 28미터고, 각하의 양해만 있다면 36미터 정도를 잡으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허, 36미터? 미쳤군!”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 아닐세. 흠흠, 계속…… 하게. 말이 잘못 나왔네.”
공작은 서둘러 협탁과 바닥을 닦는 하녀들 사이로 얼굴을 가리며 다시 앉느라 미처 네 사람이 웃고 있음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지점에는 새로운 교역장을 건설하려 합니다. 물론, 공작 전하의 성에도 교역을 위한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빌어먹을, 누구에게 사기를…….’
하는 짓이 너무나 가소롭게 생각되었다.
다리만 놓는다 해도 불가능할 일을 얼굴만 번지르르한 호돈 자작이라는 자는 잘도 지껄이고 있었다.
내심 한 번 해 볼 테면 해 봐라 하는 심정도 들었다.
“해서 이 지역에서 이 정도는 저희에게 불하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이 부분도 전하께서 원하시면 저희들과 함께 합작을 하셔도 됩니다.”
“합작이라고?”
“그렇습니다. 합작입니다. 각하께서 이 부분에 합작해 주시면 전체 지분에서 3퍼센트를 보장하겠습니다.”
“아하하하, 난 됐네. 필요하면 가져가게.”
차라리 그런 땅은 줘 버리는 것이 낫다.
쓸모도 없는 땅 때문에 괜한 일에 연관되어 골머리를 썩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유감입니다, 전하. 그러면 어느 정도 가격을 쳐 드릴지?”
“사실 그 땅이야 우리에게 별 쓸모도 없는 땅일세. 암반 지대고 강가라 소출도 없지. 꼭 써야 할 일이 있다면 공짜로 써도 상관이 없네. 그러니…….”
“아닙니다, 전하. 그러시다면 지분이라도 드리겠습니다.”
“어허! 내 그리 못한다고 하는데도 그러시는가?”
은근히 화가 나는 팬텀 공작이었다.
가져가라 해도 싫다 하고, 적당히 계산을 치르라 해도 싫다니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고 저들의 놀음에 놀아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전하, 금액을 말씀해 주세요.”
“오, 베아트리체!”
공작은 닉스 부인을 보자 부아가 치밀었다.
“미안하오, 베아트리체. 그대의 체면을 봐서라도 그 정도야 그냥 주어야 하겠지만, 내 이 친구들에게는 좀 받아야 하겠소. 호돈 자작이라고 했는가?”
“그렇습니다, 전하.”
“만 골드를 주고 원하는 대로 구획해서 쓰게.”
“감사합니다, 전하. 그러면 1평방킬로미터(약 30만 평)를 사용하겠습니다.”
“뭐? 1평방킬로미터? 10평방킬로미터(약 303만 평)를 쓰게. 아니, 내 20평방킬로미터(약 605만 평)를 줄 테니 마음껏 사용하시게. 그리고 그 안에 주민들이 있다면 그대로 넘길 테니, 세금이든 뭐든 자네들 마음대로 하게!”
팬텀 공작은 호기롭게 외쳤다.
일만 골드를 부른 것은 실지로 받고자 함이 아니라 하도 가당치 않은 말들을 늘어놓기에 놀리려고 던진 말이었다. 대놓고 쫓아내지를 못하니 조롱임을 알면 돌아가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 쓸모없는 땅을 일만 골드로 사 간다니.
일만 골드면 성 하나를 매입할 수 있는 거금이다.
10평방미터가 아니라 북동부 지역까지 넘겨주고 싶었다. 쓸모도 없는 암반 땅으로 일만 골드라는 거금을 받게 되었는데, 못 줄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공작은 소리 내어 웃었고, 나머지는 속으로 웃었다.
한편, 닉스 부인은 공작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로 작정했다. 공작이 아들들이라도 배석시켰다면 장차 노른자 중에 노른자가 될 땅을 이토록 쉽게, 그것도 똥값에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부터 왕국 전체가 공작과 자신의 로맨스를 알고 있다. 하지만 공작의 아들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오늘도 자신과의 만남을 달가워하지 않은 공작의 아들들은 배석을 탐탁지 않게 여겼을 것이고, 공작은 이전처럼 방관했을 것이다.
결국 장차 수백만 골드의 가치를 단돈 일만 골드에 넘긴 팬텀 공작이었다.
그리고 그 어리석음에 배신감보다 젊었을 때의 영민함도 나이들 들면 이렇게 흩어지는가 싶어 그것이 더 서글픈 닉스 부인이었다.
그러고 보면 보통 신통한 일이 아니었다.
어스는 어찌 이토록 팬텀 공작을 꿰뚫고 있던 것일까?
닉스 부인은 돌아가서 꼭 어스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하께서 합작은 원치 않으신다니 가설 방법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혹시 궁금한 것은 없으십니까?”
“없네. 말이 나온 김에 계약이나 하고 가게. 나중에 딴소리 없도록. 물론 돈은 나중에 지불해도 되지만, 일이 시작되기 전에는 지불되어야 하네.”
“그렇게 여유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마침 이 사람에게 펠리컨 상단의 어음이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허허허, 이를 말인가. 이 왕국에서 펠리컨 상단이 발행한 어음을 믿지 않으면 무엇을 믿겠는가? 허허허, 아마 자네 상단도 조만간 그런 상단이 될 게야. 허허허.”
공작은 아예 대놓고 자작을 향해 아낌없는 기원까지 했다. 일만 골드를 공돈이라 생각하고 기분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조만간 그 땅의 가치를 깨달으면 어떤 기분일까?
얄팍한 계산속에서 상대를 무시한 결과였기에 누구도 동정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호돈 자작과 세 사람은 고소를 배어 물며 외면하고 말았다.
“그럼 바로 계약을 하세나.”
“예, 전하. 그럼 증인들은 어찌할지…….”
“여기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마법 인증을 받아야겠지. 그것은 내가 준비하겠네.”
“공작 전하,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미천한 사람이 좀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허허, 당신이 베어헌트 단장임을 아는데, 누가 당신에게 미천하다고 말하겠소? 할 말이 있거든 기탄없이 하시오.”
“감사합니다, 전하. 그렇다면 이왕 전하께서 땅도 파셨으니 도로로 들어갈 부분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마땅히 지분을 드려야 하는데…….”
“지분? 에잉, 됐소. 그냥 쓰시오. 내 영지에 그토록 넓은 도로를 놓아 주겠다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겠소.”
“하지만 전하, 그것은 장차 문제가 있는 것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지 공작이 말을 끊어 버렸다.
“됐소! 당신들이 정 그렇다면 그것도 일만 골드를 내든지!”
차라리 더 많이 내놓으라 했으면 지금보다는 덜 비참했을까?
오랜 시간 자신이 그토록 기다렸던 사내가 저 정도였다니, 닉스 부인은 지나온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그녀는 지금 사내의 진면목을 보고 있었다.
잠시 닉스 부인의 낯빛을 살핀 베어헌트는 침착하게 원래의 목적에 따르기로 했다.
“그럴 수야 없지요. 전하께서 이토록 이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 주시는데, 어찌 헐값에 받겠습니까? 도로부지에 대한 권한과 장차 팬텀 영지에서 도로에 대한 어떤 제지도 할 수 없음을 문서로 남겨 주신다면 오만 골드를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