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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여의당천 1권(9화)
제4장 명포두 진형래(陳逈崍)(2)


사실 진 포두의 어머니는 구마의 하나인 살마(殺魔)가 이끈 살막(殺幕)의 살수였다. 오십 년 전에 모종의 임무를 띠고 마교의 인물을 암살하려다, 임무에 가담한 모든 살수가 죽고 일점홍이라 불리던 그의 어머니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큰 부상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지나가던 진 포두의 아버지가 살려 주었고, 무공을 잃은 일점홍은 자신을 구해 준 백정과 함께 살다가 진형래를 낳았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진형래를 낳은 부친은 도살 중에 얻은, 백만 마리 중에서 하나 정도 있다는 소의 흑담(黑膽)을 아들에게 복용시켰다. 일점홍은 비록 무공을 잃었지만 흑담이라는 영물을 복용한 아들이 건강하게 살도록 평범한 내공심법을 가르쳐 주었다. 삼재심법이란 흔하디흔한 심법으로, 평생 연마해도 내공을 이삼십 년치 모으기도 어려운 심법이었다. 살막의 눈에 띄면 참화를 면치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무공을 가르치지 않고 끝내 세상을 떠난 그녀였다.
그래도 그녀는 아들에게 삼재심법과 함께, 소를 효율적으로 도살하는 방법만은 가르쳤다. 그 가르침을 토대로 도살도법이라는 새로운 도법을 만들어 낼 정도로 비상한 자가 바로 진형래였다. 진형래의 도살도법은 일격필살로 소의 목숨을 거두는 기술로 사람에게도 응용할 수 있는 도법이었다. 어머니의 이름과 같은, 일점홍이라는 암살수법과 닮아 있는 도살도법이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목숨이 경각에 있지 않으면 도살도법을 사람에게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가시지요.”
진 포두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당천에게 말했다. 그는 그냥 사천성의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암제, 창제, 철마, 검존, 비제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들 문파에 소속된 무림인이 사천성을 들락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당과부터 사러 가자! 너도 하나 줄게!”
당천은 어깨가 축 늘어진 진 포두를 격려해 주기 위해 당과 먼저 사 주기로 했다. 당천의 말을 들은 진 포두의 어깨가 펴졌다. 놈이 어려도 막무가내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놈도 생각이 있는지, 아니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인지 자신처럼 성내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자는 말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저 성내를 돌아다니면서 술이나 먹고 음식이나 먹는, 어쩌면 팔자 편 세월을 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진 포두는 당당해졌다.
‘으! 아까운 당과!’
당천은 당과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놈은 암제처럼 보물을 주고 당과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날로 처먹으려는 생각이 분명했다. 아니면 금세 저처럼 어깨가 쭉 펴질 리가 없다. 아무런 대가 없이 당과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당천은 속이 쓰렸다. 아까 기분이 좋아져서 모두에게 당과를 하나씩 나눠 주려던 생각은 이미 슬그머니 사라진 뒤였다. 앞으로 절대로 당과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당천이었다.

***

“헉! 전대 가주님인 암제 어르신……!”
사천당가는 당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수백 개의 마을과 그와 연관된 수많은 사업장과 문파를 거느린 대무림세가다. 때문에 사천당가의 본가에 들어오기 전에 수상한 외부인에 대한 소식은 바로 본가로 전해진다. 그러나 아무런 기별도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물을 보고 순간 긴장하던 정문의 당가 무사들은 결국 암제를 알아보았다. 사천당가에서 사라진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암제의 얼굴을 모르는 당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천당가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신화인 암제의 그림을 보면서 무공을 익혀 온 당가의 무사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문을 휙 지나가는 암제를 보면서 놀라서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다.
암제는 놀라운 경공술로 본가에 도착했지만 그래도 본가로 무턱대고 날아 들어갈 수는 없었다. 수많은 절진과 암기와 함정은 암제라도 함부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천당가의 함정과 절진은 그새 또 발전했을 것이다. 이미 무공의 경지가 화경에 달했기에 무조건 박살 내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그러면 절진을 구성하고 있는 당가의 후손들이 죽어 나갈 것이기에 정문으로 들어선 것이다.
땡땡땡!
암제가 들어서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정문의 무사가 귀한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비상종을 쳤다. 당가의 가주가 직접 마중해야 할 정도의 손님이 왔다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가에서는 종소리로 적이 침투했다는 등의 여러 가지 소식을 알릴 수 있었다. 두 종류의 소리가 있었다. 우선, 막기 힘든 난적이 왔다는 소식을 전하는 종소리는 두서없이 막 치면 되었다. 두 번째는 귀한 손님이 왔다는 소식으로, 두 번씩 규칙적으로 치면 총관이 직접 마중해야 할 손님이고 세 번씩 규칙적으로 치면 당가의 가주가 직접 마중해야 할 정도의 귀한 손님이라는 뜻이었다. 지금 당가에는 세 번찍 울리는 규칙적인 종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 아버님!”
당가의 가주 당청수는 총관 당인문과 직계의 모든 후손들을 이끌고 마중 나오던 중 멀쩡한 모습으로 걸어오는 암제의 모습에 경악했다. 은빛 보갑을 걸치고 하얀 머리가 검게 변했으며 이십 대 젊은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가 암제라는 것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당가에 그려진 암제의 그림이 바로 저러했기 때문이다. 늙은 모습이 아니라 젊은 암제의 모습을 그려 놓았던 것이다. 만약 반로환동한 것이라면 치매에서 벗어난 것이고, 사천당가가 부활의 기지개를 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암제 없는 사천당가가 그동안 무림맹에서 얼마나 괄시를 받았던가? 삼존, 칠제가 없는 문파는 무림맹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신세다. 사천당가에 아직 암제가 버티고 있지만 모습이 사라진 지 오래니 은연중에 받는 괄시가 더 서러웠던 것이다. 노년에 들어선 당청수의 눈에 눈물이 다 글썽거렸다.
“오랜만이다.”
“아버님! 얘들아, 인사 올리거라! 할아버지시다.”
암제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당청수는 감격해서 인사를 올리고는 이어 자식들에게 말했다. 이분이 바로 사천당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인 너희 할아버지라고!
“첫째인 당석입니다.”
첫째 당원와 둘째 당두는 전사했다. 당두의 전사로 막내인 당천이 소림의 대환단과 무당의 태청단을 얻게 된 것이다. 이제는 셋째인 당석이 문주의 후계자가 된 소문주였다.
“둘째인 당사사(唐絲師)입니다.”
“다섯째인 당오철(唐悟鐵)입니다.”
“여섯째인 당서시입니다.”
“일곱째인 당달기입니다.”
먼저 문주의 아들과 딸들이 자기소개를 했다. 딸들은 이미 출가했지만 사위들이 모두 데릴사위로, 아들 못지않은 무공과 지혜를 가진 여걸들이었다. 소문주인 당석과 가주의 꿈을 버리지 못한 당사사, 당오철 간의 암투가 있기는 했지만 눈에 띌 만큼 큰 일은 아니었다. 이십 년 평화가 가져다준 결과였다. 또다시 마교나 천축무림과의 전쟁이 벌어지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암투를 통해서라도 싸워서 이기는 자가 당문의 가주가 되는 것은 전통이었다. 양패구상을 하면 딸에게도 가주의 지위가 돌아갔다.
“당천이 출관했다. 별채에 머물 테니 치워 놓고 당천의 소식을 가져와라!”
“당천?”
“설마, 도반삼양귀원술이 성공했다는 말씀입니까?”
처음 듣는 당천이란 이름에 다들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문주와 총관은 놀라 입을 쩍 벌리며 소리쳤다. 기대하지 않았던 도반삼양귀원술이 성공했다는 말인가?
“삼장로의 희생으로 성공했다. 나와 같은 갑옷을 입고 큰 창을 가진 자가 당천이니 그렇게 알아라! 그리고 당천을 발견하면 건드리지 말고 나에게 바로 연락해라.”
“아!”
당청수의 아내인 대부인이 사태를 짐작하고는 기절하며 쓰러지는 것을 옆에 있던 시비들이 부축했다. 사산으로 생각했던 막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당천의 형제와 누이들도 사태를 짐작했는지 입이 쩍 벌어졌다.
도반삼양귀원술이 성공했고 암제가 반로환동해서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온 겹경사에, 당청수는 부인이 쓰러졌어도 감격한 모습으로 입을 쩍 벌린 채 날파리가 들어가도 모르고 있었다.
“총관, 암향대에게 명해 당천을 찾아라!”
“예! 문주님!”
당청수는 당인문에게 당천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암향대는 당가의 비밀 정보조직으로 당가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하는 단체였다.
“아버님, 가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총관에게 명령을 내린 문주는 자신이 직접 암제를 별채로 안내했다. 별채 중에서 문주 자신이 사용하던 곳을 내줄 생각이었다. 별채는 중요한 손님이 오면 내주거나 당가의 주요인물들이 가끔 모여서 술판을 벌이며 노는 곳이었다. 또한 경치가 좋았기에 당가의 여인들이 꽃구경을 하거나 배를 타면서 나들이를 하는 곳이기도 했다.
“당천이라니? 더욱이 도반삼양귀원술과 암제 할아버님의 진전을 이은 놈이라니!”
소문주인 당석은 암제가 문주와 함께 별채로 가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혼자 중얼거렸다. 탄탄한 줄 알았던 자신의 자리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당가의 문주 자리는 장자가 아닌, 능력 있는 자가 물려받는다. 때문에 당가는 일정한 규칙 안에서 형제들이 서로 암투를 벌이는 것을 묵인하고 있었다. 당가의 이러한 전통은 험한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의 일환이었다.
“후후! 강력한 변수가 등장했으니 우리에게도 기회가 오려나?”
“도반삼양귀원술이란 전설적인 수법으로 탄생한 놈이다. 게다가 할아버님의 진전을 이었다면 형님뿐 아니라 우리도 포기하고 당천에게 붙는 게 나을 것이다.”
첫째인 당석이 얼굴이 변해서 사라지자 둘째인 당사사와 당오철이 당천이란 변수에 대해 흥미를 보였다. 당석이 워낙 뛰어난 무공실력과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미 대권 도전에 포기하고 있던 그들이었다.
“호호호! 오라버니!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실 필요 없어요. 할아버지의 진전을 이었고 전설적 수법으로 태어났다지만 아직 그 능력이 확인된 것은 아니죠. 더구나 강호초출이라고 하니 험난한 강호에서 살아남을 수나 있는지 걱정되는군요.”
오빠들의 말을 듣던 막내 당달기가 요염한 웃음을 터뜨리며 관심을 나타냈다. 서른의 나이로 아직 결혼하지 않는 막내였다. 막내의 말에 당사사와 당오철, 그리고 결혼해서 아이를 셋이나 낳은 당서시까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막내이자 여인인 당달기가 대권에 대한 욕망을 감추고 살아왔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막내가 생겼는데 축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군요.”
잠시 후 당서시가 한마디 했다. 문주는 어린 아들을 죽음이 거의 확실한 도반삼양귀원술이란 실험에 내던지고, 그의 형제들은 살아 돌아온 막내가 앞으로의 권력싸움에 어떤 변수가 될지부터 살피고 있는 것을 꼬집은 것이다.
“호호! 언니는 벌써 당천에게 붙을 생각이군요.”
당달기가 어이없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누구보다 대권에 대한 집착이 강한 여인이 당서시였다. 당가에 데릴사위로 들어온 남편까지 이용하면서 대권 도전에 열을 올리다가 가장 먼저 패배한 여인이 그녀였다. 이제 당서시는 당천에게 붙어서 자신의 아들을 다음 대의 소문주로 삼으려는 심보인 것이다.
“아무튼 네 말대로 우리 막내가 어떤 인물인지 빨리 보고 싶구나!”
당서시는 당달기의 말에 부인하지 않고는 말을 돌렸다. 당서시의 말에 모두는 침묵에 빠진 채 깊이 숙고하기 시작했다. 만약 당천이 다음 대 문주가 될 확실한 인물이라면 그에게 붙어서 다음 대의 소문주는 자신들의 아들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당천에게 붙었다가 현 소문주인 당석이 문주가 된다면 자신들은 한직으로 밀려난다. 다시 마교와의 전쟁이 벌어지면 마교와의 싸움에서 전사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렇게 당천의 존재는 당가에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

‘내시가 되면 성격도 어린아이처럼 변하나?’
진 포두는 당천과 함께 사천성 내의 시장을 거닐고 있었다. 당천은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끊임없이 물어 대고 있었다. 어릴 적 황실에 들어가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내시라 해도 이건 너무했다. 만두, 국수가 무엇인지 모르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왜 그런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묻는 말에는 명포두라는 진형래도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멍해지기 일쑤였다. 당천은 도반삼양귀원술로 내재된 뜨거운 기운과 만년극음지기가 조화를 이루며 천지자연의 기를 빨아들여, 먹지 않아도 성장하고 내공심법이 없어도 삼원이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이 하나가 되어 내공이 세맥까지 흐르는 기이한 체질이었다. 더구나 암제가 동굴에서 벽곡단만으로 생활했기에 당천이 본 음식은 벽곡단이 전부였다. 그러던 중 당과의 맛을 알아 버린 것이기에 당과 외에는 다른 음식을 모르는 것이다.
“당과 사려!”
“당과장수다.”
당천의 예민한 귀에, 예전에 들었던 당과장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단전이 열려서 찾고자 하는 당과장수가 있는 곳을 무의식적으로 찾아내는 그였다. 복잡한 시장통에서 당과장수의 존재를 찾아낸 당천의 말에 진 포두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당과장수를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아 어리둥절했다. 진 포두의 내공은 삼십 년 가까이 된다. 삼재심법은 하급의 심법이라 삼십 년 죽어라 내공만 수련해도 내공이 십 년도 채 안 된다. 흑담이라는 보물과 사십 년 가까이 내공수련을 하루도 거르지 않은 성실함으로 삼십 년이란 내공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삼십 년 내공이면 무림에서 이류는 되는 실력이다. 그러니 황궁 무과시험에도 당당하게 합격할 수 있었지만 머리가 뛰어난 진 포두는 배경은 없이 실력만 있는 자는 실컷 이용만 당하거나 제거되거나 평생을 누군가의 개가 되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이류의 내공으로 무림에 투신해 봐야 신법, 보법 하나 없이 일초만 있는 도살도법 하나로는 받아 주는 무림세력도 없었고, 낭인이 되어도 등 뒤에 칼 맞고 죽기 딱 알맞은 현실을 너무나도 잘 꿰뚫고 있는 진 포두였다. 더구나 무림에서 활동하다가 도살도법에 깃들어 있는 일점홍이란 무공이 파악되기라도 하면 살막의 살수를 피하기 어렵다.
“컥! 사, 살려 주십시오.”
어리둥절해진 진 포두는 당천의 뒤를 한참 따라가던 끝에 마침내 당과장수를 만났다. 진 포두는 당천이 당과장수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당과장수 역시 당천을 알고 있는지 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살려 달라고 빌며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