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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후, 후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정현은 먹이를 포착한 맹수처럼 사납게 달려들었다.
황급히 머리를 비롯한 주요 급소들을 방어하는 준석이었지만, 상대방의 공격은 늘 예측 범위를 벗어났다.
퍽!
“윽!”
억지로 다문 입술을 비집고 신음성이 흘렀다. 오른쪽 다리에서 밀려온 통증이 그만큼 거세기 때문이었다.
정현은 로우킥의 영향으로 비틀거리는 준석을 보며, 끝을 볼 생각으로 신속하게 거리를 좁혔다.
“쉽게 끝날 것 같아!”
가드조차 올리지 않고 달려오는 정현의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마주 달린 준석은 얼굴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터엉!
태권도의 바깥 막기와 흡사한 동작으로 준석의 공격을 걷어 낸 정현은 팔뚝에서 느껴지는 반발력을 무시한 채 가벼운 잽을 날리며 준석의 신경을 분산시켰다.
“쳇!”
살짝 뒤로 물러서며 로우킥으로 견제를 시도하는 준석이었지만, 그조차도 읽히고 있었다.
백스텝으로 회피를 한 다음, 물러선 것보다 더욱 빠르게 접근해 들어가는 정현의 모습은 발견한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내리꽂히는 맹금류의 움직임을 연상하게 했다.
휙휙!
‘가벼운 원투? 그렇다면…….’
마무리 공격이 올 것이다.
최근 세 번의 대련 동안 비슷한 패턴으로 KO를 당한 준석은 가드를 한 팔목 사이로 눈빛을 번뜩이며, 정현의 오른쪽 다리를 주시했다.
휘익!
“역시!”
저번 대련 때 느꼈던 헤드기어를 뚫고 들어오는 하이킥의 강렬한 감각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준석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더킹(Ducking)을 하여 정현의 왼쪽 다리를 잡아갔다.
퍼억!
“컥!”
하지만 행복의 순간은 잠시였다.
헤드기어를 관통하는 엄청난 충격에 잠시 동안 의식이 끊겨서 허우적거리던 준석은 끝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몸을 눕혔다.
“으으…….”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좀 개운하다는 목소리로 대련을 위해 착용했던 보호 도구들을 해제하는 정현을 보며, 유일한 관람자인 문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방금 전에 벌어진 광경은 그라고 해서 결코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는데.’
쓴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이킥이 어떻게 내려찍기로 변할 수 있는지 의문밖에 생기질 않았다.
그것도 단련된 트레이너인 준석을 한 방에 무력화 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실어서 말이다.
‘정말 보면 볼수록 놀라운 녀석이야.’
준석이나 문수가 결코 모자란 것이 아니었다.
둘은 각종 격투기 대회에서 수상 경력이 있을 정도로 입증된 사람들이었고, 지금도 가끔씩 대회에 출전하는 현역들이었다.
하지만 3년 전 갑자기 나타나서 그들을 놀라게 한 정현을 상대로는 어떠한 상식도 통하질 않았다.
“이번에는 내 차례지? 얼른 준비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응?”
문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랗게 떠진 눈으로 정현을 바라보았다.
그와 준석을 연달아서 상대하고도 항상 체력이 남아서 샌드백을 두들기는 정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끝내겠다니?
‘3년 만에 처음으로 있는 일인걸.’
“오늘부터 게임을 시작하기로 해서요.”
“그, 그래? 그렇다면 가 봐야지.”
처음에는 의아했던 문수였지만, 자신은 준석과 같은 꼴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손짓까지 해 가며 체육관을 나서는 정현을 배웅했다.
“……진짜로 갔네.”
“크윽! 저, 정현은 어디 갔냐?”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뒤통수를 부여잡으며 일어난 준석이 물었다.
“게임하러 간다는데?”
“아아, 그래. 게임하러…… 응?”
준석은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이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문수도 멍한 얼굴로 준석과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마치 연습이라도 했는지 절묘한 타이밍으로 메아리 소리가 퍼졌다.
“에엑!”
“게, 게임이라고?”
……기묘한 침묵이 주위를 휩쓸었다.
* * *
[캡슐(Capsule) 관리 번호 ‘09―505928’ 등록되었습니다.]
“좋아, 그럼 시작해 볼까.”
정현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설치되어 있는 가상현실시스템 접속 캡슐을 안전하게 이용하기 위하여 프로그램 에아(Ea)에 등록시켰다.
푸슉!
공기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캡슐의 덮개가 개방되었다.
고급스럽게 보이는 순백색의 외관을 뒤로한 채, 정현은 간편한 활동복 차림으로 내부에 몸을 뉘였다.
스윽!
‘상당히 편안하네.’
장시간 가상현실시스템을 사용할 경우를 대비하여 인체 공학적으로 설계된 내부는 등에 닿는 시트만 하더라도 최고급 침대를 방불케 했다.
철컹!
정현이 안에서 폐쇄 스위치를 누르자, 캡슐의 덮개가 닫혔다. 그리고 기계가 작동을 시작했다.
위잉!
작은 기계음을 시작으로 차갑게 느껴지는 금속선들의 감촉이 전신에서 느껴졌다.
뇌를 비롯한 수많은 감각기관을 자극하여, 완벽한 가상현실시스템을 만끽하기 위한 준비였다.
“후우…….”
정현은 익숙지 못한 느낌에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레이저광선 같은 것이 전신을 스캔(Scan)하였고, 금속선에서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얇은 바늘들이 튀어나와 신체의 중요 부위들을 장악했다.
‘묘한 느낌인데.’
그 순간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몽롱함이 정현을 사로잡았다.
꿈을 꾸는 것 같은 아늑한 느낌에 거부하지 않고 빠져든 정현은 정신을 차린 순간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느꼈다.
“뭐, 뭐야?”
당황스러움이 전신을 지배했다.
분명 자신은 캡슐에 누워서 접속을 하는 도중이었는데, 잠시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사이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공간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휙휙!
설마 해서 가볍게 주먹을 질러 보는 정현이었지만, 결코 꿈이 아니었다.
실제로 신체가 움직이는 느낌과 함께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는 주먹을 보며, 정현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옷도 캡슐에 들어오기 전 입었던 그대로고, 도대체 뭐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윤정현 고객님, 저희 (주)웅비의 가상현실시스템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깜짝이야!”
분쟁 지역에서 수색 정찰을 실시하다가 갑작스럽게 적과 조우했을 때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멍하니, 이십 대 여성 정도로 느껴지는 음성을 듣던 정현은 화들짝 놀라며 깨달은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설마, 이게 가상현실시스템?”
화악!
정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위의 어둠이 물러나고, 새하얀 빛이 폭발했다.
정현은 잠시 동안 가려진 시야에 눈을 찌푸리다가 이윽고 빛이 사라지자 드러나는 광경에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건…….”
창이나 입구가 아치형으로 구성된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순백의 성당과, 그것을 중심으로 아기자기하게 지어져 있는 유럽식의 주택들.
길고 곧게 뻗어 있는 길들은 사방에서 시작되어 중앙의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와아아아!
삼삼오오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뒤편으로 무지개가 비치는 아름다운 분수대가 있었으며, 미술관에서나 볼 수 있는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의 동상들이 주위를 장식하였다.
짹짹짹!
분수대와 주위 나무들에 앉아서 지저귀는 새들이 앙증맞았다.
싱싱한 나무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서 잎사귀를 흘렸고, 정현의 눈앞으로 스쳐 지나가며 뚜렷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럴 수가…….”
상상을 초월하였다.
과거 군에서 경험했던 구닥다리 시스템과는 비교를 거부할 정도로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선명한 의식이 실제의 정현과 캐릭터를 완벽하게 싱크로하며 일체감을 주었다.
“정말, 놀랍군.”
‘팀’에서 임무를 수행하면서 어떠한 임무가 주어지더라도 놀라지 않을 강철 같은 심장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너무 이른 판단이었다는 생각을 하는 정현이었다.
“나뭇잎의 잎맥까지 생생하게 보이다니.”
꿀꺽!
모든 것이 놀랍고 새로웠다.
하다못해 방금 전 긴장감으로 삼킨 마른침마저 정현에게는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현재 배경은 유럽의 중세 시대를 모토로 하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배경 화면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정현은 놀라움이란 감정을 잠시 접어 두고, 들려오는 음성에 신경을 집중했다. 처음 접해 보는 가상현실시스템이기에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배경은 이대로 하고, 현재 이용할 수 있는 컨덴츠를 알려 주겠어?”
[현재 서비스하고 있는 분야로는 게임, 교육, 금융, 방송, 복지, 쇼핑, 의료, 휴양 등이 있으며…….]
“가상현실게임으로 하지.”
정현의 생각보다 가상현실시스템은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현실에서 이루어지던 대부분의 일들이 가상현실에서 가능하게 되었는데, 움직이기가 불편한 사람들을 위한 가상현실에서의 의료 상담 등이나 금융 거래, 학교 교육 및 자택 근무 등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혁명이었다.
[현재 서비스되는 가상현실게임은 리얼(Real)과 룬(Lune) 월드, 절대지존(絶代至尊), 더 워(The War)가 있습니다.]
“가상현실게임 리얼(Real) 실행!”
[알겠습니다. 가상현실게임 리얼을 실행합니다.]
화악!
“윽!”
다시 한 번 빛이 폭발하면서 정현의 시야를 제한했다.
좀 전에 겪어 본 일이기에 정현은 당황하지 않고 편안한 자세로 빛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아아, 아아아아!
정현이 시야를 찾아갈 때쯤, 오페라를 생각나게 하는 웅장한 음률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찬란함을 드러낸 하나의 신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새하얀 대리석 기둥들이 선명한 빛을 발하며 새로운 방문자를 환영했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신전들이 이러할까?
아름다운 문양들이 입구와 기둥들을 장식하고, 그 주위로는 몽환적인 연기가 피어올라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꿀꺽!”
두둥, 두둥!
점점 고조되는 음악을 들으며 정현은 신전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계단을 따라서 마침내 입구에 도달했을 때, 정현은 처음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 이외의 캐릭터라고 불리는 NPC를 말이다.
―반갑습니다. 이계인(異界人)이여.
“……네, 반갑습니다.”
가상현실게임 리얼에 대한 기본적인 매뉴얼은 이미 숙지한 상태다. 하지만 감도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 NPC라고 해도 실제의 사람과 같은 느낌이다.
물론 등 뒤로 펄럭이는 세 쌍의 날개는 현실의 사람들과 괴리감을 느끼게 하지만 말이다.
―저는 테라의 신들 중 하나인 운명의 신 ‘레아’라고 해요. 처음으로 이곳에 방문하신 이계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하고 있지요.
금을 녹여서 입힌 것처럼 찰랑거리는 금발과, 아기를 보는 것 같은 새하얀 피부가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