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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이런, 미친! PK범인가?’
경비병들이 잔뜩 있는 도시에서 무슨 문제가 있을까, 방심한 워리어 유저는 피할 수 없는 스피드였다.
이어질 고통을 생각하며 두 눈을 감는 워리어 유저…….
하지만 정현의 손은 중간에서 멈춰 있었다.
“…….”
“…….”
“이게 뭐죠?”
“악수입니다.”
“응?”
황당한 얼굴로 정현이 내밀고 있는 손을 바라보는 워리어 유저.
그 순간 이어지는 말이 더욱 가관이다.
“이제 인사도 했으니…… 길 좀 묻겠습니다. 무투가 길드가 어디죠?”
뜨억!
워리어 유저의 입이 턱이 빠질 정도로 벌어졌다.
* * *
“쳇! 내가 이대로 물러날 줄 알고? 어림도 없지.”
무투가 길드로 향하는 주도로에서 왼편으로 살짝 벗어난 주택가 외곽에는 화단(花壇)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고, 아름다운 꽃들과 향기들이 사방으로 흘렀다.
“내가 어떻게 준비한 건데. 이대로 남 좋은 일만 시킬 것 같아? 쳇쳇! 기필코 방해할 거야. 흥!”
아름다운 주위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불량스러운 태도로 한쪽 다리를 건들거리며 연신 콧방귀를 날리는 유저는 주위를 지나가던 남성 유저들이 한 번쯤 걸음을 멈추고 쳐다볼 정도로 쉽게 볼 수 없는 미인이었다.
‘퀘스트도 다 포기했고, 국적도 옮겼으니, 약속은 지켰어.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기는 억울해.’
카렌 왕국에서는 그나마 유저들이 많기로 소문난 도시 ‘하몬’의 도로를 걷는 ‘유나’의 고민은 쉽게 해소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히잉…… 정말 히든 클래스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쉬움으로 칭얼거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유나의 목적지는 다름 아닌, 무투가 길드였다. 그곳에서 히든 클래스의 첫 번째 이야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도착했네.”
2층으로 이루어진 목조건물에는 ‘하몬 무투가 길드’라는 명패가 달려 있었다.
‘무투가’라는 클래스 자체가 기타의 근접 전투 계열의 클래스보다 한 수 밑으로 평가받는 탓에 주위에는 소수의 유저들만 돌아다니고 있었다.
딸랑!
시원한 종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선 유나는 좁은 공간에 둘밖에 존재하지 않는 NPC 중 하나를 바라보았다.
“어서 오십…… 응? 아아, 유나잖아. 정말 오랜만이야. 거의 한 달만인 것 같은데?”
종소리에 방문객을 맞이하러 달려온 남성은 30대 초반의 얼굴에 반팔티를 입어, 굵은 팔뚝이 잘 드러난 상태였다.
“헤에, 페일 님, 그간 안녕하셨나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리던 유나는 어디로 갔는지, 화사한 미소와 함께 페일에게 인사를 한다.
이제 웬만한 유저들이라면 NPC들과의 호감도가 게임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나는 한껏 친근한 모습으로 이곳을 방문한 목적을 잠시 뒤로 미루고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며 호감도를 관리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띠링!
[재치 있는 말과 칭찬으로 페일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하하하, 유나와는 언제 대화를 해도 유쾌하군.”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정말 감사하죠. 으음…… 페일 님, 제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알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응? 하하하, 내 쓰리 사이즈만 빼놓고는 얼마든지 물어 봐.”
“…….”
이마에 돋는 힘줄을 애써 누른 유나는 오늘 그녀로 하여금 이곳에 방문하게 된 이유를 알렸다.
“처음 저를 보셨을 때 소개시켜 주신 분이 있잖아요. 혹시, 저 이후로도 그분께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셨나요?”
“그게 무슨…… 아! 설마, ‘그분’을 말하는 거야?”
끄덕, 끄덕!
유나의 질문에 단번에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페일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아무도 없는데 괜히 주위를 휙휙 둘러본 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 하면 곤란해. 나도 부탁을 받아서 ‘자격’을 갖춘 사람을 그분께 가 보라고 하는 거지. 그렇게 대단한 관계는 아니라고.”
“다음부터는 주의할게요. 그것보다, 제 질문에 대한 답은…….”
먹이를 놓칠세라 다시 한 번 파고드는 유나의 질문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그간 상당히 쌓아 놓은 호감도 탓인지, 페일의 입이 재차 열렸다.
“두 명 정도 있었나?”
“그, 그렇게 많이요?”
“왜? 문제 있어?”
히든 클래스의 첫 번째 관문은 무투가 길드의 NPC인 페일과의 만남과,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자격을 갖춘 인원이 자신 외에도 두 명이나 있다는 사실에 유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초보자 존에서 본인의 실력으로 능력치를 5 이상 상승시켜야 하고, 생성 스킬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까다로운 자격 조건을 만족시켰다고? 그것도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하몬 시의 무투가 길드를 방문한 유저들 중에서?’
일정한 행동이나 전투 등을 통해 능력치를 올린다는 것은 말이 쉬울 뿐이지, 굉장히 어려운 과정이다.
게다가 생성 스킬이라니?
리얼이 서비스를 시작한 지 세 달이 지났지만, 정형화된 스킬이 아닌 자신만의 고유한 생성 스킬을 만들어 낸 유저는 열손가락에 꼽힌다.
‘나도 우연찮게 생성 스킬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면 기획서를 보고도 페일에게 자격을 인정받지 못할 뻔했는데. 내가 소속 국가를 옮기고 온 동안 두 사람이나 있었다고?’
꿀꺽!
긴장감으로 입안이 말랐다.
유나는 머뭇거리면서도 결국은 알아야 할 사실이기 때문에 미약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페일에게 물었다.
“서, 설마 ‘그분’이 후계자를 정하셨나요?”
“쉿, 쉿! 조용히 하라니까.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를 할 분이 아니야. 이런 변방의 나라에서 정체를 밝히지 않고 계신 것을 보면 몰라?”
다시 한 번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유나에게 주의를 준 페일은 그럼에도 변하지 않고 뚫어져라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직은 아니야. 더 이상 자격을 갖춘 사람을 보낼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으니까.”
“그, 그래요? 하아…….”
이제는 가질 수 없는 히든 클래스가 되어 버렸지만, 미련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유나는 작게 안도하며 클래스 설정 퀘스트를 포기하기 전까지 약 일주일간 생활했던 공간을 떠올리며 페일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했다.
딸랑!
“응?”
갑작스러운 방문객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실례합니다. 여기가 무투가 길드입니까?”
목조건물 안을 채우는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궁금증이 생긴 유나는 무투가 길드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으음?’
초보자 마을을 막 벗어난 유저들이 입고 있는 방어구들을 착용하고 당당하게 서 있는 한 명의 남성이 보였다.
180cm를 살짝 넘기는 듯한 키와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사용했는지, 이질감이나 부조화가 느껴지지 않는 뚜렷한 이목구비와 검은색 머리칼…….
거기에 약간은 차갑게 느껴지는 가라앉은 눈빛이 인상적인 남성이었다.
‘헤에…… 잘생겼네.’
공부를 하기 위해 안경을 쓴다면 이지적인 느낌의 미남으로 여겨질 것이다.
물론 건장하게 보이는 신체가 그러한 생각을 뒤로 접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호오, 모험가인가? 반갑군. 하몬 시의 무투가 길드를 관리하고 있는 페일이라고 하네.”
처음 보는 유저가 등장하자 자연스럽게 프로그램되어 있는 대사를 내뱉는 페일을 보며, 유나는 이대로 나가기에는 한 박자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관전자의 태도를 취했다.
“저는 ‘테라’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그래, 나도 반갑네. 그런데 무투가 길드에는 어쩐 일인가?”
“길드의 가입을 원합니다.”
“오오, 정말 오랜만의 가입자로군.”
쉽게 나오지 않는 무투가 클래스 유저의 모습에 유나도 관심 있게 지켜봤다.
“그래, 그래…… 최근 들어서 젊은이들 사이에 무조건 ‘무기’를 쥐어야 강하다고 생각하는 편견이 있어서 걱정하던 참이야. 정말 잘 선택했네.”
한참 동안 무투가 클래스에 대한 찬양과 장점들을 늘어놓던 페일은 얼른 도장을 찍기 위해서인지 길드 가입을 위한 서류와 여러 행정 사항들을 준비하였다.
“그래, 그곳에 이름을 적고 사인을 하면 자네도 무투가 길드의 일원이…… 음?”
처음의 진중했던 모습과 다르게 정신없이 수다를 떨고 있던 페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양해도 구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서 남성 유저의 손을 잡았다.
“……자네, 자질이 훌륭하군. 혹시, 저명하신 어른들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가?”
“엑?”
페일의 대사가 뜻하는 바를 잘 알고 있는 유나의 입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저, 저건 자격을 갖춘 유저를 보았을 때 하는 말이잖아.’
얼떨떨해하는 유나를 뒤로하고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어 어느새 페일이 남성 유저에게 ‘그분’의 거처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고 있었다.
“그래, 남문으로 나가서 숲의 중앙으로 가면 오두막이 한 채 있을 거야. 그곳에 ‘그분’이 계시지.”
“후계자를 구하고 있다는 그 사람…… 강합니까?”
“하하하, 물론이지.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 보게나.”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페일을 뒤로한 채 남성 유저는 무투가 길드를 나섰다.
“어, 어라? 이게 아닌데.”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나는 화들짝 놀라며 페일에게 인사를 할 여유도 없이 남성 유저를 따라나섰다.
‘자격이 그렇게 쉬운 조건도 아니고, 하필이면 그런 사람이 왜 무투가로 클래스를 정하려고 해? 히든 클래스를 얻기가 이렇게 쉬운 거였어?’
물론 페일과의 만남은 히든 클래스를 얻기 위한 첫 번째 단계에 불과하지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괜히 심기가 불편한 유나였다.
* * *
띠링!
[도시를 벗어났습니다.]
[현재의 필드에서는 PK가 가능하며, 지형이나 기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풋내기 모험가에게는 쉽지 않겠지만,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하하하, 몇 분 뒤에 몬스터를 꽁무니에 달고 도망쳐 오면 곤란해.”
“…….”
정현의 명성이 낮은 탓에 성문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가는 과정에서 경비병 NPC들에게 비웃음을 당했다.
태연하려고 했지만, 한낱 프로그램에게 무시를 당했다는 사실에 이를 갈던 정현은 오늘 광장에서 본인이 벌였던 황당한 일과 전역 후의 일상을 생각하며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나는 어떤 녀석이지?’
어렸을 적의 기억이 떠올랐다.
단란한 가정의 외동아들로서, 부모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던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성적도 우수하였고, 타고난 신체 능력으로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였나? 그 사고가…….’
고등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가게 되어 부모님과 떨어져 있던 바로 그날이었다.
수학여행을 즐기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호출한 담임 선생님에게 전해 듣게 된 사고 이야기는 평온했던 정현의 일상을 시궁창으로 처박았다.
‘쓰레기 같은 방화범 한 놈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실 줄은 정말 몰랐지.’
미친 듯이 달려서 집에 돌아온 정현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완전히 무너져서 폐허가 되어 버린 집과,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린 부모님이었다.
해일처럼 일어난 슬픔과 절망이 정현을 덮쳤다.
거의 반년 동안을 폐인처럼 지냈을 정도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때부터인가? 내가 이렇게 변한 것은…….’
다시 일어서서 이를 악물고 살았다.
천하에 다시없을 독종처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언젠가는 그 방화범에게 처절한 복수를 해 주기 위해서 흥신소에 소재 파악을 의뢰하고, 그동안 다양한 격투기를 배우고, 체력을 단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