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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난 봤다. 분명히 다가오는 것도 인지했고, 나를 향해 손을 뻗어 오는 것도 확인했다. 그렇기에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피하지 못했다.
분명히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노인의 손은 흐름을 거스르기라도 하듯 정현의 어깨에 달라붙었으며, 이윽고 이어진 가볍게 손바닥을 비트는 동작으로 인해 저항할 틈도 없이 정현의 몸은 허공을 날았다.
스윽!
“호오, 이제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 그래, 한번 네 녀석의 건방짐에 대해서 제대로 교육이 되었는지 들어 보자꾸나.”
“결투를…….”
“응?”
기세등등하게 소리치던 노인은 예상하지 못한 단어가 정현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정확히 들었는지 의아해하는 사이, 그것을 확정 지을 단어가 재차 반복되었다.
“결투를 부탁드립니다.”
“호오…… 이거 물건이로군.”
띠링!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이 당신의 투지와 당당함에 감탄합니다.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좋아, 모처럼 스트레스나 한번 풀어 봐야겠어. 이봐, 애송이…….”
“말씀하시죠.”
어느덧 정현의 말투는 정중하게 변해 있었다.
전장에서 살아온 인생을 반영이라도 하듯, 강자에 대한 예우는 정현에게 본능적인 것이었다.
“네 녀석이 잘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
불길한 미소와 함께 다시금 거리를 좁혀 오는 노인.
그 순간 정현의 뇌리에는 빨간불이 번쩍이고 있었다.
“무모한 도전은 명을 재촉한다는 사실을!”
“……!”
터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친 소음이 오두막집 앞의 공터를 울렸다.
주먹을 뻗은 노인과, 그것을 양팔을 교차하여 얼굴 앞에서 막아 낸 정현.
그 순간 장내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타닥!
말은 필요 없었다.
서로를 맹렬히 노려보며 중앙에서 부딪쳤다.
주먹과, 주먹…… 발차기와 발차기가 교차하며, 순식간에 수십 합을 경합했다.
콰직!
“큭!”
정현의 가드 위를 교모하게 후려치고 지나간 일격이 노인의 주먹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매서웠다.
‘보답을 해야겠지.’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파워와 전투 기술을 가지고 있는 노인이었다. 정현은 방심하지 않고, 전력으로 양손을 교차하여 전방을 가린 채 몸을 날렸다.
‘무게를 상체에 두고…… 임펙트 순간에 무게중심을 이동한다.’
콰앙!
“큭!”
기다렸다는 듯 정현의 상체를 향해 풀스윙에 가까운 펀치를 날리는 노인.
정현은 순간적으로 의식이 아득해짐을 느꼈지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 버티면서도 힘을 거스르지 않고 상체를 뒤로 뉘이며 오른발을 올렸다.
콰득!
“윽! 이, 이놈이…….”
일명 섬머솔트 킥이라고 불리는 곡예에 가까운 기술이 들어갔지만, 노인은 당황한 표정을 했을 뿐 안정적으로 정현의 공격을 흘려 냈다.
‘생각보다 더한 노인이군.’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왕년에는 최고의 요원 중 하나로 손꼽혔던 정현일진대, 지금은 비리비리한 노인을 앞에 두고 잔뜩 긴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게임이라서 가능한 일이겠지. 나는 지금의 이 느낌을 즐기면 그만이다.’
찌릿, 찌릿!
정현의 공격에 통증을 느꼈는지 눈살을 찌푸리는 노인이었고, 그 순간 사방에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기운이 정현을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이, 이것은 살기인가?’
전장에서도 몇 번 느껴보지 못한 흉악한 기세에 정현의 눈빛이 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당신은…… 최고로군.”
“응? 애송이 이게 미쳤나. 뜬금없이 뭔 소리냐.”
황당하다는 듯 대꾸하는 노인이지만, 반응은 상관없다.
정현은 점점 긴장감으로 버무려져서 간질거리는 신체를 컨트롤하며, 진심으로 리얼(Real)을 시작한 것을 기뻐했다.
‘최고다. 놈을 꺾는 거다. 지금까지 만났던 어떠한 상대보다 강한 눈앞의 상대를.’
타닥!
“미친 녀석은 매가 약이지!”
정현의 감상은 관심도 없는지, 무심한 표정으로 질주해 오던 노인은 기묘한 스텝을 밟더니 순식간에 위치를 바꿔 정현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뼛속까지 아릴 거다.”
“……!”
콰직!
“컥!”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날리며 양손을 교차했지만, 회전력을 가미한 노인의 돌려차기는 정현의 방어를 꿰뚫고 복부에 강한 충격을 남겼다.
‘소,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아.’
하지만 내색을 할 수는 없다.
정현은 이를 악물고 이어지는 추가 공격을 막기 위해서 정신을 다잡았다.
그사이 노인은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처럼 매섭게 따라붙으며 주먹을 뻗어 왔다.
터엉!
몸을 뒤로 눕히며 발차기로 노인의 주먹을 튕겨 낸 정현은 한 바퀴 몸을 굴려서 중심을 잡은 뒤, 앞차기로 견제를 하며 거리를 유지했다.
“녀석 귀여운 잔재주구나.”
덥썩!
노인은 정현의 움직임을 예상했다는 듯, 앞차기를 피해 내곤 그대로 발목을 잡아서 비틀었다.
발목이 꺾이지 않기 위해서 비트는 방향으로 몸을 날려 바닥을 뒹군 정현은 쓰러진 자신에게 사커 볼 킥을 시도하는 노인을 보며, 정말 인정사정없다고 투덜거렸다.
콰직!
“컥!”
쓰러져 있는 탓에 충격을 분산시킬 방법이 없었다.
정현은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를 억누르며 공격을 막기 위해서 희생한 왼팔을 바라보았다.
“애송아, 어떠냐? 이제 좀 세상이 무섭게 느껴지더냐?”
부러지진 않았지만, 인대가 손상되었는지 손을 올릴 수가 없었다.
‘이라크에서 수십 명의 무장 병력과 혼자 마주쳤을 때도 이렇게 망가지진 않았는데.’
정현은 몸 상태를 확인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비틀어진 방향으로 몸을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욱신거리는 발목과, 인대가 손상된 왼팔…….
게다가 여러 번 공격을 가드한 오른팔도 부어오른 것인지, 열기가 느껴졌다.
“진심으로 했다면 처음 일격으로 끝났다.”
“……알고 있습니다.”
정현은 노인이 자신의 캐릭터와 동일한 능력치를 사용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히 움직임에 있어서 뿜어낼 수 있는 파괴력과 스피드는 자신과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완전히 패했지. 약간의 틈조차 없는 자로 잰 듯한 움직임과 과감한 결단력은 지금까지 만난 누구보다 대단한 것이었다.’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무술 고수라도 되는 양…….
아니, 어쩌면 실제로 수십 년간 무술을 배운 인물의 자료가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만큼 대단한 실력에 제압당한 정현으로서는 아직도 자신에게 부족한 점과 그만큼 성장할 수 있는 길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묘하게 일그러진 감정을 느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크큭! 그래? 그렇다면 한번 보여 봐라, 애송아.”
감탄은 감탄이고, 분한 감정은 엄연히 별개의 것이었다.
과거 ‘팀’에 소속되어 있을 때도 지독한 ‘독종’으로 인정받았던 정현이 이 정도로 포기할 리가 없는 것이다.
‘여유로움으로 가득한 저 얼굴을 망가트리겠어.’
정현은 늘어진 왼팔과 통증이 일어나는 발목을 애써 무시한 채 몸을 일으켰다.
노인은 그것을 구경꺼리라도 된다는 듯 히죽거리며 지켜보았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봐라.”
손자들의 재롱 잔치를 구경한다는 말투로 정현을 도발했지만, 쉽게 나설 수는 없었다.
‘기회는 한 번…… 반드시 성공시킨다.’
부상당한 몸으로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노인이 한없이 정현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것에 모든 가능성을 걸어야 할 것이다.
타닥!
선공의 시작은 정현이었다.
어설픈 잔재주로는 노인의 털끝조차 건들 수 없기에, 정면 돌파 후 옆차기로 포문을 열었다.
덥썩!
“학습 능력이 없구나. 이런 단순한 패턴으로……!”
이미 노인의 행동을 예상한 정현은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잡혀 있는 다리가 꺾였지만, 순간적인 통증을 무시한 정현은 몸무게로 인해서 비틀거리며 뒤로 밀리는 노인을 향해 남은 다리로 머리를 찍어 버렸다.
퍼억!
“큭!”
다리를 잡고 있던 손을 들어서 발차기를 막아 낸 노인은 무게가 실린 공격에 눈살을 찌푸리며 무릎이 꺾였다.
‘기회다!’
“하앗!”
착지와 동시에 멀쩡한 오른손으로 노인의 얼굴을 노려 갔다.
하지만 능숙하게 손바닥으로 정현의 공격을 막아 낸 노인은 정현의 손을 쳐 낸 뒤, 귀신같은 움직임으로 품속을 향해 낮게 파고들었다.
“이만 끝내자!”
쒜에엑!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음과 함께 노인의 주먹이 전진했다.
한 손으로는 방어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방어가 불가능하다면…….’
씨익!
“웃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오히려 노인의 주먹을 향해 몸을 날리는 정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그러한 모습에 황당함을 느낀 노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뻗고 있는 주먹을 멈추지는 않았다.
촤악!
“큭!”
기습에 가깝게 몸을 날려서 노인의 주먹을 회피했다.
하지만 옆구리를 스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고, 그것만 해도 면도칼로 베이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그래도 기회를 잡았다.’
정현과 노인은 한 걸음 정도로 밀착한 상태였고, 노인의 오른팔은 옆의 공간을 꿰뚫은 채로 회수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반면에 정현은 이미 준비를 한 채로 언제든지 손을 뻗어서 노인을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 방 정도라면…….’
노인의 방심이 독으로 작용했는지, 생각보다 수월하게 기회를 잡았다.
타이밍을 잴 필요도 없이 주먹으로 페이크를 넣고, 니킥으로 복부를 노렸다.
사삭!
“……!”
노인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정현의 페이크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이어지는 니킥을 이용하여 왼손으로 밀쳐 내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무, 무슨!”
“생각보다는 재미있었다. 이만…… 끝이다!”
당혹감에 소리치는 정현에게 노인의 발차기가 날아왔다.
한 손으로 방어를 할 수밖에 없는 정현은 충격을 흡수하지 못해서 비틀거렸고, 노인은 이번에야말로 끝이라고 확신했는지 정현을 분노하게 만든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주먹을 뻗어 왔다.
‘오래 참았다.’
정현은 원래부터 참을성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다.
‘한 번이다. 한 방이면 된다.’
지금의 순간을 위해 오랫동안 참아 왔다.
완벽한 기회…… 끝이라고 생각하며, 방심하고 있는 노인에게 반격을 할 수 있는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힘내라, 주먹아!’
쒜에엑!
노인의 주먹이 안면부를 향해 쏘아져 오는 순간, 정현은 그렇게 인내했던 한 마디를 내뱉었다.
“카운터 어택(Counter Attack)!”
시야가 정지되었다.
흐릿하게 흘러가는 공간의 중심에서 정현은 홀로 빠르게 움직이는 자신을 느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아슬아슬하게 노인의 공격을 빗겨 내며 전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방비 상태가 된 노인에게 이어지는 반격…….
쒜에엑!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