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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주먹이 뻗어 나갔다.
노인의 안면을 노리는 정확함과 신속함이 적절히 어우러진 일격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디바인 크로스(Divine Cross)!”
나지막하게 울리는 노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촤자작!
“……!”
노인의 코앞까지 다가간 정현의 일격이 바람에 휘말렸다.
‘아아!’
그것은 새하얀 빛의 폭발이었다.
노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정현의 주먹을 튕겨 낸 것으로 모자라, 엄청난 폭풍처럼 휘몰아쳐서 허공으로 솟구치게 만들었다.
“재미있었다. 애송이…… 이제 좀 자라.”
콰직!
“컥!”
낙하하는 정현에게 가해진 것은 쓴웃음과 함께 뻗어진 노인의 주먹.
그토록 정타를 피했을 만큼 가히 예상했던 위력이지만,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이 정현의 의식을 멀어지게 만들었다.
띠링!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충격으로 특수상태 ‘기절’이 적용됩니다.]
[한 시간 동안 강제적인 휴식 상태로 접어듭니다.]
“내게 스킬을 사용하게 만들다니…… 일단은 합격이라고 해 주지.”
‘뭐?’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으려고 노력한 정현이지만, 이미 기절 상태에 빠진 이상 방법은 없었다.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린 정현과 관계없이 게임의 진행 상태를 말해 주는 메시지 창들은 계속해서 생성되고 있었다.
띠링!
[퀘스트 ‘선택의 기로―Ⅱ’를 클리어하였습니다.]
[퀘스트가 연계됩니다. 새로운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자세한 정보는 퀘스트 창을 통해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짹짹, 짹짹짹!
애꿎은 숲 속의 새소리가 공허한 공터에 울려 퍼졌다.
* * *
“정말이지, 이건 믿을 수 없어.”
유나는 볼은 잔뜩 부풀린 채로 씩씩거렸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냥 귀엽다고 흐뭇한 미소를 지을 모습이지만, 유나는 골이 난 상태였다.
‘증표까지 사용해서 이곳에 들어왔는데, 이런 광경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고!’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유나의 소리 없는 절규…….
하지만 이곳에 그녀의 편은 없었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나 되냐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곳에는 숲의 공터가 있었고,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홀로 그곳을 지배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간단한 지르기다.”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잔뜩 긴장된 표정의 정현은 잠시 동안 마음을 가다듬다가 벼락처럼 진각을 밟으며 전면의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퍼엉!
미약하긴 하지만, 압축된 바람이 튕겨져 나가는 듯한 소음과 함께 정현이 자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공터의 가장자리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유나는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두 번째 시험을 통과하고, 벌써 세 번째 단계에 도달하다니. 내가 일주일을 매달린 다음 겨우 통과한 단계인데. 이건 사기야!’
유나는 얼핏 보기에는 가냘픈 미모의 여성이지만, 어렸을 적부터 활달했던 성격 탓에 태권도부터 시작하여 검도와 합기도 등 온갖 무도를 섭렵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조차도 노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일주일 동안 생각나지도 않을 만큼 승부와 패배를 반복했고, 수모를 당했다.
‘그런데 겨우 마음을 다잡고, 증표를 사용해서 숲에 들어올 동안 시험을 통과해? 저게 정말 인간이야?’
말하자면 한 번의 기회로 통과했다는 것인데, 결코 믿기지 않은…… 아니, 믿기가 싫은 진실이었다.
“후후, 정말 대단한 재목이군. 이 녀석이라면 내 염원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
그때 유나의 옆에서 팔짱을 끼고 정현을 지켜보던 노인이 한마디 툭하고 내뱉자, 다시 한 번 경악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 뭐라고? 이건 세 번째 단계를 충실하게 클리어해 가고 있을 때만 들을 수 있는 대사잖아.’
그렇게 유나가 놀라고 있는 사이, 노인은 언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냐는 듯 볼멘소리로 호통을 쳤다.
“주먹질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거냐? 이 애송이 녀석아!”
“……?”
뭐가 문제냐는 듯 빤히 바라보는 정현의 시선에, 노인은 비웃음을 지으며 옆으로 다가왔다.
“상체를 곧게 펴라. 그리고 정면을 바라봐라.”
움찔!
잠시 망설이던 정현이었지만, 곧 노인의 지적대로 자세를 수정하였다.
“발로 땅을 딛는다. 하지만 강하게 할 필요는 없다. 힘을 앞으로 전달한다는 느낌으로 가볍게 내딛으면 된다.”
“…….”
“허공에 가상의 적을 그려라. 세 발자국? 네 발자국? 네 앞에 적이 있다. 적은 너를 응시하고 있고, 방어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다. 적과 눈을 마주쳐라. 그리고 내딛은 발로 강하게 지면을 밀어내는 거다.”
콰앙!
점점 속도를 높이는 노인의 설명에 정현의 움직임 또한 신속하게 변했다.
정적이었던 움직임이 동적으로 변하는 순간, 지면을 박차는 정현의 한 걸음이 공터를 울렸다.
“주먹을 지른다. 하지만 단순히 내뻗는 것이 아니다. 적의 눈을 봐라. 완전히 파악해야 된다. 압도해야 된다. 그렇다면 단조로워지는 적의 움직임 정도쯤은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다. 그 순간 적을 꿰뚫어라.”
휘리릭!
그 순간 정현의 주먹이 바람을 강타하며 날카로운 소성을 울렸다. 실로 질풍과 같은 찌르기였다.
그 순간 유나는 멍한 표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보, 보여. 실제로는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정현이 그리는 가상의 적이 상상이 되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의 놀라운 집중력이었고, 그것에 만족했는지 심술궂던 노인의 얼굴에도 은은한 미소가 매달렸다.
띠링!
[대담하고, 정확한 찌르기! 어지간한 전사들은 당신의 두 번째 주먹을 보지 않아도 패배를 인정할 것입니다.]
[재능을 뛰어넘는 놀라운 경험으로 민첩(+1), 집중(+1)이 상승합니다.]
[‘정체를 감춘 노인’이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인사를 한다면 ‘건방진 애송이’라는 반응 정도는 보여 줄 것입니다.]
오랜만의 능력치 상승에 정현의 두 눈이 반짝였다.
더불어서 퀘스트 창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선택의 기로―Ⅲ]
등급 : ―
설명 : 강하다는 말은 무엇일까?
단순한 물리적인 힘? 권력? 재력?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준은 있다.
악(惡)을 심판하기 위해 신을 외면한 그는 원하지 않았지만, 대륙의 수많은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말한다.
‘그는 전설이다!’
조건 : 정체를 감춘 노인의 인정을 받아라.
펀치[100%] / 발차기[0%] / 방어[0%] / 재능[0%]
보상 : 퀘스트의 연계[선택의 기로―Ⅳ]
‘하나에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건가?’
웬만한 사람에게 한 장소에서 그만한 시간 동안 한 가지 행동만 반복하라고 한다면 고개를 저을 것이다.
하지만 정현은 달랐다.
‘점점 강해진다. 능력치뿐만이 아니라, 내 자신이 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세 시간이 무엇인가?
강해질 수만 있다면 며칠 밤을 꼬박 새도 상관없는 정현이었다.
‘으으…… 이런 괴물!’
유나는 전직 퀘스트의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정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고 있는 상태였다.
‘세 시간 만에 첫 번째 단계를 통과하다니, 프로 격투기 선수를 기준으로 그만한 펀치의 완성도를 보여 주지 않으면 퍼센트 상승률이 극악일 텐데. 프로 격투기 선수들의 실력이더라도 사흘은 걸린다며!’
히든 클래스의 전직을 방해한다는 애초의 목적은 망각하고, 마냥 속으로 비명만 지르고 있는 유나였다.
* * *
전쟁터에서의 여자란 쓸모없는 존재다.
물론 다양한 의미에서 생각해 본다면 얼마든지 도움이 될 방법이 있겠지만, 정현의 머릿속에서 생각되는 여성의 존재는 남성보다 근력과 지구력, 민첩성 등 수많은 신체적 분야에서 한계를 갖고 있는 나약한 인간들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콰직!
“컥!”
휘리릭!
정현의 콧등을 등주먹으로 가격한 후, 바깥다리를 걸어서 채며 상체를 뒤로 밀어 버렸다.
콰앙!
“으으…….”
물 흐르는 듯한 연속적인 공격에 정현은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뻗어 버렸다.
“하아, 하아…… 내가 이겼다!”
“제길!”
딱콩!
“이게 어디서 누나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해?”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마를 검지로 가볍게 튕겼다.
그 어이없는 행동에 잔뜩 찡그러져 있던 정현의 입가에도 허탈한 웃음을 시작으로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하하하! 그래, 졌다고. ‘팀’에서 제일가는 괴물 여자를 무슨 수로 이겨?”
“뭐, 뭐라구!”
실제로 정현이 괴물이라고 말한 것과 다르게 길게 뻗은 팔다리와 더불어서 조각상처럼 잘빠진 몸매를 가진 미모의 여성이었지만, 아무튼 놀림을 받은 여성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면서 도망가는 정현의 뒤를 쫓았다.
‘그랬던 적도 있었지.’
추억을 회상했다.
‘팀’에 있었을 당시, 정현은 조금도 숨기지 않는 20대 초반의 활발한 청년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다.
누구 하나 뒤처지는 사람이 없는 동등한 존재들이기에…… 의지할 수 있었고, 그들도 정현이 가진 본연의 모습을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에 억지스러운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세상은 정현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조금도 알아주지 않았다.
게다가 무례했다.
능력과는 관계없이 나이의 높낮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기본이고, 집안의 배경과 재력 등의 온갖 물질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정현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잘못한 것은 그들이니까.’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절망과 함께했으며, 이어지는 성인이 된 순간에도 피투성이로 전쟁터에서 소일했던 정현으로서는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고, 사회의 부적응자로 낙인찍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너희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큭, 그렇다면 나도 배려할 필요는 없지. 너희들은 무능하니까. 하찮은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니까.’
그때부터 정현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다.
누구와의 접촉도 거부하고, 자신이 세운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였으며, 그 결과대로 대하였다.
그렇기에 알고 지내는 남자들도 몇 없지만, 여자들은 그야말로 불모지였다.
“이얍!”
지금의 순간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쒜에엑!
“후우…….”
여자가 행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탄력적이고 날카로운 발차기가 정현을 노리고 들어왔다.
물론 과거에는 이것보다 더욱 대단한 여자의 발차기를 경험해 보았지만, 그것은 지나간 추억일 뿐이다.
터엉!
“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