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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부드럽게 충격을 흡수하여 튕겨 내는 정현의 움직임에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치던 유나는 곧 볼을 부풀리며 땍땍거리기 시작했다.
“치사해, 치사하다고! 어떻게 남자가 돼서 여자한테 한 번을 안 봐줘? 평생 여자 친구도 못 사귈 거야!”
“…….”
정현은 쉬지 않고 종달새처럼 짹짹거리는 유나를 기묘한 생물을 바라보듯이 쳐다보았다.
“뭐, 뭘 봐?”
빤히 바라보는 정현의 시선에 부끄러웠는지, 소리치던 것도 멈추고 얼굴을 붉히는 유나.
그것을 보며 정현은 이 기묘한 존재를 관찰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어지간한 남자보다 강하다. 아니, 이 정도라면 체육관의 트레이너들 정도는 되겠는데.’
그것은 방금 전까지 유나의 공격을 방어하며 느꼈던 손등의 얼얼함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근력이나 민첩 등의 능력치는 현실 세계에서의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단하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기술의 완성도나 공격을 시도하는 타이밍 등은 대략이나마 유나의 실력을 예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씨! 지금 딴생각하지?”
“…….”
노골적인 정현의 시선에 적응이 되었는지, 눈을 흘기며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그것을 본 정현은 이윽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저 어이없을 정도의 뻔·뻔·함!’
사건의 발단은 아주 가벼운 것이었다.
정현이 발차기의 수련을 끝마치고 방어 수련에 들어갔을 때, 노인은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애송이 녀석을 공격한다면 제대로 된 수련이 될 수 있을까?”
더불어서 단번에 ‘송장’을 치우게 될 것이라느니, 당장 빛의 교단의 대사제의 ‘치료’를 예약해 놓으라느니, 온갖 비아냥거리는 말들은 생략하겠다.
아무튼 결론은 간단했다.
과거 퀘스트를 진행하여 인연이 있는 유나를 보고 노인이 정현의 수련 상대로 지목을 한 것이다.
물론 유나는 공격을 하고 정현은 수비만 하게 되는 불리한 대련이었지만, 정현은 퀘스트가 계속해서 진행이 되고 있다는 점에 만족하였고, 유나는 계속해서 치미는 스트레스의 ‘원인’을 마음껏 혼내 줄 수 있는 생각에 기분 좋게 승낙을 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대련…….
정현의 예상과는 다르게 유나의 실력은 평범함을 탈피한 수준이었고, 일방적으로 방어밖에 할 수 없던 탓에 예상외의 일격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강해지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수련도를 올리는 정현과,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명언을 실감하고 분노 게이지가 치솟은 상태였던 유나의 조합은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갖게 되었다.
만약 유나가 건성으로 정현을 상대했더라면, 제대로 된 방어로 평가받지 못하여 수련도를 상승시키는 데 애를 먹었겠지만, 혼신의 힘을 다한 유나의 공격은 기술적으로도 물론이고 캐릭터의 능력치도 상당하여 눈 깜짝할 사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정현의 고속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
물론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살을 맞댄 사이라는 미명하에 말을 놓으며, 정현을 때린 주먹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지만 말이다.
“후…….”
“앗! 설마, 그 한숨 날 보고 쉰 거야? 아우…… 무례해! 그런 반응 열 받는다고!”
어째 정상적인 여자들과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뱉는 정현과, 다시 펄펄 뛰며 홧김에 달려드는 유나의 모습은 이제 자연스러울 정도다.
“에잇! 이거나 받아라!”
휘리릭!
예고 없이 다시 시작된 대련이었지만, 정현은 능숙하게 방어의 동작을 취했다.
그렇게 몇 번의 대련이 반복되었을까?
막상 대련이 시작되면, 볼을 잔뜩 부풀리던 유나도, 한숨을 내쉬며 본인의 박복함을 한탄하던 정현도 진지한 태도로 돌아서서 매순간에 최선을 다했다.
그만큼 서로를 향해 부딪쳐 가며, 약간이나마 상대방을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띠링!
[바늘 하나 들어갈 곳이 없어 보이는 완벽한 방어! 당신을 공격하는 자들은 문자 그대로 때리다가 지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능을 뛰어넘는 놀라운 경험으로 근력(+1), 체력(+1)이 상승합니다.]
[‘정체를 감춘 노인’이 당신에게 상당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궁금한 것을 물어본다면 ‘멍청한 애송이’라는 반응 정도는 보여 줄 것입니다.]
“퀘스트 창 오픈!”
[선택의 기로―Ⅲ]
등급 : ―
설명 : 강하다는 말은 무엇일까?
단순한 물리적인 힘? 권력? 재력?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준은 있다.
악(惡)을 심판하기 위해 신을 외면한 그는 원하지 않았지만, 대륙의 수많은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말한다.
‘그는 전설이다!’
조건 : 정체를 감춘 노인의 인정을 받아라.
펀치[100%] / 발차기[100%] / 방어[100%] / 재능[0%]
보상 : 퀘스트의 연계[선택의 기로―Ⅳ]
‘이제 하나 남았군.’
기본적인 공격과 방어는 완료를 한 상태다.
남은 것은 재능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내용 하나뿐이었다.
‘선택의 기로―Ⅲ’에 돌입한 지 게임의 시간으로 12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놀라운 결과였다.
“지금까지 고생 많았다.”
“……?”
갑자기 정중한 어투로 말하며 정현에게 다가온 노인은 복잡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나는 하나의 문제를 제시하려고 한다. 너는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
대답은 필요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정현은 강렬한 눈빛으로 얼른 문제나 제시해 보라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노인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추구하는 이상(理想)…… 그것을 확인하여, 너의 그릇을 판단하겠다.”
“…….”
오두막집 앞 공터에 천근같은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5. 전설
‘나는 무슨 생각으로 살아왔을까?’
바라는 꿈, 목표로 추구하는 것, 모두 이상(理想)을 뜻하는 해석이다.
정현은 노인이 준 리얼 기준의 사흘이라는 시간 제한을 생각하며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으음…… 이제 마지막이네.”
아직 퀘스트의 단계가 하나 더 남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선택을 위한 분기점일 뿐 평가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복잡한 시선으로 정현을 바라보던 유나…….
그사이 정현은 오두막집 옆에 자란 아름드리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아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렸을 적의 꿈은 과학자였지. 물론 그것도 금방 바뀌기는 했지만…….’
어린아이는 뭐든지 금방 질리기 마련이다.
이어서 선생님, 공무원 등, 여러 가지 어린아이들을 기준으로 하는 인기 있는 직업들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직업일 뿐, 이상(理想)이라고 하기에는 어렵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꿈을 말했다.
그러고는 부모님을 떠나보낸 청소년기의 암울함을 반추했다.
군에 입대하여, 최고를 향해 달려가던 기억이 손짓했다.
‘팀’에 소속되어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동료들과 불가해의 미션에 도전하던 뜨거운 추억을 곱씹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은…….’
결론이 나왔다.
아니, 처음부터 답은 너무나 간단했고, 언제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난 최고, 누구보다 위에 서 있는 사람이 될 거다.’
어쩌면 어린아이의 치기와도 같은 선언…….
하지만 정현은 그것을 위해 ‘전설’에 도전했다.
* * *
“후우, 후우…….”
강제접속종료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정현은 로그아웃 후, 가벼운 식사 및 휴식을 취한 뒤 오늘치의 운동을 위해서 체육관으로 향했다.
위이잉!
“오, 정현이 왔네. 역시 부지런하다니까.”
호흡을 조절하며 체육관으로 들어오는 정현을 본 트레이너 문수가 반갑게 손짓을 했다.
“……?”
“아아,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사람이 매일 운동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 가끔씩은 건설적인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자고.”
정현은 나름대로 실력을 갖춘 두 명의 트레이너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인사 정도는 나누는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적극적으로 나서는 문수 때문에 약간 당황한 눈빛을 보였다.
“다름이 아니라, 궁금한 것이 있어서…… 정현이 너 ‘리얼(Real)’이라고 알고 있지? 혹시 플레이 중이니?”
문수는 런닝머신을 달리면서 TV로 리얼에 대한 특집 방송을 시청하고 있던 정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약간의 확신을 담아서 질문을 던졌다.
“……네, 플레이 중입니다.”
“역시!”
무엇이 그리도 기쁜지, 손뼉을 치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는 문수.
그 태도에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정현은 이어질 말들을 기다렸다.
“잠시만…… 어이, 준석아! 이리 좀 와 봐.”
“왜? 무슨 일인데.”
문수가 소리치자, 체육관 안쪽에 있는 휴게실에서 차분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대답해 왔다. 문수와 동갑내기 트레이너로 활동 중인 준석이었다.
“우리 예상이 맞았어. 정현이도 리얼의 유저였다고. 하하하,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는걸.”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지. 정현이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것은 엄연히 현실일 뿐, 게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니까.”
“야야, 너도 잘 알잖아. 현실에서의 격투 센스와 기본기 등이 리얼의 세계에서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아마 정현이 정도라면 무난하게 상위권에 들어갈걸. 어쩌면 유명한 랭커일지도 모르지.”
침착한 성격대로 현실과 게임의 차이를 이야기 하는 준석이었지만, 잔뜩 들떠서 소리치는 문수의 목소리에 묻혔다.
“제가 리얼을 플레이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응? 아아, 당연히 중요하지!”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정현이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내자, 문수가 적극적으로 대답했다.
“하하하, 이번에 우리 일행들이 굉장한 발견을 했거든.”
“문수야!”
“야, 정현이 성격 모르냐? 얼마나 입이 무거운 녀석인데.”
“…….”
문수가 입을 열려고 하자 다급하게 만류하는 준석이었지만, 정현의 입이 무겁다는 사실에는 동의하는지 금방 침묵 모드로 돌아섰다.
“자그마치 C클래스의 던전이라고. 이름은 ‘하르갈의 무덤’이라고 하는데, 언데드 몬스터들이 주로 등장하는 곳이고, 오늘부터 파티원들과 본격적으로 탐험하려고 하는데, 약간 전력이 모자라는 것 같아서 말이야.”
“…….”
“정현아, 너만 괜찮다면 함께하고 싶은데. 어때? 우리를 비롯해서 일행들 모두가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실력자들이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정현이 합류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하는 문수.
확실히 C클래스의 던전은 그만한 매력이 있었다.
가상현실게임 리얼(Real)에 존재하는 던전의 등급은 E―D―C―B―A―S―SS로, 총 7단계가 있었다.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레벨과 관계없이 등급이 높을수록 강한 조합과 난이도를 갖춘 던전으로 설정이 되었고, 반면에 경험치와 획득할 수 있는 아이템들도 고급이었다.
“정현이 너도 현재까지 클리어된 최고 등급의 던전이 C클래스라는 것은 알고 있지?”
“…….”
시스템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정보를 수집하는 정현은 처음 듣는 내용이었기에 고개를 저으며 추가 설명을 요구했다.
“리얼의 시간으로 일주일 전쯤에 듀얼리스트(Duelist) 카린과 성직자 랭킹 1위의 ‘엘’을 비롯한 5인 파티가 리얼 최초로 C클래스의 던전을 클리어했잖아. 우리도 그런 엄청난 역사를 시도하는 거라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문수는 그 일로 인해서 카린을 비롯한 유저들의 인기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침을 튀기며 설명하였고, 그들이 얻은 아이템을 이야기할 때는 목에 핏대까지 세우면서 열변을 토했다.